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속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다. 중국 19세 소년기사 왕싱하오(王星昊)가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2004년 2월 상하이 출생. 지난 10월 말 살벌한 중국 패권 다툼을 헤치고 종합기전 첫 우승을 따냈다. 제18기 창기배 바둑선수권대회다. 우승 상금이 우리 돈으로 8000만원이 넘는, 가장 권위있는 중국 국내기전에 속한다. 세계 메이저 대회서 두 차례나 정상에 올랐던 미위팅을 결승서 2대0으로 완파했다.

▲ 중국 19세 청년 왕싱하오. 최근 연속 우승 속에 랭킹 8위에 진입하는 등 기세가 드높다.
결승까지 이르는 동안 과정도 눈이 부실 정도다. 판팅위 리웨이칭 한이저우를 넘어선 뒤 준결승 3번기에서 만난 ‘전직 1위’ 커제를 2대0으로 걷어찼다. 7연승 파죽지세로 우승까지 치달은 것이다. 창기배 직전 열린 제5회 녜웨이핑 대회서도 그는 문민종 사카이 쿵제 등을 제치고 우승했다. 이벤트성 대회라고 해도 2주 새 국제대회 2개를 삼킨 기사는 흔치 않다.
왕싱하오는 20세 이하 주니어 세계기전인 글로비스배를 2021년과 2022년 연거푸 품에 안았다. 신진서도 한 차례 우승에 그치는 등 다른 어떤 강자도 2연패는 이루지 못했다. 또 2022년 말 신인왕전, 2023년 3월 신수쟁패전서도 우승함으로써 최근 획득한 창기배, 녜웨이핑배를 합쳐 국내외 타이틀 수가 6개에 이른다. 2016년 입단 후 만 7년만의 실적이다. 그는 입단 전 제32회 세계청소년바둑선수권대회 주니어부를 제패하면서 차세대 주인공 자리를 일찍이 예약했었다.

▲ 한국의 차세대 선봉장으로 꼽히는 한우진. 역대 세계 최연소 9단 기록도 수립했다.
올해 들어서면서 국제 시니어 무대에서도 당당히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5월 한국서 열린 제28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서 그는 한국 톱스타 김명훈과 박정환을 연거푸 제치고 8강에 진출했다. 오는 12월 변상일과 4강을 다툴 예정이다. LG배 직전 열렸던 제1회 란커배 때는 16강전서 변상일을 누르고 8강을 밟았다. 무시무시한 진격은 승단과 랭킹으로 이어졌다. 지난 9월 9단에 오른데 이어 10월 8위, 11월엔 일약 랭킹 7위로 발돋움했다. 군인에 비유하자면 별을 단 것이다. 모든 지표가 왕싱하오의 미래를 밝게 조명하고 있다.
왕싱하오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탄 것은 2022년 벽두 열렸던 제7회 TWT배 때였다. 인터넷 비공식전인 이 대회 결승 3번기에서 이미 세계 공인 1인자로 자리매김한 신진서를 2대1로 꺾고 우승했다. 아무리 비공식전이라지만 세계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기 족한 대형 사건이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져있는 신진서와 왕싱하오 간 스코어는 이게 전부다.
하지만 둘은 인터넷 공간에서 이미 상당히 많은 대국을 가졌다. 몇 년 전까지는 ‘판맛’을 거의 못 보던 왕싱하오가 최근 크게 성장, 요즘엔 약 1대2 정도의 비율로 승점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같은 발전 속도라면 대등한 위치로 올라설 날도 그리 머지않아 보인다.
신진서가 왕싱하오의 존재를 의식한 것은 이보다 훨씬 전이었다. 2020년 제 24회 LG배 우승 직후 인터뷰 때 “국내외 후배들 중에 가장 주목하는 기사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온 이름이 왕싱하오였다. 신진서가 만 20세, 왕싱하오는 고작 16세 소년일 때였다. 세계적 고수들은 인터넷을 통해 서로 탐지하고 시험하며 평가한다. 과연 왕싱하오는 비온 뒤 대나무 순처럼 빠르게 성장해갔다.
최근 신진서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왕싱하오가 생각보다 빨리 크는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빙긋 웃었다.
-왕싱하오는 뭐가 강점일까.
“첫째는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 둘째는 엄청난 공부량이죠. 하루 24시간 바둑 공부만 하는 것 같아요.”
-옆에 있지도 않은데 공부량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지?“
“인터넷으로 대국하는 것 보면 한눈에 다 보여요.”

▲ ‘지존’ 신진서에게 국내 연하기사 상대 첫 패배의 아픔을 안겨준 18세 박지현.
왕싱하오는 경계 대상임이 틀림없다. 기재(棋才)와 침착함, 그리고 노력 세 가지 외에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 편에도 인재들이 여럿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6월 열렸던 제10회 글로비스배가 가장 통쾌했다. 8회와 9회를 연속 우승한 왕싱하오는 올해도 문민종을 탈락시키는 등 결승에 가볍게 올라 3연패(連覇)가 유력해 보였다. 하지만 한우진(18)이 있었다. 2005년생으로 왕싱하오보다 한 살 적은 한우진은 왕싱하오와 결승거 백으로 2집 반을 이겼다.
중국 틴에이저 그룹 선두 주자가 왕싱하오라면 한국의 최고 대항마는 한우진이라는 데 국내외 공감대가 형성돼가고 있다. 목진석 대표팀 감독도 같은 의견을 피력한 바 있고, 신진서도 한우진의 꾸준함을 높이 평가한다. 단 1년 사이 4단에서 9단으로 뛴 것이 그의 발전상을 말해준다. 요즘 승단은 연공서열에 의존하던 과거와 달리 실적으로 이루어진다.
한우진이 해낸 프로 데뷔 4년 5개월만의 입신(入神) 등극은 한국 중국을 통틀어 최단 기록이다. 박영훈 박정환 신진서 신민준의 기록을 모두 앞질렀다. 지난 연말 제3회 이붕배 이후 올해 밀레니엄 천원전, 글로비스배 우승과 백암배 준우승 등이 한우진을 9단으로 밀어올린 전과(戰果)들이다. 글로비스배에선 첫판 패배 후 중국기사 3명을 빗자루로 쓸어내듯 연파하며 우승했다. 준결서 투샤오위(20), 결승서 왕싱하오(19)를 잠재웠다.

▲ 왕싱하오에 이어 중국 신예 넘버 2로 떠오른 투샤오위. 왕싱하오보다 먼저 중국 신인왕을 지냈다.
최근엔 명인전서 전기 우승자 신민준을 탈락시키면서 자신은 살아남았다. 탱크를 앞세우고 국내 메이저 무대로 본격 입성(入城)하는 모양새다. 랭킹 19위가 4위를 눕힌 활극 한마당이었다. 올해 우승 2회, 준우승 1회라는 실적이 앞서 살펴본 왕싱하오의 그것과 상당히 닮았다.
한우진과 동갑인 박지현(18)도 지켜봐야 할 기대주다. 지난 9월 신진서 왕국의 장독대에 돌맹이를 던져넣어 장독 하나를 깬 소년이다. 지금까지 숱한 10대들이 같은 시도를 했지만 장독은커녕 간장 종지 하나 맞추지 못했었다. 신진서가 정상에 선 이후 자신보다 후배 기사에게 기록한 첫 패점이었다. 2000년생 동갑나기 중엔 몇 명 있었지만 전원 중국 기사들이었고 한국 기사로는 박지현이 처음이었다.
한국은 머릿수에선 중국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 인구 대국인 중국은 10대 강자 수 십 명이 신진서 왕국을 둘러싸고 있다. 한국도 한우진, 박지현과 함께 김은지(16), 권효진(19), 원제훈(18) 등 유망 신인들이 있지만 중과부적이다. 바둑 용어로는 두터움, 일상용어론 저변, 속어로 말하면 ‘쪽수’에서 크게 밀린다. 우리는 질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일단 선봉장 왕싱하오부터 발을 묶어야 한다.

▲ 16세 나이에 한국 여자랭킹 2위로 도약하는 등 최정의 대를 이어 세계 여자 최고수를 향해 진군 중인 김은지 7단. (사진=한국기원 제공)
한국은 조훈현 이래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 신진서에 이르기까지 1인자들이 거의 단기(單騎) 필마로 중국 인해전술에 맞서왔다. 영웅 한 명이 중국의 떼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는 모양새였다. 이제 왕싱하오가 앞장선 중국바둑의 굴기(屈起) 발호(跋扈)를 누군가가 제지해야 한다. 한국 10대 유망주들 중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