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군대에서 졸병으로 있을 때였다. 내무반에 싸구려 바둑판 하나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졸병들이 넘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오직 고참들만의 도락을 위해서 존재하는 물건이었다. 졸병들에게는 오직 빗자루와 봉걸레가 도락의 전부로 지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바둑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였다. 바둑인구보다는 오목인구가 한결 많았다. 휴식시간이면 으레 고참들은 바둑판을 끼고 앉아서 신선놀음에 야전삽자루가 썩는 줄도 모르고 오목에 열중해 있었다.

그러나 졸병들의 눈에는 그 광경이 반드시 신선놀음으로만 보여지지는 않았다.오목에 패배만 하면 졸병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고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군대가 민주화되어 있지 않을 때였다. 아무리 가혹한 사적 제재라도 당연한 처사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었다. 졸병들은 그 고참이 바둑판을 꺼내놓기만 하면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바둑판이 숭고해 보일 턱이 없었다.

시국이 어지럽던 때였다. 김신조씨가 무장병력을 거느리고 서울 한복판까지 침투한 직후였다. 복무연한이 늘어나서 고참들이 최악의 저기압에 빠져있었다. 군대생활이 편할 리가 없었다. 언제나 내무반 공기는 엄동설한이었다.

그러나 군대에는 아무리 거시기로 나팔을 불어도 세월은 간다라는 명언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리 거시기로 밤송이를 까더라도 지구는 돈다라는 금언도 존재하고 있었다. 졸병들에게는 명심보감보다 몇 배나 더 정신적 위안을 가져다 주는 경전이었다.

내무반장도 그 진리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참모총장도 그 진리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거시기로 나팔을 부는 사이 고참을 제대를 하고 거시기로 밤송이를 까는 사이 나도 병장으로 진급되어 있었다. 이제는 내게도 바둑판을 차지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바둑판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도래하지 않았다. 정병장과 주병장이 바둑판을 끼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바둑판이지 오목판이 아니야."

정병장과 주병장은 바둑판으로 오목을 두는 소치를 일종의 야만적 행위로 간주하고 있었다. 풍류를 모르는 저급한 인간들이나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라는 것이었다. 풍류를 안다면 거문고 줄로 워카근을 매지는 않았을 거란 주장이었다.

"건국 이래로 니놈들처럼 고매한 인품을 처음 보겠다."
나는 오목밖에 두지 못하는 처지였으므로 관전이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수야 한 판 붙을까."
"꽁수야 말조심해라."
정병장과 주병장은 같은 고향의 죽마고우로서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무슨 일을 하건 호흡이 잘 맞는 사이였다. 호방하고 낙천적인 성격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둑을 둘 때만큼은 견원지간이었다. 몇 급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로 막상막하의 실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접전이 시작되면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바둑돌은 한 번 죽으면 아무리 인공호흡을 시켜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모르냐."
"예수님과 바둑돌과 거시기의 공통점이 부활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지."

치열한 설전을 벌이면서도 신중하기 이를데 없는 표정들이었다. 두 병사는 언제나 내기바둑을 두었다. 돈내기도 아니고 술내기도 아니었다. 진사람이 바둑돌을 먹는 내기였다. 열 집 이내에서 모자라는 집수대로 바둑돌을 먹는 내기였다. 상한선이 열 개로 정해져있었다. 열 집 이상 져도 열 개만 먹으면 된다는 규칙이었다.

하루에 한 번만 시행되는 내기였다. 진쪽에서 당장 복수를 하고 싶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루를 기다려야만 도전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자기들끼리 정해놓은 규칙이었다. 그러나 결코 어기는 경우는 없었다.

"먹어라."
"잠깐만 기다리라구."
승패가 결정될 때마다 진풍경이 연출되기 마련이었다.

"사랑스러운 졸병들에게 꽁수의 말로가 어떤가를 어서 보여주라니까."
"먹는다구."
"찍어 먹을 고추장이라도 나오길 기다리냐."
"짜식 어쩌다 한 번 이기더니 되게 보채는구만."

진 쪽에서 바둑돌을 먹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어머니, 천하에서 제일 조잡한 꽁수바둑에 휘말려 조상을 부끄럽게 만든 불초소생을 용서하소서."

언제나 비장한 표정으로 조상에게 사죄를 올리고 물 한 모금과 함께 바둑돌을 삼키곤 했다. 미련하면서도 처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병장도 주병장도 착한 천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바둑에 진 분풀이로 졸병들을 괴롭혔던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과연 누가 바둑돌을 먹게될까. 두 병사가 바둑을 두기만하면 내무반 전원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나도 차츰 바둑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들의 내기를 관전하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게 바둑에 입문하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바둑은 내 체질에 맞지 않는 도락인 모양이었다. 그 후 몇 십년이 흘렀건만 실력은 거의 향상되지 않았다. 하수를 만나건 고수를 만나건 이기는 경우보다 지는 경우가 한결 더 많았다. 나는 바둑에 질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뇌까리면서 스스로를 위안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둑돌을 먹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지."

<글:이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