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흐름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편집과정에서 삭제되긴 했지만,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씬 중에 바둑두는 장면이 있었다.

추형도(문성근 분)는 대기업의 중역을 꿈꾸며 청춘도 가정도 팽개치고 오직 일만 하며 살아온 일벌레. 자연 그의 아내 이경자(황신혜 분)는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남편의 성욕감퇴로 생과부나 다름없는 결혼생활을 보낸다. 그러다가 IMF를 맞아 남편이 대기발령을 당하자 회사를 상대로 그간 생과부나 다름없이 지내게 한 데 대한 위자료 청구소송을 내기에 이르고, 영화는 이러한 법정싸움을 코믹하게 엮어 모순된 현대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여기서 생과부 이경자가 하도 답답한 나머지 일벌레 남편에게 "도대체 영화 한편은 제대로 볼 줄 아느랴? 그렇다고 기원에 가서 바둑 한판을 둘 줄 아느냐?"며 퉁바리를 준다.

주눅이 잔뜩 든 남편은 퇴근 후 큰 맘 먹고 기원에 들러보나 바둑의 '바'자도 모르는 주제이다보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첫점을 귀에 딱 착수한 상대는 한참이 지나도 추형도가 둘 생각을 않자 자꾸만 '초장부터 웬 장고?'하는 눈치를 사정없이 보낸다. 그러자 어쩔줄 몰라 당황하던 추형도가 백을 들어 부들부들 엉거주춤 갖다놓은 곳이 천원(天元)도 아닌 그 언저리의 네모칸 정가운데….

기상천외하게도 오늘 서능욱 사범이 첫점을 천원에 딱 놓은 품새를 목도하고 보니 갑자기 그 씬이 떠올라 두서없이 늘어본 이야기였다. 서사범은 전에 어떤 모임에서 딱 한번 잠깐 인사를 한적이 있었는데 그가 나를 아는 체해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걸어가 깍듯이 아는 체를 했다는 점을 바둑팬들게 밝히고 싶다. 바둑 둘 시간이나 기회는 비록 적지만 뒹굴뒬굴 누워서 TV바둑을 시청하는 것은 오래전부터의 내 취미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바둑TV가 생기면서 심야의 내 취미생활은 날새도록 비마행마하기 일수이다.

영화나 바둑이나 다 수읽기의 결정판

얼마전 절친한 후배 이택림이와 2점바둑을 두었는데 내가 대마를 잡고 이겨버렸다. 택림이는 요 몇 달전 바둑TV에 초청돼 장수영 九단과 8점바둑을 두었는데 지고도 분전을 인정받아 한국기원 공인5급 판정을 받았던 터였다. 순 야전(野戰)으로만 7∼8급 수준에 이른 내 바둑을 무대포형으로 얕잡아 보던 그는 "얼라? 바둑이 완존히 바뀌어부렀네!"라며 놀랐다. 바둑을 자주 두지는 못했지만 3년 서당개처럼 아무래도 보던 풍월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긴가민가 내 기력에 대해 자신하지 못했는데 막상 서사범과 8점에 비기고 "앞으로 이택림씨와는 호선에 두십시오"라는 격력와 함께 5급 바둑주민등록증까지 받고 보니 이거야말로 대종상 받을 때 못지 않은 기분이다.

바둑은 대학시절 1급 두는 친구에게서 배웠다. 대학 때 배운 당구 실력이 지금까지 그 수준이듯 바둑도 그 때 7∼8급 언저리에 놓고 둔 그 밑천으로 버텨왔다. 서울이나 근교에서의 촬영 때는 바둑둘 여유가 없으나 지방, 특히 산간오지에서의 촬영에는 그래도 바둑돌 잡을 시간이 있는 편이다. 90년 「남부군」겨울씬 촬영때는 밤촬영이 없어 한달간 그렇게 바둑을 많이 두어 보기도 처음이었다. 감독이나 배우들 중 바둑을 두는 이는 별로 없으나 촬영기사들 중에는 고수가 많다.

바둑이 절묘한 타이밍의 게임이라면 영화 역시 그렇다. 흥행의 성패여부도 사회적인 타이밍이나 운을 잘 타고나야 한다. 그리고 바둑이 착점을 결정하기까지의 수읽기와 결단이 중요하듯 영화도 촬영과정이 무척 중요하다. 시나리오에서부터 마무리 편집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곳에서라도 한컷한컷 전후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작업에 들어가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쉽다. 한판의 바둑은 기보를 남기지만 영화의 한 작품은 스크린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낚시와 골프를 좋아한다. 낚시터에 가면 짐을 풀기도 전에 마치 고기들이 다 도망가기라도 할 것처럼 허둥지둥 낚싯대를 서둘러 던지고 골프장에서는 필드에 나가기까지 아직 3시간이나 남았음에도 조바심내어 신발끈을 바짝 조이듯이 바둑도 그러한 설레임과 즐거움이 있다. 바둑판 앞에서는, 그래서 언제나 소풍을 앞둔 아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