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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완급조절, 그 탁월함을 엿보다
본선1회전에서 만난 양웅의 대결
[LG배 세계기왕전 32강]

LG배 32강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이창호-구리 전은 세간의 예상을 비웃듯이 너무나도 싱겁게 끝이 났다. 초반부터 힘으로 끝장을 보잔 구리 9단의 과속과 때가 무르익길 기다리는 이창호 9단의 인내는 싸움만이 능사가 아니란 말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한다.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는 격언을 종종 듣는다. 듣긴 듣다만 그 격언이 살아 숨쉬기 위해서 어떠한 처방을 내려야할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초일류 고수들도 어려워하는 완급조절을 한갓 풋내 나는 아마추어가 뇌까린다는 것? 그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행태일까? 이창호 9단의 환상적인 완급조절을 감상하며 한 번 정도 엷음과 두터움, 완급조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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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LG배 세계기왕전 32강전 ●구리(古力) 9단(中) ○이창호 9단
장소: 곤지암 리조트
날짜: 2011년 6월 13일
결과: 242수 백불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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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통념의 재해석)


흑1의 걸침에 대해 백2의 마늘모 응수가 색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상대방에게 2립 3전의 모양을 태연히 주는 자체가 이론상 나쁜 선택이라 비난받을 수 있겠지만 현대에 와서 과거의 이론은 늘 재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고 있다. 2립 3전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5로 두 칸 벌린 것을 보라. 통념의 재해석이다.

참고도1 (귀의 실리가 크다)


흑이 2립 3전을 하게 되면 백6의 뛰어듦이 아프다는 얘기다. 흑7로 제압하면 별다른 수가 안 나지만 이어진 8, 9의 젖혀 이음이 기분 나쁘다. 백으로선 귀의 실리를 확실히 하는데다 차후 A로 젖히고 B로 넘어가는 보너스가 남는다. 흑으로선 후수로 지키기 싫은 모양이다.

참고도2 (무미건조)


백2의 한칸 협공이 일반적 감각일 것이다. 그러나 흑3으로 한번 밀어놓고 흑5로 뛰어들면 뭔가 무미건조한 진행이다. 좌변이 확실하지 않은 어설픈 모양이라 귀의 실리와 바꿔치기하긴 싫다.

실전진행1 (무모한 과속)


장면1에 이은 실전진행이다. 흑은 백1의 다가섬을 본체만체 2로 찌르고 8로 단수치는 패를 걸어간다. 백이 굴복해주리란 달콤한 상상이었을까? 아님 백9의 반발을 일부러 불러오고 싶었을까? 구리 9단의 성급한 패걸음은 팽팽했던 국면을 순식간에 망가뜨린 패착으로 전락하고 만다. 좌변 흑을 압박한 백11의 팻감이 훌륭하다.

참고도3 (한 박자 쉬어갔으면)


실전진행1에서 보다시피 흑은 당장 마땅한 팻감이 없다. 눈에 띠는 팻감이 없는 상황인데 패를 걸어 들어간 것 자체가 굉장히 무모한 도전이다. 흑1 정도로 보강했으면 어땠을까? 백의 다음 선택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백2로 끊어간다면 유유히 흑3의 다가섬을 결행한다. 과속할 이유가 전혀 없는 자리였다.

참고도4 (사전공작)


굳이 패를 꼭 걸어가야겠다면 사전공작을 해 놓았어야했다. 1로 붙여 3으로 끊는다든지 A로 들어가 응수를 묻는다든지 다양한 응수타진이 있을 수 있겠다. 초일류 고수인 구리 9단이 이와 같은 실수를 했다는 게 참 재미있다.

참고도5 (굴복은 없다)


행여나 이런 굴복을 상상했다면 이건 흑의 대단한 착각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흑은 자연스레 상변 모양을 삭감하면서 중앙 돌들을 압박할 수 있겠다. 백의 굴복은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장면이다.

실전진행2 (빈털터리)


무모한 과속은 참담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양산해냈다. 뒤늦게 흑1로 붙여 팻감을 만들어보려 했지만 백2의 반발이 적절한 유효타로 이어진다. 결국 이도저도 못하고 흑17의 지푸라기 팻감을 타협안으로 제시한다. 구겨진 체면이 말이 아니다. 백18로 시원하게 빵따냄하면서 흑은 완전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장면2 (때 이른 승부수)


판이 단단히 꼬인 구리 9단으로선 뭔가 승부수를 날려야한다. 흑1, 3의 견제사격 뒤 5로 막아간 것은 불리함을 의식한 승부수다. 백6으로 잡자 7로 힘차게 밀어간다. 흑7은 백A로 넘어가란 주문이다. 백도 후수로 넘어가고 싶진 않다. 백은 B의 치중과 C의 준동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하겠다. 흑의 승부수에 대한 백의 해답은 어떤 것이었을까?

실전진행3 (엷음을 묻다)


백1로 밀어가 응수를 물어본 수가 기민하다. 흑2로 보강할 때 3으로 때려내 다시 한 번 응수를 물어본다. 5부터 9까지의 선택은 좌변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는 이창호 9단의 훌륭한 형세판단에서 기인하고 있다.

참고도6 (썩은 고기를 물다)


흑1로 두면 좌변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좌변을 잡는 것은 썩은 고기를 덥석 물어버리는 격이다. 백2의 밀림에다 백4의 활용까지 당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상변에 새하얀 설원이 펼쳐졌다.

실전진행4 (엷음의 급소)


계속되는 실전진행이다.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구리 9단도 최대한 버틸 수밖에 없다. 흑1로 잡은 다음 흑9로 좌상귀를 움직여 부지런히 수를 낸다. 귀에서 수를 내게 돼선 집균형이 역전됐다. 그러나 한 번의 재역전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백16 한 방에 흑의 엷음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바둑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다.

참고도7 (잡을 수가 없다)


백1의 치중은 굉장히 날카로웠다. 일견 흑2로 씌워서 그만일 것 같지만 5의 끊임이 듣고 있어 응수가 두절된다. 백1은 엷음의 급소였던 것이다.

실전진행5 (두터움, 그리고 완급조절)


마지막 정리과정이다. 수순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급소를 찔린 흑의 얼굴엔 당혹함만이 가득했다. 11과 21의 공배이음은 정말 두기 싫은 자리다. 백28에 29로밖에 둘 수밖에 없는 비통함이 흑의 마지막 쓰라림을 대변하고 지나간다. 엷음과 두터움을 정확히 간파한 완급조절의 승리다.

참고도8 (중앙이 잡힌다)


맘 같아서는 3으로 잡아 끝까지 버티고 싶다. 그러나 백6으로 불쑥 솟아오르는 순간 중앙 흑은 감당할 수가 없다. 눈에 뻔히 보이는 자멸의 길이다.

참고도9 (형세판단)


보너스 형세판단이다. 실전진행5까지 된 그림에서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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