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공(魔功)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아주 오래 전 것으로 보이는 디스켓 하나가 굴러 나왔습니다.
열어보니 전에 전에 썼던 글들.
다시 쳐다보기조차 부끄러운 글들.

도무지 부끄럽기만 해 누가 볼세라 얼른 버릴까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굿모닝오로의 독자님들과 저의 개인적인 수줍음을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싶어 눈 딱 감고 식탁 위에 올려보기로 하였습니다.

글 말미를 보니 이렇게 적혀 있군요.

- 1996년 가을

햇수로 8년 전 … 한창 꿈을 꾸고 있던 월간지 기자 초년병 시절의 얘기로군요
풋글의 제목은 마공(魔功)입니다.




1. 내가 손을 닦는 이유

손을 정성껏 닦았다. 두 번의 비누칠을 하는 동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향해 한마디 해주는 일도 거르지 않았다.
‘이길 수 있어. 겨우 석 집일뿐이야’
벽걸이 휴지 두 장을 뽑아 손을 닦고 화장실을 나서며, 다시 한 번 거울을 되돌아보았다.

‘고작 석 집이야. 난 마공이잖아?’
대국이 있는 날이면 으레 치르는 일종의 의식과 같은 행위였다.
다만 형식은 꽤 번거롭고 까다롭기까지 하다. 반드시 100여 수가 두어지기 전에 해야 하고 그것은 점심시간 직후, 즉 오후 2시경에 치러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나는 초시계를 눌러놓고 화장실로 와 손을 닦으며, 내 자신에게 암시를 주는 이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
일종의 징크스로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적어도 ‘한때는’ 이 방법이 꽤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근년 들어서는 이것도 별 수 없는지, 지는 날이 많아졌다. 처음 몇 번은 의식의 조건이 충분히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치부해 버리기도 했지만, 그도 결국 며칠 못 가 내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이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이 비록 나를 속이는 일일지라도.
나는 그저 위로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2. 대덕

전화가 걸려온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전화벨 소리는 꽤 오래도록 울렸을 것이다. 아내가 오전에 외출을 했기 때문에 집안에는 나밖에 없었고, 나는 지난밤 늦도록 상당량의 위스키를 마신 터라 내내 잠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다. 술 한 잔 하지.”
고교 동창인 그의 별명은 대덕이었다.
대덕이라면 ‘큰 덕(大德)’이라도 쌓은 인물로 오인될 소지가 있지만 실은 얼굴이 넙적하게 눌린 덕에 학창시절 윤리선생에게 얻은 별명이었다.

즉, 얼굴이 빈대떡같이 넙적하게 생겼다 하여 ‘대떡’이라 했고 이것이 차츰 음운변화를 일으켜 ‘대덕’으로 굳어진 것이었다.
천박한 외모만큼이나 대덕은 인품 또한 얄팍한 편이었다. 특히 자신의 소지품에 대한 자의식이 강해 타인이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지독히 혐오했다.

한 급우가 영어사전을 빌려갔다가(어쩌다가 대덕에게 사전을 빌릴 생각을 했을까?) 멋모르고 밑줄을 그었던 일이 있었다.
나는 마치 세상이 종말이라도 고한 듯 참담해 했던 대덕의 얼굴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결국 급우는 새 사전을 사다가 대덕에게 주어야 했는데, 그것도 대덕의 원래 사전과 같은 출판사에서 발간한 13쇄판을 구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대덕은 친구가 없었다. 유일한 친구라면 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가 나를 친구로 생각해준 만큼 나도 그러했는지를 묻는다면 사실 답하기가 곤란하다. 나는 고교 때부터 이미 기원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대덕은 일주일에 두어 번씩은 꼭 기원으로 찾아와 친구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노력했다.
나로서도 굳이 그의 방문을 막을 이유는 없었고 또 나 역시 친구라 할 만한 놈들도 그다지 없었기에 대덕의 접근이 꼭 싫지만은 않았다.

대덕은 기원에서 내가 바둑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당구를 치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그리곤 둑에 나가 밤하늘을 보며 캔맥주를 나누어 마셨다. 그러고 보면 꽤 오랜 전의 일들이었다.



3. 패러다임

“나 곧 잘릴 거 같다. 정말 좆같지.”
대덕은 소주가 몇 순배 돌자 대뜸 회사이야기를 꺼냈다.
대덕은 대기업 건설회사의 대리였다.

“며칠 전 우리 부서 차장이 속초로 발령 났어. 예전 같으면 사직서를 썼겠지. 당연하지 않아? 이건 누가 봐도 그만 두라는 소리거든. 진짜 누가 봐도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요즘엔 다들 묵묵히 짐을 싸지. 그리고 끽소리 안하고 발령지로 간단 말이야. 짤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란 거지. 차장도 그렇게 갔어. 마누라도 자식도 다 여기 있는데, 나이 오십 넘어서 혼자 타향살이 마다않고 떨어져 간 거야. 참 좆같지 않냐? 넌 좀 어떠냐, 그래도 넌 행복한 거야 임마. 좋아하는 바둑 두고 돈 벌고. 이거야 완전히 신선놀음이군. 게다가 프로기사란 게 정년도 없잖냐?”

대덕은 소주 한잔을 목젖이 울리도록 맛있게 넘기고 나서 술잔을 내게 돌렸다. 딴은 그렇게 보일 만도 했다. 프로기사란 직업은 정년이 없다. 몸만 말을 들어준다면 100살을 먹어 대국장에 나와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프로세계의 냉엄함을 너 같은 샐러리맨이 알까?

내가 신선놀음이라구? 명퇴도 정년도 없다구? 웃기지마라.
넌 한 달 동안 뭐 하는데? 아침에 출근해 신문이나 읽다가 거래처 핑계대고 사우나가고, 이발소 가서 안마나 받다가 맘 내키면 안마사 껴안고 뒹굴다 퇴근하지. 그래도 한 달 지나면 따끈따끈한 월급이 나오는 샐러리맨 아니냐. 넌 몰라. 프로가 뭔지!

내가 쓰게 웃으며 소주잔을 받자 대덕도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너스레를 쳤다.

“그래, 너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겠지. 프로기사라고는 하지만 뭐 솔직히 성적이 신통한 것도 아니고. 너도 예전에 아마추어시절에는 내기바둑계에서 꽤 날렸지. 네 별명이 마공 아니었냐. 책에선 듣도 보도 못한 기괴한 수법들을 하도 잘 구사해서 붙은 별명이었지. 꽤 으스스했어. 네가 장발머리를 드리우고 기원에 나타나 재야의 고수입네 하는 놈들을 싸그리 해치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가슴마저 다 후련했다. 그땐 네 호주머니도 꽤 쏠쏠했을 걸 아마”

놈의 말은 옳았다. 뼈를 깎는 고된 공부 끝에 얻은 프로면장. 당시는 입단만 하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정했다. 약육강식의 밀림 속에 약자가 설 곳은 있을 수 없었다. ‘마공’ 역시 그랬다.

나의 마공이란 것도 결국 아마추어들한테나 공포의 수법으로 통하는 것이지, 그게 어디 프로의 세계에서도 통할 법한 일인가.
자칫 잘못 쓰다가는 내 쪽이 오히려 크게 당하기가 십상이었다.
내가 아는 마공 따위, 그들은 이미 뼈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추어 바둑은 수읽기지. 그게 다란 말이야. 바로 읽는 힘이야, 힘. 누가 더 정확하게 깊이 앞의 수를 내다볼 수 있느냐 하는 거지. 그게 전부라구. 그런데 프로는 그게 다가 아니야”

내 말을 듣던 대덕은 주인을 큰 소리로 불러 소주 한 병을 추가시키곤 다시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프로세계의 승부는 바둑관의 승부지. 즉, 바둑에 대한 철학의 겨룸이야. 너와 나 사이의 바둑패러다임의 승부. 수읽기 따윈 저급의 잣대라구.”

“어려운 이야기네. 그럼 네가 성적이 신통찮은 것도 그 바둑패러다임인지 뭔지 하는 게 남들보다 모자라서 그렇다는 거냐?”
“그런 셈이지. 바둑을 관망할 수 있는 눈. 그게 어렵지. 바둑이 뭘까? 서봉수 9단같은 이는 나무판에 돌멩이를 두드리는 일이라고 단칼에 무 자르듯 정의를 내려버리기도 했지만”
“진짜 멋진 이야기군. 서봉수를 위해 건배”


4. 피아니스트의 연인

대덕과 헤어진 나는 휘적휘적 충무로를 걷고 있었다.
지하철 막차를 아슬아슬하게 놓친 터라 택시를 잡아탈 생각이었으나 다시 생각을 바꿔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충무로 역 근처, 늦은 밤이면 간혹 들르던 술집으로 들어가 맥주와 파스타치오 한 접시를 주문했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이 협연한 바이바이 블랙버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별 생각 없이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동안 차가운 맥주가 나왔다.

맥주를 마시니 술이 다시 깨는 것 같았다. 바텐더에게 새로운 맥주를 주문하고는 그제서야 천천히 주변을 돌아다보았다.
손님은 나 이외에 다섯이 전부였다. 대부분 일행으로, 테이블에 앉아 왁왁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늘은 이 정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설 궁리를 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혼자시면 같이 한 잔 하시죠”

어느 틈에 옆에 사람이 와 있었지? 30대 초반 정도나 되었을까.
여자는 나이답지 않게 짙은 녹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다. 검은색 재킷에 역시 같은 바지차림. 다행히 이런 술집에서 밤늦도록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여자가 으레 풍기기 마련인 특유의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맥주를 그녀의 잔에 채워 주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누군가와 이야기가 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옆자리의 ‘아무나’이면 충분할 것이다. 오늘은 내가 그 ‘아무나’일 것이고.
물론 나는 왜 이 늦은 시간에 여자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다.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오늘은 술이 좀 마시고 싶었어요”
“저도 그런 날이 많습니다. 아니 사실 오히려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날이 월등히 적다고나 할까요”

농담이 아니었는데도 그녀는 살짝 웃었다. 조명의 밝은 부분에 그녀 얼굴이 드러났다. 화장이 짙은 편은 아니었지만 꽤 세련된 외모였다. 속눈썹이 두드러진 눈은 가는 안경테와 잘 어울려 보였고, 코도 오똑했다. 말씨에서는 약간의 대구사투리가 묻어 났다.

맥주가 몇 병 비워지자 비로소 그녀는 최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은 클래식 피아니스트였다. 나도 음악잡지나 신문기사를 통해 이름은 낯설지 않은 이였다.

“3년 됐어요. 결혼한 지는. 꽤 사랑했고 아이도 하나 있지요. 내게는 참 다정한 남자였는데.”
“그 말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
나는 너무 앞질러 갔다는 느낌에 그녀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다행히 기분이 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요.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다정한 남자가 되어 버렸어요. 미국 유학시절에 만났던 첼리스트. 난 몰랐지 뭐에요.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그이는 그 여자를 죽 만나 왔던 거였어요. 한 달에 한두 차례 만나 데이트하고 함께 자고. 워낙 해외로 지방으로 연주여행이 잦은 사람이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나는 다시 그녀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내가 알아낸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내게 직접 말했지요. 결혼 7주년 기념일을 이틀 남겨 두고. 지독한 이야기죠?”
“그래서 이렇게 늦은 밤까지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겁니까?”
그래, 이 말은 끝까지 묻지 않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이제와선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이를테면 ‘외길수순’과 같은 것이다.


5. 외길수순

그녀와 나는 새벽 2시가 넘은 늦은 시각에 바를 나섰다.
그녀는 왕십리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가 함께 들어가 차라도 한잔 마실 것을 권했다.

“아이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군요. 그냥 가겠습니다.”
“아이는 며칠 동안 남편 집에 가 있어요. 걱정 마시고 잠깐 들렀다 가세요.”
컴컴한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 303호로 들어섰다.

“발을 조심하세요. 턱이 높으니까”
그녀가 불을 켜자 집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스튜디오타입의 10 여 평 남짓 되는 원룸으로, 남편과 헤어진 후 혼자 지내기 위해 이사를 온 듯 보였다.
그녀는 방안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걸어가 오디오를 켰다. 그리고 은빛 시디 한 장을 꺼내 플레이어에 걸었다.

“소파에 앉아 잠시 쉬고 계세요.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어요.”
그녀가 옷가지를 들고 욕실로 들어간 뒤 나는 그제서야 꼼꼼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느낌의 방이었다. 가구에서부터 탁자 위에 놓인 잡지 한권에 이르기까지 보기 좋게 정리가 돼 있어 주인의 깔끔한 성품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디오에서는 말러의 심포니가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TV위에는 그녀와 아이가 함께 찍은 사진이 조그만 액자에 넣어져 있었다. 엄마의 눈을 꼭 닮은 여자아이. 아이가 이 시간 나와 마주친다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 줘야 할까?

“영선이예요. 아이 이름은”
그녀가 커피 잔을 쟁반 위에 받쳐 들고 서 있었다. 그녀와 나는 방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신 뒤에는 그녀가 내온 맥주를 마셨고, 다시 브랜디를 마셨다.
음악이 말러에서 비제로, 그리고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로 넘어갈 즈음 우리는 충분히 마셨고 또 취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손길을 따라 침대 위로 가 그녀와 섹스를 했다.

그녀는 30십대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을 만큼 여전히 탄탄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한차례 격정의 시간이 흘러간 후 나는 그녀의 따뜻한 유방 사이에 얼굴을 묻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레몬 빛 가로등이 아무도 다니지 않는 거리를 오래오래 비추고 있었다.


6. 마공Ⅰ

손을 닦은 나는 다시 대국장으로 돌아왔다. 다섯 집 가량의 차이.
반집을 다투는 프로의 세계에서 다섯 집은 창세기의 혼돈 가운데 들려오는 조물주의 목소리와 같은 위엄이 있다. 다만 아직은 중반이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오늘 나와 마주친 상대는 20대 초반의 푸릇한 신예이다. 올해 신예기사 중 최고의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친구로, 나를 만나기 전 이미 15연승을 달리고 있다.

지독한 놈…. 이미 세 군데 기전 본선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으며 그중 하나는 도전권마저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웬만한 중견기사들이 1년에 한번 본선에 오르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활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치들은 대진표에서 중견기사들을 만나면 빙그레 웃는다. 소위 ‘꽃조를 만났다’며 좋아라 한다. 정원의 꽃모가지를 따듯 가볍게 이길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이놈, 대진표에서 내 이름을 보고 씨익 웃었을 것이다.

형세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우세를 확인한 놈이 자물쇠를 잠그듯 단단히 수비 위주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성문 아래 진을 치고 아무리 나팔을 울려대도 놈은 좀처럼 성루 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녀석이 다소 엷은 귀의 말에 가일수를 했다. 완착이었다. 조금만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귀의 말은 양패로 살아 있는 모양이었던 것이다.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지금쯤은 녀석도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챘을 것이다. 다만 승부사는 마음의 움직임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 녀석도 나이는 어리지만 충분한 훈련을 거친, 당당한 승부사.

비록 늦은 감은 없지 않으나 분명 칼자루는 내게 쥐어졌다. 직감적으로 지금이 승부처라는 느낌이 왔다. 여기에서 상대의 치명적인 급소를 베지 못한다면 쓰러지는 쪽은 내 쪽일 것이다.
문득 상대의 짙은 피 내음이 맡고 싶어졌다. 재깍재깍 … 초시계의 초침이 날카로운 칼날을 드러내며 시각을 새기고 있다.

나는 녀석의 튼튼한 수비망을 뚫을 수 있는 실낱같은 틈을 찾는 데 성공했다. 성공확률은 10%. 이 정도면 후한 점수다. 물론 평범한 방법으론 통하지 않는다. 나의 마공이 빛을 발할 순간이 왔다.
마공은 어둠의 검법이다. 백도가 아닌 흑도이다. 녀석이 명확하게 마공의 약점을 찔러 온다면 나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어차피 이 바둑은 내가 지는 쪽으로만 흘러온 것이다. 이대로 계가로 가 지나 나의 마공이 무너져 패하나 결과는 마찬가지. 누구라도 해볼 만한 도박이 아닌가.

내가 강력하게 붙여가자 녀석의 한쪽 눈썹이 찡긋 치켜 올라간다. 녀석으로선 처음 보는 수일 것이다. 이제 녀석의 수읽기 능력이 나의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길 바랄 뿐이다. 녀석의 장고가 계속되고 있다. 드디어 마귀 같은 초읽기의 공포가 시작됐다.

하나 … 두울 … 세엣 …

초를 읽는 계시원의 목소리가 저승사자의 그것처럼 음산하게 대국장을 감싼다. 녀석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 따악!

녀석이 드디어 두었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녀석은 나의 한계를 읽어냈는가?

나는 조용히 돌을 들어 응수했다. 녀석의 난감해 하는 표정이 느껴진다. 녀석은 나의 속임수에 완벽하게 걸려든 것이다. 개미귀신의 구멍에 빠져든 개미처럼 너는 처절히 허우적대다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담뱃재를 터는 나의 손이 나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상대를 베지는 못했다. 녀석은 나의 마공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데 성공했다. 요즘 녀석이 보여주고 있는 활약상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던 것이다. 이래서는 아직 오리무중의 승부다.
이제 바둑은 잔 끝내기 단계에 들어섰다. 마라톤으로 따지면 49. 19 Km를 다 뛰고 0.5Km 정도를 남겨놓은 셈이랄까. 드디어 스타디움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놈과의 거리는 불과 2, 3m 사이다. 가슴에 테이프가 닿는 순간까지 안심할 수 없다.

마지막 공배를 메우고 계가에 들어갔다. 서로가 초읽기에 몰려 정확한 형세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반집승부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어느 쪽인지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배를 메우는 두 사람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역시 반집이었다. 나는 녹차팩이 담긴 종이컵을 들었다. 그리고 식을 대로 식은 녹차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겼다. 담배를 많이 피워서인지 목이 따끔거렸다. 녀석이 인사를 꾸벅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휭하니 대국장을 나가버렸다. 그제서야 주변에 꽤 많은 기사들이 둘러선 채 이 바둑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 축하하네. 본선에 올랐군?”

K5단이 내 어깨를 툭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씁쓸히 웃음을 지었다.



7. 마공Ⅱ

다 마신 맥주캔을 하나씩 식탁 위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모두 다섯 개. 이만하면 충분하다.
나는 마지막 맥주캔 밑에 메모지 한 장을 끼워놓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꺼내 걸친 뒤 거실로 나와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선글라스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다 되었다. 나쁘지 않다. 저 현관문만 열고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소파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기로 했다. 2년 전 중고가구점에서 산 소파이다. 아내는 이 소파의 보랏빛 커버를 싫어했었다. 결국 아내는 3개월 전 소파의 커버를 크림색으로 바꾸었다.

되도록 나는 꼼꼼히 시간을 들여 담배 두 개피를 피웠다. 천천히 손끝까지 타들어오는 담배의 불꽃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다 피운 나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현관의 문을 열고 눈부신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 거리를 향해 나아갔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을, 오후의 나른함과 같은 근사한 세상이 거기 있으리라 기대하며. 또한 믿으며.



-끝-


<1996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