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보급의 길을 떠나 내가 향한 곳은 네덜란드다.

첫날은 지역의 조그마한 바둑대회를 참관해 관계자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네덜란드의 여러 바둑인들도 내게 인사를 건넸고, 나도 간략하게 나의 소개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바둑 보급 하러 온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나는 자기 소개를 했는데도, 이들은 내가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저녁에, 네덜란드 바둑 클럽 중 한곳에서 연락이 왔다. 수화기 속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바둑 정말 잘 두나요?"

강경낭 아마5단

1990년8월1일생
명지대학교 2학년 휴학 중
2009년 전국체전 페어부 준우승
2008년 아마여류국수전 학생부 우승
2007년 여자연구생 1조

질문에 당황해서 바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이 내가 보급을 하러 온 사람이라고 네덜란드 바둑인들에게 말한 모양이다. 아, 바둑클럽이 뭐냐 하면, 한국으로 치면 동호회와 기원을 혼합한 개념 정도라고 보면 된다.

질문은 단순히 말해 이런 의미였다.
‘당신을 믿고 우리가 바둑을 배울 수 있느냐’

약간 기분이 언짢은 질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런 걸 물어볼 권리는 그들에게 당연히 있었다. 아마도 내가 ‘먼 나라에서 온 나이 어린 여성’이기 때문에 생긴 걱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배우는 데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에요”라고 말해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참았다. 그걸 입으로 백날 말해 봤자 의미는 없을 것이었다.

어설프게 겸양을 떨며 “실력은 별로에요”라고 하는 건 더욱 안 될 말이었다. 그들도 확신을 하지 못하면 나에게 바둑을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난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얼마 후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냈더니 바둑대회에 출전해 성적을 좀 내면 어떠냐는 권유의 말이 돌아왔다. 무척 좋은 제안으로 들렸다.

'대회엘 출전하자. 거기서 실력을 보여주고 이들을 안심시켜야겠다' 마음속에서 그렇게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바삐 수소문을 해봤다. 친구가 도와주었다.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바둑 대회를 찾아 보았는데, 마땅히 없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열리는 대회는 헝가리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헝가리 GP2010 국제바둑대회( Hungarian GP 2010 International Go Tournament)라는 대회였다. 가야 했다.

대회장은 부다케시(Budakeszi) 시(市)에 있었다.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차를 타면 30분 거리인데, 나는 트램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한 시간을 소요했다. 가는 길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봐도 정보를 찾기가 어려워서 지도도 없이 다녔다. 그나마 호텔에 도착해 교통편을 물어볼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힘겹게 온 게 보람이 있을 정도로 도시는 아름다웠다. 헝가리 작곡가 페렌츠 얼켈(Ferenc Erkel) 의 고향이라는 이곳은 거리 곳곳에 사적이 많았고, 우아한 교회 건물이 있었다. 사람들도 친절했다.

대회의 규모는 한국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았다. 우승 상금은 270유로. 숙박비를 빼고 나면 우승해도 오히려 마이너스다. ‘그런 거 따질 계제는 아니었지만 ㅋㅋ’

어린이 선수들이 어른 선수들보다 더 열기가 뜨거운 듯 보였다. 시합을 끝내고 나서도 또 두고 많이 배우려 했다. 표정들도 자못 진지하다. 시합 중에 한 판은 헝가리 어린이와 두었는데, 그 아이는 한국에 바둑 유학을 다녀왔다고 자랑을 했다.

나는 승승장구 해 결승까지 올랐다. 대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무척 놀라는 얼굴들이었다. 내가 결승에서 꺾은 사람은 팔 발로흐 6단이었는데, 헝가리 최강자라고 했다. 일본에서 연구생 생활을 한 적이 있단다. 유럽 전체로도 5위권 안을 맴돈다고 했다. 유럽에서 팔 발로흐 6단을 모르는 바둑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헝가리에서는 바둑을 가르치면서 살고 있다. 올 여름에 바둑 트레이닝을 한다며 홍보지도 들고 왔다.

우승한 다음날 바로 네덜란드의 여러 클럽에서 전화가 빗발 쳤다. "우리 클럽 챔피언과 바둑 한판 두어주세요", "강의 부탁합니다", “우리 클럽에 와 주셔야 합니다”

다행스럽고 즐거운 반응이었다. 무엇보다도 소식이 이렇게 빠른 데 놀랐다. 많은 대회 중 하나였지만 그들에게는 의미 있고 무게감 있는 대회였나 보다.

휴~. 이렇게 나의 바둑 보급 여정은 무사히 시작됐다. 현재 4군데 클럽에서 다니고 있다. 강의도 하고 지도기도 한다. 처음엔 물량공세를 펴서 가급적이면 많은 곳에서 열심히 뛰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버텨내질 못할 것 같다^^

네덜란드 바둑인들과 의기투합해서 단기계획을 하나 세웠다. 한달 안에 바둑클럽들 간 교류전을 열기로 했다. 지역이 멀면 인터넷으로라도 하자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보급할지는 좀더 지내면서 지역의 상황과 맞춰보아야 할 것 같다.

아참, 헝가리에 파견된 3명의 프로사범님도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물가가 싸서 거처도 궁궐 같은 곳이라고 한다. 헝가리에 바둑도장을 개원하는 것도 잘 되었다고 한다. 디아나 초단의 아버님이 많이 도와주셨다고 한다. 그쪽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