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형식의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조훈현과의 대화」.

월간『바둑』 편집장과 조선일보 기왕전 관전필자를 지내며 20여 년간 바둑글을 써 온 이광구 씨가 96년 12월부터 98년 3월까지 1년 4개월 동안 바둑의 거장과 나눈 일종의 ‘대담집’이다.
말이 대담집이지, 반 이상은 기보해설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어찌 보면 바둑해설집으로 볼 수도 있다. 한마디로 정체성이 모호한(?) 책이다.

대담집의 형식을 갖춘 책은 상당히 많이 나와있다. 하지만 명 지휘자와의 대담집이라고 해서 악보가 실리는 일은 별로 본 일이 없다. 유명 연극인과의 그것이라 해서 희곡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조훈현이라는 바둑 거장과의 대화에서 기보가 빠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결국 조훈현이라는 사람은 ‘기보’라는 코드를 배제하고선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여하튼 바둑계 최고의 거장과 최고의 필자의 만남이라는 사실은 독자들을 흥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과연 우 칭위엔(吳淸源) 이후 최고의 기재라는 조훈현이라는 사람은 어떤 생각과 사상의 틀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반상에서는 순식간에 수십 여 수를 주루룩 읽어대는 이 수읽기의 대가는 과연 세상사를 어떻게 읽고 있는 것일까?

“말 그대로 그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의 바둑해설을 듣다보면 머리 속의 안개가 걷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나는 또한 조훈현이라는 사람은 과연 바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바둑관과 승부철학은? 더 나아가 과연 바둑의 천재는 세상사에 대해서도 천재일까? 하는 우문같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저자는 향긋한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조훈현이라는 거장을 상대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랜 기자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노련한 솜씨로 매회 흥미를 잡아끄는 주제를 선정, 결코 무겁지 않게 이끌어 간다. 모두 39편의 에피소드 속에는 거장의 삶과 바둑, 유머와 철학이 적절히 녹아들었다. 전반부는 대화, 후반부에는 바둑해설이라는 구성으로 기본 가닥을 잡았다.

그 유명한 조훈현 九단의 바둑해설을 바로 코앞에서 구경하는 듯한 입체감이야말로 「조훈현과의 대화」를 읽는 또 다른 맛이다. ‘대화’라는 메인요리에 뒤지지 않는 기막힌 파스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훈현과의 대화」를 읽다보면 몇 가지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우선 지면부족으로 인한 데이터의 손실. 조훈현이라는 한 거장의 속내를 충분히 엿보기엔 데이터가 상당부분 상실되어 있다. 원래 「주간바둑361」에 연재되었던 총 71회의 칼럼 중 39회만을 추리는 바람에 무려 32회분이 잘려나간 탓이었다.

또한 대화의 즐거움과 바둑해설의 재미, 여기에 기력향상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좇으려는 저자의 의도는 다소 지나쳐 보인다. 한 권 분량의 단행본으로서는 아무래도 엔진의 힘이 달린다. 한 세대 전의 중형차로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듯한 숨가쁨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대상에 대한 저자의 일관된 우호적 접근방식도 지적할 만하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어지는 소프트한 대화에 날카로운 비평의 칼날은 철저히 소외되어 버렸다. 거장과의 처절한 난상 토론을 거쳐 조훈현이라는 개인의 좀더 깊은 내면을 뜯어보고 싶었던 독자라면 아쉬움을 감출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양형모 기자/ryuhon@baduk.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