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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렬의 바둑이야기
  가장 단위가 높은 프로기사는 누구일까
 


며칠 전 조한승 9단이 1000승 고지에 올랐다는 뉴스가 떴습니다. 한국기원이 출범한 이후 배출된 프로기사 수가 줄잡아 5백명이 훨씬 넘습니다만, 1000승을 달성한 국내 기사는 조 9단을 포함해 단 9명뿐입니다. 엄청난 기록이란 걸 짐작할 수 있지요. 프로기사 생활 23년 만에 이룬 경사이니 매년 평균 40승 이상을 따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와 꾸준함 없이는 불가능한 숫자이죠.

조 9단의 위업을 칭찬하는 자리에서 이런 우스개가 나왔습니다. 조한승이란 이름은 조(兆)+한(1)+승(勝)이고, 이를 숫자로 정리하면 1,0000,0000,0000승에 1승을 보탠 1,0000,0000,0001승(勝) 아니냐는 거죠. 물론 조한승 9단의 정확한 표기는 趙漢乘입니다만,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지 말기로 해요^^.

1조는 1 뒤에 동그라미가 무려 12개나 붙은 천문학적 숫자입니다. 1억(億)의 1만배입니다. 흔히 억만장자란 말을 쓰지만 그런 숫자는 없고, 이에 해당하는 정확한 수 단위가 조(兆)인 셈이죠. 조한승 9단은 누가 뭐래도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승수를 올린 프로기사로 등록된 셈입니다.

즐거운 우스개 분위기는 단위 쪽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프로기사 중 최고단자는 누구냐는 거죠. 국내 최초로 9단에 올랐던 조훈현? 9단들만 참가하는 맥심배 최다(5회) 우승자인 이세돌? 다 틀렸습니다. 이 난센스 퀴즈의 원래 정답은 김재구 8단이었습니다. 몇 년 전 현역에서 은퇴한 원로기사죠. 이분 이름을 한자로 쓰면 金在九 八단인데, 끝의 두 글자를 합해 읽으면 무려 98이나 된다네요.

이런 셈법에 빠질 수 없는 집단이 있습니다. 오씨 성을 가진 기사 그룹이죠. 이들은 자기 단위 앞에 무조건 50단을 먹고 들어갑니다. 좌장은 오규철 9단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오9단“하고 부르니까 59단인 셈 아닌가요? 오유진 56단, 오정아 53단, 오장욱 53단, 오주성 52단,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은 오병우도 51단으로 당당히 최고단자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두 자릿수 단위 고단자 시대는 백(百)씨 성을 가진 프로기사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성씨부터 ‘원 헌드레드‘ 이니 이건 아무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백성호 백대현 백홍석, 이 세 분의 9단은 ’109단‘입니다. 9단만 따도 신의 경지라는데 109단은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존재입니까. 그 밑으로 백흥수 6단, 백찬희 3단, 백지희 2단도 100단이 넘습니다.

백씨 최고단 시대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원로 기사 천풍조 9단의 존재 때문입니다. 천 사범의 성 ‘천’은 千이죠. 백씨가 그렇듯 천씨도 ‘원 사우전드’, 숫자 1000과 정확히 일치하는 한자(漢子)입니다. 1009단이라니! 100단급 기사들이 아홉 점쯤 놓아야만 견딜 수 있는 치수 아닐까요? 참고로 중국 천야오예(陳耀燁) 9단은 천(千) 아닌 진(陳)씨로 ‘가짜 천 구단‘입니다.

천풍조 9단 이상으로 이색적인 존재가 있으니 李映九 9단입니다. 이 노총각 기사의 이름을 숫자로 풀면 209 맞지요? 여기에 단위까지 붙이면 2099단이 됩니다. 세상에! 엄청난 고단지죠. 하지만 이름을 이영구 아닌 이팔구 정도로 지어 2899단으로 만들지 않은 부모님이 살짝 원망도 됩니다. 지금보다 800단이나 더 높아질 기회를 놓쳤어요. 아무튼 바둑계는 1009단(천풍조 9단)과 2099단(이영구 9단) 간의 치수가 몇 점이 적당할지, 새로운 숙제를 받아들었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천문학적 단위 세계로 들어갑니다. 고단자 이야기만 나오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룹이 조씨 성을 가진 프로기사들이죠. 조씨 성은 사실 趙, 曺, 曹 등이어서 10의 12제곱을 뜻하는 兆와는 다릅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통하고 있습니다.

조훈현 조대현 조한승 조혜연등 4명의 9단은 졸지에 1,0000,0000,0009단이 됐습니다. 조한승 9단은 1,0000,0000,0001승과 더불어 2관왕이네요. 조경호 6단, 조인선 4단, 원로 조영숙 3단과 초년병 조승아 조연우 초단도 1조(兆)단을 기본에다 깔고 시작합니다. 상대기사들이 주눅 들어 어디 바둑 두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게 다 일까요? 모두가 알다시피 숫자의 세계엔 끝이 없습니다. 만(萬)의 만 배는 억(億), 억의 만 배는 조(兆)라는 데까지는 설명했습니다. 조의 만 배는 경(京), 경의 만 배는 해(垓)입니다. 다시 해의 만 배는 자(秭), 자가 만 개 모이면 양(穰)이고 양의 만 배는 구(溝)가 됩니다.

구의 일 만 배는 간(澗), 그 일 만 배는 정(正) 하는 식으로 재(載), 극(極)…으로 이어집니다. 그 위로 항하사(恒河沙), 아승기(阿僧祇), 나유타(那由他), 불가사의(不可思議), 무량대수(無量大數)라네요. 이들은 구체적인 숫자라기보다는 무지, 엄청, 까무러치게 많은 수란 뜻이라는데 듣기만 해도 머리가 핑핑 돕니다.

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숫자 단위 가운데, 한글 음 성씨(姓氏)로 쓰이는 글자는 경, 양, 구, 정 정도인 듯합니다. 그런데 프로기사들 가운데 경씨나 구씨는 안타깝게도 없네요. 양씨 성을 지닌 프로기사는 양상국 양재호 양건 세 분의 9단이 있고, 정씨는 정수현 9단, 정동식 6단, 정두호 3단, 정서준 2단, 정연우 초단이 존재합니다.

숫자 정(正)을 아라비아 숫자로 쓰면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으로 무려 10의 40승(乘)입니다. 국내 정씨 가운데 최고단자인 정수현 9단을 여기에 대입하면 맨 마지막 0을 9로 바꾸면 됩니다. 마침내 세계 최고단 기사를 찾는데 성공했군요^^

서양엔 극한의 숫자로 구골(Googol)이란 게 있습니다. 10 뒤에 0을 100번 곱한, 즉 10의 1백 제곱을 뜻하는 수지요. 그러고 보면 고작(?) 10의 48승(乘) 인 극(極) 이후 그냥 “까무러치게 많은 수”로 넘겨버린 동양에 비해 서양 사람들의 도전 정신(?)이 한 수 위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에요. ‘구골플렉스’란 게 또 있습니다. 그 무지막지한 구골을 제곱 수, 즉 승(乘)으로 활용해 10의 구골 승(乘)을 뜻하는 것이라니 어떤 세계인지 짐작도 안 갑니다. 인터넷 검색 기업 구글(Google) 이름도 여기서 따왔죠. 구(具)씨나 구(丘)씨 성 프로기사가 있으면 구골 단(段)의 영광을 억지로라도 부여하려고 했는데… 안타깝게 한 명도 없군요.

2년 여 전 구글이 알파고란 이름의 본격 인공지능을 처음 개발하고 이세돌과세기의 대결을 펼칠 때 “바둑은 경우의 수가 바닷가 모래알보다도 많을 만큼 경이롭고 광활한 세계”라고 했죠. 앞에서 극한의 수 단위 중 하나로 소개한 항하사(恒河沙)도 ‘항하(恒河 · 갠지스강)의 모래‘란 뜻이며 엄청난 숫자를 의미합니다. 파 헤쳐도, 파 헤쳐도 그 끝을 찾아낼 수 없는 바둑이야 말로 이들 천문학적 숫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입니다.

단위는 한때 바둑 동네에서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다’란 이유로 경시당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사들의 전적을 단위에 적극 반영하기 시작한 십 수년 전부터 단의 권위는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단위에는 기량 뿐 아니라 기사의 경력과 관록까지 녹아 있어 모든 기사들이 한 단이라도 더 많이, 그리고 빨리 승단하고 싶어 하지요. 모든 프로들이 정진을 거듭해 그 소망을 이루고 진정한 무량대수, 구골의 경지에 오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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