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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윈윈 우승’보여준 박정환과 신진서
 
▲ 신진서 9단(오른쪽)이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첫 우승

스포츠경기에선 선수 교체가 빈번하다. 아이스하키처럼 링크에서 뛰는 선수 전원을 덩어리채 묶어 수시로 교체하는 종목도 있다. 야구 축구 등은 한 경기에서 아웃되면 다시 그라운드를 밟을 수 없지만 농구 핸드볼 등의 종목은 무한정 재투입이 가능하다.

바둑은 기본적으로 개인 종목이지만 단체전으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과정에서 이미 예정됐던 선수가 중도에 다른 선수로 교체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최근에 제31회 TV바둑아시아선수권서 우승한 신진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TV아시아선수권은 한 중 일 3개국 TV속기 타이틀 우승자와 준우승자, 그리고 전기(前期) 대회 우승자 등 7명이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가리는 국제 속기 기전이다. 한국 대표는 KBS 바둑왕전 우승, 준우승자인 신민준과 박정환, 그리고 전년도 이 대회 챔프인 김지석 등 3명이 출전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박정환이 TV아시아선수권 개막을 한 달 가량 앞두고 출전 포기를 선언했다. 이 대회 이틀 후 열리는 제12회 춘란배 결승(상대 박영훈 9단)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각종 세계 타이틀을 골고루 획득해 본 박정환이지만 TV아시아 우승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출전을 포기한 것은 더 크고 더 권위있는 메이저 대회인 춘란배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박정환의 대타(代打)로 선정된 기사가 신진서다. 박정환으로부터 불참 의사를 통보받은 한국기원이 랭킹 최상위자인 신진서의 파견을 결정한 것이다. TV아시아대회가 열리기 직전 신진서의 한국 랭킹은 1위, 박정환 2위, 김지석과 신민준은 각각 3, 4위였다.

신진서는 대타로 나간 제31회 TV아시아 대회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결승서 중국의 떠오르는 신예이자 동갑나기인 딩하오(丁浩)를 눕혔다. TV아시아선수권은 메이저급은 아니지만, 신진서가 차지한 최초의 성인급 국제 타이틀이었다. 이전에 신진서가 차지한 우승은 2017년 18세 이하들만 출전하는 제4회 글로비스배가 유일했다.

이틀 뒤 중국 타이저우서 시작된 제12회 춘란배에선 박정환이 같은 한국기사인 박영훈을 2대0으로 눕히고 개인 통산 4번째 세계 메이저 정복에 성공했다. 박정환으로선 당초 구상대로 목적을 이뤘으니 사소취대(捨小就大)한 셈이었다.

한국 바둑계로서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최상의 결과가 됐다. 신진서가 TV아시아를 놓쳤다면 박정환이 책임(?) 추궁을 당할 수도 있었다. 또 TV아시아를 양보(?)한 박정환이 춘란배 우승도 이루지 못했다면 그 역시 어색한 모양새가 될 수 있었다. 한국기원은 두 우승자가 귀국한 후 이례적으로 특별 환영행사를 열어 이들의 분전을 치하해주었다.

오는 8월 29일부터 시작되는 제24회 삼성화재배엔 변상일 9단이 행운의 대리 출전권을 얻었다. 전년도 대회 준우승으로 자동출전 시드를 갖고 있던 안국현 9단의 군 입대로 공식랭킹 최상위자인 변 9단에게 행운이 돌아간 것이다. 경쟁률 수십대 1의 통합예선을 면제받고 본선에 직행한다는 건 대단한 보너스다.

국제 바둑대회 대리 출전 비화는 과거에도 종종 발생했다. 국가대항 단체전인 농심배 제6회 대회(2004~2005년)때의 장쉬(張栩) 9단도 그런 케이스였다. 농심배는 한 중 일 3개국서 5명씩 나와 마지막에 1명이라도 남는 나라가 우승하는 국가 연승제 방식의 대회다.

한국 1명, 일본과 중국이 각 2명씩 남은 상황에서 2라운드가 끝났다. 이듬해 2월 23일 상하이에서 3라운드가 시작됐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의 다음 주자(4번)로 출전케 돼있던 가토 마사오(加藤正夫) 9단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당시 일본기원 이사장이기도 했다.

급히 ‘핀치히터’로 교체 출전한 기사가 바로 장쉬 9단이었다. 하지만 장쉬와 마주 앉은 이창호 9단은 상대를 일축하며 2연승했고, 그 여세를 몰아 왕레이(중국) 왕밍완(일본) 왕시(중국)까지 제쳐 5연승, 한국의 우승을 결정지었다. 바둑사에 찬란히 남은 저 유명한 ‘상하이 대첩’이었다.

최고 인기 타이틀전인 LG배 조선일보기왕전에도 대리 출전 역사가 있다. 2013년 열린 제18회 대회였다. LG배 역시 전기(前期) 우승 및 준우승자에게 자동 출전권(시드)를 제공한다. 국가시드로 한국에 할당된 티켓은 5장이다. 전기(17회) 우승, 준우승자인 중국 스웨와 원성진에겐 대회시드가 돌아갔다.

대회 개막을 한 달 앞둔 시점에 군 기관이 대회시드 보유자 원성진의 ‘출전 불가’를 최종 결정했다. 이에 한국기원 측은 회의를 열고 차순위자인 이영구에게 대체 출전 티켓을 승계시켰다. 주최사인 조선일보와 LG그룹은 원성진에게 제대 후 첫 대회인 제20기 LG배 때 와일드카드를 주는 배려를 했고, 원성진은 본선 8강까지 진출했다.

제18회 LG배 대타 출전자인 이영구가 그 해 거둔 성적은 1승 1패였다. 1회전서 대만 대표 샤오정하오를 눌렀으나 2회전서 일본 바둑계를 휩쓸던 이야마 유타에게 패하면서 16강 진출에 그쳤다.

TV아시아선수권대회에선 앞서 언급한 올해 대회 우승자 신진서 외에 몇 명의 대리 출전자가 더 배출됐다. 2003년 제15회 대회 때는 이창호의 ‘중복 자격’이 문제를 야기했다. KBS바둑왕전 우승자인데다가 전기 챔피언이어서 자격이 중복된 것.

이창호와 이상훈 7단(KBS바둑왕전 준우승자) 외에 또 한 명으로 누구를 보낼지를 놓고 검토 끝에 그해 21기 KBS바둑왕전 3위 입상자인 중국출신 기사 장주주(江鑄久)에게 행운이 돌아갔다. 장주주는 그러나 첫 판에서 저우허양에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2013년 열린 제25회 TV아시아선수권 때도 병역이 문제가 됐다. 전년도 우승자로 자동 출전권을 보유한 백홍석이 군에 복무 중이었고, 역시 출전 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중국과 일본은 바둑왕전 1, 2위 입상자인 박정환 및 이창호와 함께 출전할 또 한 명의 한국기사 선정권을 한국기원에 위임했다.

그해 대회 개최 장소인 도쿄에는 결국 이세돌 9단이 날아갔다. KBS바둑왕전 3위 자격이었다. 그러나 그 해 TV아시아대회의 한국기사들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이세돌과 이창호는 첫 판서 탈락했고, 박정환도 1승에 그치면서 준우승했다. 일본의 이야마 유타(井山裕太)가 처음 우승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대리 출전의 발생 원인은 해당 기사의 군복무나 사망, 중복 자격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 기사들의 병역 의무와 관련된 교체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일본이나 중국 등엔 이런 상황 사항이 발생하지 않았다.

대타 출전자들의 성적이 대체로 기대 이하인 이유는 준비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대개 대회 개막 직전 통보받음으로써 마음의 준비도, 상대할 기사들에 대한 분석도 미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제31회 TV아시아선수권에 박정환의 대타로 출전, 우승컵을 들어올린 신진서의 쾌거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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