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의 기세가 무섭다. 국내외의 숱한 기사들이 어느 새 “세계 1인자는 이세돌”이라고 망설임 없이 입을 모을 정도가 됐다. 과연 이세돌 천하는 시작된 것일까. 올해 고작 24세에 불과한 이 청년은 앞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현재 바둑의 세계랭킹을 공식적으로 집계하는 기관은 없다. 한국 중국 일본이 자국 방식에 의해 자국 기사들만의 순위를 매겨오고 있을 뿐이다. 이세돌은 한국기원이 매달 발표하는 국내 랭킹에서 2개월 째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오랜 세월 정상을 달려온 이창호를 지난 달 제치더니 6월 말 발표된 새 랭킹에선 더 격차를 벌이며 최고수의 위치를 확인했다.

추격자들과의 점수 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이세돌의 최근 활약이 그만큼 눈부시기 때문이다. 그는 6월 14일 끝난 제19회 아시아TV선수권 대회를 제패했다. 올해 초 2연패(連覇)를 차지한 도요타덴소배를 포함해 현역 국제 무대 2관왕이다. 국내 무대에선 지난 2월 맥심배 결승에서 박정상을 제압, 3연패에 성공하면서 타이틀을 지켜냈다.

이세돌은 이 밖에도 GS칼텍스배 물가정보배 바둑왕을 보유 중이다. 이 모든 것을 망라하면 그는 현역 6관왕에 해당한다. 국내 타이틀 분포는 이창호(왕위-전자랜드배)만이 2관왕으로 군림하고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박영훈(기성), 조한승(천원), 안조영(십단) 등이 1개씩 분점 중이다. 국제대회인 후지쓰배와 함께 신인 타이틀 1개를 보유한 박정상 역시 이세돌의 ‘감투 수’와는 비교가 안 된다. 국내외 타이틀을 통틀어 6개를 지니고 있는 기사는 지구상에 이세돌 뿐이다.

올 들어 이세돌은 더욱 강해진 느낌이다. 패배하는 법을 잊은 듯 두었다 하면 이긴다. 지난 5월 13일 바둑리그서 목진석을 꺾으면서 시작된 그의 연승 행진은 6월 17일 윤성현과의 바둑리그 대국 승리로 20연승까지 이어지고 있다(6월 말 현재). 이런 추세라면 그 자신이 지난 2000년 수립했던 개인 최다 연승기록(32연승)이나, 이창호에 의해 1990년 작성됐던 역대 최다 연승기록(41연승) 갱신도 바라볼 만 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다.

이세돌이 올해 들어 갑자기 펄펄 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1995년 프로 입단 이후 그는 언제나 최고의 천재란 호칭과 함께 주목의 대상이 돼 왔다. 프로생활 불과 13년 동안 그는 국내외 무대에서 무려 21개의 우승을 기록했다. 단위 시간 수에 대비하면 세계 어떤 기사도 따라오기 힘든 전적표다. 21회 우승 내역을 분석해 보면 국제대회가 8개, 국내 종합타이틀이 7개, 국내 제한기전은 6개다. 준우승은 단 7회에 그쳐 결승 진출 시 승률이 물경 75%에 이른다는 대목도 주목할 만 하다.

이세돌의 기풍은 선 실리, 후 타개로 분류된다. 한 마디로 다른 어떤 기사보다도 난타전을 즐기는 형이다. 그의 바둑 치고 밋밋하게 경계선이나 긋다가 끝나는 판은 하나도 없다. 약간 과장하자면 천둥 번개가 몰아치고 귀신이 들락날락하는 스릴 만점의 바둑을 둔다. 그래서 아마추어 팬들은 “이세돌의 기보를 보다가 다른 프로들의 대국을 관전하면 재미가 없다”고 까지 말한다.

가장 최근 우승한 TV아시아선수권대회 때도 그랬다. 이세돌은 만나는 상대마다 처음부터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여 통쾌한 연승 행진을 펼친 끝에 우승했다. 그보다 열흘쯤 앞서 벌어졌던 제12회 LG배 세계기왕전 때도 마찬가지. 이세돌 특유의 화려하고 대담한 공격으로 연속 KO승을 거두며 준준결승에 안착했다. 32강전과 16강전 모두 가장 먼저 판을 끝낸 기사는 이세돌이었다. 속도와 대국 내용 모두 마치 장판교 싸움에서 장팔사모 꼬나 들고 조조 군을 휘몰아치는 장비를 연상케 했다.

동료 기사들은 이세돌의 바둑이 기존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에 높은 점수를 준다. 복싱 경기에 비유하자면 상대방으로선 펀치가 어떤 각도에서 나올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뜻도 된다. 발상이 창의적인데다 수읽기가 깊으니 모든 판에서 자신감이 넘친다. 그의 착점과 반면 운영은 확신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런 이세돌도 약간 경계하는 상대가 2명이 있다. 하나는 이창호, 또 하나는 중국의 셰허(謝赫)다.

이세돌은 2006년 이후 이창호에게 3연승 중이다. 최근의 객관적 활약도에서도 이창호를 분명 따돌렸다. 하지만 이세돌은 “아직 이창호 사범님을 넘어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통산 전적에서 18승 23패로 뒤져있기 때문에? 또는 겸손함을 보이려고? 둘 모두 아닌 것 같다. 2000년대 초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욱일승천 하던 무렵 이세돌은 “이제 바둑계는 나와 이창호 사범님 둘의 무대”라며 기고만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이세돌은 중요한 고비 때마다 이창호에 의해 자주 제동이 걸렸다. 하늘의 높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이창호에 대한 이 같은 외경(畏敬)을 완벽히 극복해내는 날 이세돌은 비로소 진정한 세계 최고수로 등극할 수 있을지 모른다.

셰허는 이세돌보다 한 살 아래의 중국 청년. 장래를 촉망 받는 신예군 멤버 중 한 명이지만 똑 부러지는 대첩(大捷)은 아직 없다. 중국 랭킹도 5위에 불과하다. 그런 셰허에게 이세돌은 지난 해 11회 LG배 16강전 때 만나 혼이 났다. 둘은 초반부터 정신 없이 펀치를 휘둘러댔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세돌을 향한 심판의 카운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둘은 그 4개월 뒤 춘란배에서 다시 만났는데 거기서도 난타전 끝에 이세돌이 졌다. “중국 기사들 중 최강자는 셰허인 것 같다. 나는 어디서건 셰허만 피해다니면 된다.” 이세돌은 자신에게 통산 2연패를 안겨준 셰허 얘기가 나오면 농담조로 이렇게 말한다. 물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세돌의 입장에서 경원(敬遠)하는 적수란 몇 명 되지 않고, 셰허가 그 중 하나란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람들이 이세돌에 대해 또 하나 놀라는 것은 그의 끊임없는 의욕과 체력이다. 그는 올해 구이저우(貴州) 팀과 계약, 중국리그에서도 뛰고 있다. 중국리그 대국이 있을 때면 그는 국내 대국을 앞당겨서 소화하고 몇 차례 비행기를 바꿔 타며 중국으로 날아가야 한다. 중국리그 대국을 마치면 다시 서둘러 돌아와 그날 밤, 또 다음 날 아침 대국을 연속으로 갖곤 했다.

지난 5월 13일부터 28일 사이 16일 간 그는 한 중 양국을 오가며 무려 13국을 치렀고 단 1국만 패했다. 체력과 바둑 실력 모두 초인적 파워란 말 외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이런 강행군은 오히려 이세돌의 안정된 기사 생활에 장기적으로 독이 될 것이란 우려도 많다. 우량아 출신에다 운동으로 몸을 단련했던 이창호 조차 체력 감소로 성적이 떨어지는 세상이다. 이세돌은 시간에 쫓겨 이렇다 할 건강 단련을 하지 않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세돌은 그러나 여기서 한 술 더 뜨는 중이다. 올 여름부터는 제자 육성에도 나서겠다고 선언해놓은 상태다.

12세에 입단한 이세돌은 17세에 치국(국내 제패)하고 19세에 평천하(세계 우승)를 이루었다. 바둑에 관한 한 뭐든지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마이다스의 손이다. 이 황금 손으로 세계적 수준의 제자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 그의 야심이다. 이세돌은 결혼마저 프로기사들의 평균치보다 훨씬 빠른 23세 때 해치워(?) 아직 돌이 안 된 딸 1명을 두고 있다. 번뜩이는 수읽기 속도에 어울리게 인생살이도 번개처럼 빠른 셈이다.

우리 시대 세계 바둑계가 보유하고 있는 최고의 뉴스 메이커를 꼽으라면 단연 이세돌일 것이다. 각종 승수와 타이틀 등 숫자로 나타나는 바둑 성적은 기본이다. 여기에 톡톡 튀는 말솜씨, 일반적 상식을 깨는 돌출 행동과 이따금 쏟아내는 폭탄발언까지 모든 것이 화제로 떠오른다. 당대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이세돌이 건강을 유지해가면서 더욱 풍성한 뉴스를 쏟아내 주었으면 하는 게 바둑 팬들의 바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