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일본 기성전은 시작 전부터 들끓고 있었다.

1986년 이래 9년만에 조치훈-고바야시 대결이 현실화 됐기 때문이다. 이 사이 조치훈이 가지고 있는 본인방에 고바야시가 3년연속 도전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고바야시가 보유하고 있는 기성, 명인의 도전자로 조치훈이 이름을 내민 적은 없었던 것이다.

기성전과 명인전에서 고바야시는 '이번이야말로 조치훈'일 것이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치훈은 항상 막판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탈락했다. 그런 과정이 8년이야 지나고서야 마침내 조치훈이 도전권을 획득했다.

고바야시는 이 때의 조치훈을 두고 '몸과 마음, 기량이 최고조에 달한 때'라고 평했다. 기성 8연패, 명인 7연패(통산 8기 제패), 고바야시의 이 기록은 모두 타도 조치훈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방어기록을 늘려가고 있는 동안에 도전자 속에서 조치훈의 이름은 없었다. '조치훈은 곧 내게 도전해 올 것이다.'라고 고바야시는 매년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치훈으로 부터 타이틀을 방어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의미있는 것이기에.

잡힐 것 같으면서 잡히지 않는 '도전권'!! 그 초조함에 대한 이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고바야시일 것이다. 고바야시는 2대 타이틀을 계속 지키면서 조치훈을 기다렸다. 실제로 타이틀을 계속 지키고 있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타이틀전은 고전의 연속이었다. 기성 6연패 째, 가토 마사오(加藤正夫)를 도전자로 맞이한 방어전은 최종국까지 가는 피말리는 접전이었다. 이듬해 야마시로 히로시(山城宏) 전은 2승 3패후, 가까스로 2연승을 올려 방어에 성공했다. 다시 가토 마사오의 도전을 받은 8연패째는 1승 3패후 3연승이라는 실로, 조치훈式의 역전극으로 타이틀을 지켰던 것이다. 아마 이런 승부의 방식은 조치훈에게 한수 가르침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고바야시는 '겨우겨우 방어해서는 다음기는 위험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바야시가 사석에서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이 말은 조치훈이 도전자로 등장하자 현실화됐다.

1994년, 조치훈을 도전자로 맞은 제18기 기성전은 고바야시의 선승으로 막을 올렸다. 그렇지만 그 다음까지 승세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후 내리 3연패. 고바야시는 일찌감치 막판에 몰렸다. 제5국에서 승리, 일단 한숨을 돌렸지만, 그의 말대로 '몸과 마음, 기량이 최고조에 달한' 조치훈에게 결국 고바야시는 타이틀을 넘겨주고 만다.

'8년이나 기다려 주었던 고바야시였기 때문에 나도 젖먹던 힘을 다했다.'

기성을 빼앗은 직후 조치훈이 한 말이다.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손에서 타이틀을 빼앗아간 고바야시를 직접 무너뜨리고 타이틀을 되찾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으리라.

휠체어 대국 8년만의 기성 탈환이었다.

(류승필 spryoo@baduk.or.kr)

○... 관련기보는 제18기 기성전 도전7번기 최종국이 된 제6국이다. 94년 4월 월간바둑의 화보 및 표지를 주요 상보를 장식했지만, 예전만큼 한국에서의 인기가 높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 조훈현 9단과 함께 이창호 유창혁의 쌍두마차가 한국 바둑계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고바야시는 1인자의 자리에 올랐었지만, 제대로 조치훈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원죄(?)에 가까운 컴플렉스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보다 8년전 고바야시가 조치훈으로부터 기성을 빼앗을 당시 조치훈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게다가 8년만에 조치훈이 도전하자마자 바로 타이틀을 빼앗다니..

고바야시의 바둑생애중 가장 큰 시련이란, 바로 조치훈의 벽을 제대로 넘지 못했다는 그런 감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