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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바둑계 최고의 풍운아(風雲兒) 이세돌이 또 한 번 바둑계를 크게 흔들었다. 지난 3월 5일 치른 중국 커제와의 이벤트 대국 후 “올해 안에 승부사 생활을 마감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은퇴를 하거나, 아니면 휴직원을 내고 재충전 기간을 가질 것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란 보충 설명이 뒤따랐다.

`이날 커제와 둔 바둑 내용은 이세돌의 완패였다. 초반 패 바꿔치기가 일어났는데, 그 한 번의 겨룸으로 벌써 대세를 놓쳤다. 이세돌은 이후 특유의 강수를 터뜨리며 반전을 노렸으나 커제 역시 강수로 맞받아치며 추격 기회를 주지 않았다. 패한 이세돌로선 자존심이 상할 만 한 내용이었다. 변화무쌍하고 소름 돋는 ‘이세돌 표’ 드라마를 펼쳐보지도 못 한 채 물러난 일국이었다.

하지만 이세돌은 국후 회견 때 은퇴 또는 휴직 발언이 이미 2년쯤 전부터 했던 생각이라고 밝힘으로써 이날 완패로 인한 즉흥 발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당초엔 작년(2018년)까지만 승부를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아쉬움 때문에 강행하지 못하고 올해까지 왔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어떤 분야이건 20년쯤 하면 지치게 마련“이라며 자신이 오랜 승부에 지쳐있음을 밝혔다.

이세돌이 지쳐있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1995년 12살 입단 이후 4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초대형 대국을 수도 없이 치러온 이세돌이다. 2014년 동갑라이벌 구리와의 10번기, 2016년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 등 역사적 대국엔 항상 이세돌이 주연으로 참가했다. 세계대회 14회, 통산 50회 등 우승도 밥 먹듯 거듭했다. 2009년엔 한국기원의 징계 후유증으로 6개월 간 휴직을 단행하는 등 그는 늘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지칠 때도 됐다. 그런데 지친다는 건 단순히 육체적으로 쌓인 피로에서만 기인하는 건 아니다. 일이 뜻한 대로 잘 풀리면 웬만한 피로는 잊도록 설계돼 있다. 이세돌이 지금 겪고 있는 ‘피로’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2가지가 복합된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 같다. ‘정신적 피로‘란 성적이 잘 오르지 않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다.

이세돌 자신도 5일의 블러드밴드 대국 종료 후 회견에서 이 같은 심경을 솔직히 밝혔다. “지금까지 좋은 바둑을 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해방돼 홀가분하다. 뭔가 새로운 수 없이는 커제처럼 젊은 강자들을 이길 수 없다.” 더 이상 솔직할 수 없는 자기 고백이다.

바둑 승부만큼 나이가 고약한 변수로 작용하는 분야도 없다. 요즘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를 전성기로 친다. 그 나이를 넘어가면 그 어떤 항우장사도 견뎌내지 못하는 게 이 동네 불문율이다. 천하의 이창호도 서른다섯 살 때 바둑왕전을 마지막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 했다. 이세돌은 이미 한국식 나이로 서른일곱 살이다.

이세돌은 2018년 초중반 까지만 해도 시들 줄 모르는 꽃처럼 싱싱했다. JTBC배 2차 대회서 우승하고, 비공식전이지만 커제와의 해비치배서 승리하는 등 4월까지 8할 대 승률을 내달렸다. 하지만 이후부터 딴 사람이라도 된 듯 부진의 늪에 빠졌다. 국내외 주최 국제대회에선 대부분 1회전서 탈락했고, 바둑리그는 4승 10패로 마감했다. 연말 농심배에서 판팅위의 연승에 일조한데 이어 이번엔 ‘갚아야 할 빚이 많은’ 커제에게 완패했다.

소위 초1류 프로들의 승부사로서의 자존심은 일반 팬들로선 상상하기 힘들만큼 강하다. 그중에서도 이세돌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정평이 있다. 타고난 재주에 투철한 승부기질이 합쳐져 최고 승부사 이세돌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이세돌이라도 무한정 질주는 불가능하다. 신이 마련한 세월이란 장치 때문이다. 중요한 판에서 연속으로 무너진 것은 세월이란 이름을 지닌 자연의 섭리다.

패배가 오죽 힘들고 괴로웠으면 은퇴 또는 휴직까지 떠올렸겠는가. 프로기사는 일종의 예술가적 측면도 있어 나이가 든다고 굳이 은퇴해야만 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가 은퇴를 입에 올린 것은, 자신의 눈높이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지 못하는 이상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기사생활을 유지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한 명의 초1류 기사인 김지석 9단은 언젠가 필자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는 바둑이 내 인생의 전부였지만 앞날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습관적으로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대회에 출전하는 기사는 되기 싫다. 어느 시점부터는 바둑 아닌 다른 재미있는 분야 공부도 해보고 싶다.” 놀랍게도 그가 이 발언을 한 시점은 무려 6년 전으로,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2013년 4월, GS칼텍스배 결승서 이세돌을 3대0으로 완파한 직후였다.

필자는 이세돌의 이번 폭탄 발언과, 6년 전 김지석의 했던 말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다. 둘 모두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서까지 승부행위를 계속하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다. 이세돌은 갑자기 찾아온 고령화(!) 슬럼프에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변신의 필요성을 공개한 것이고, 김지석은 아직 겪지 않은 자신의 훗날 모습을 내다보고 미리 생각을 밝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2012년 12월 상하이. 제17회 삼성화재배 결승서 이세돌이 구리를 2대1로 꺾고 우승했다. 그 이튿날 필자와 이세돌 단 둘이 마주앉아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세돌이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내 위치가 얼마나 갈 걸로 보세요? 내 생각엔… 10년쯤은 이어지겠죠?” 항상 자신감에 차있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이세돌이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최면일 수도 있었다. 필자는 그런 그의 자신감이 든든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다짐이 지켜질지에 대해선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공교로운 일이다. 이세돌은 그 대화 이후 세계 정상에서 서서히 내려왔다. 메이저 대회에선 한 번도 우승을 추가하지 못했다. 두 차례 TV아시아선수권을 제패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는 게 고작이었다. 이 무렵부터 이세돌을 향한 ‘바둑연령 시계’가 가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빨리 시작될 줄은 정말 몰랐다.

뛰어난 기량을 갖춘 승부사일수록 패배 이상으로 아픈 것은 없다. 초1류 프로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그 살을 에이는 아픔을 달랜다. 이세돌은 바둑에 패할 경우 상대를 붙잡고 의문이 풀릴 때까지 복기를 계속한다. 물론 그의 불타는 탐구심이 첫째 이유지만 자신에 대한 분노를 다스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렵게 상대를 돌려보낸 뒤엔 밖으로 나가 혼자 무한정 길거리를 걷는 게 그만의 방식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이세돌의 향후 진로를 정확히 점치기는 힘들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반상 운영처럼 일상에서도 변화무쌍한 행마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한 때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바둑을 보급할 계획을 밝혔다가 성사되지 못했다. 알파고 대결 이후엔 제주도 생활도 꿈꿨다가 역시 접었다. 징계와 휴직 등, 바둑계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해 본 이세돌이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이세돌의 ‘탈출’이 바둑계 전체가 아니라 승부에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휴직이 되건, 은퇴를 하건 바둑인으로의 활동은 계속할 생각이라고 했다. 얼마 전 시작한 유튜브 해설도 그 중 하나라는 것. 선언 이후 그는 일반 기전서 3연승을 질주 중이다. 홀가분해진 덕분일 것이다. ‘불꽃의 승부사’ 이세돌이 또 한 번 진화한 모습으로 바둑계를 위해 새롭게 재탄생하는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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