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LG배 세계기왕전이 11월 하순 중국 베이징에서 속개된다. 21일 8강전, 23일엔 준결승전이 각각 펼쳐질 예정이다. 8강 대진은 이창호(한국) 대 천스위안(陳詩淵․대만), 원성진(한국) 대 장웨이지에(江維杰․중국), 허영호(한국) 대 셰허(謝赫․중국), 김지석(한국) 대 추쥔(邱峻․중국)전으로 이어진다.
8강의 전체 구도는 한국 4명, 중국 3명, 대만 1명으로 한국 대 범(汎) 중국세 간 대결인 셈이다. 같은 소속국 선수끼리의 대진을 가급적 피해서 추첨한다는 원칙에 따라 8강전 카드 4장은 모두 한국 대 중국(대만 포함) 전으로 거행된다. 한국기사 4명을 중심으로 이번 대회 8-4강전을 전망해 본다.
◇이창호
이창호(36)가 세계대회서 거둔 우승 회수는 총 21회에 달한다(비공식전 2개 제외). 아직 다른 어떤 기사도 이 기록을 넘지 못했다. 현역 세계2관왕인 이세돌은 15개, ‘바둑황제’ 조훈현은 11개에 머물고 있다. 외국기사 중 최다인 구리(古力)도 7개에 불과하다. LG배로 좁혀 보더라도 이창호의 4회 우승은 이세돌 및 구리가 각각 기록한 2회의 2배에 달한다.
하지만 이창호의 우승행진은 2005년 춘란배 이후 무려 6년 째 멈춰있다. 마이너급 대회로 지금은 사라진 중환배(2007년)를 넣는다 해도 ‘이창호 우승‘ 뉴스가 맥이 끊긴지 만 4년이 넘었다. 지난 봄 국제대회인 제3회 비씨카드배서도 32강에 머물렀다. 국내무대서도 올해 국수전과 맥심배 등에서 거푸 준우승에 머물면서 89년 첫 타이틀(8기 바둑왕전) 탈취 이후 22년 만의 무관(無冠) 상태다.
이창호의 열렬한 팬들은 지난여름부터 부활의 기미를 보인 이창호의 호조에 환호했다. LG배와 삼성화재배 등 2개 국제대회서 연승을 거듭하며 연승행진을 이어간 것. 그러나 제16회 삼성화재배 16강전(2회전)서 중국 구리와 만난 그는 통한의 반집 패로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번 LG배에서의 비중이 그만큼 더 커진 것이다.
이창호는 16회 LG배에서 8강에 진출하는 동안 구리(古力)와 이야마(井山裕太)를 제쳤다. 중국과 일본의 톱스타에 이어 만나는 3회전 상대는 대만의 1인자인 천스위안(26)이다. 천스위안은 어린 시절 한국에 유학 와서 2000년 입단, 유망주로 활동하다가 대만으로 복귀한 기사. 종전 1인자였던 저우쥔쉰(周俊勳)을 따돌리고 대만 바둑계에서 무려 6관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핏줄은 중국이지만 바둑적 본적(本籍)은 한국인 절묘한 신분이다.
천스위안은 이번 LG배에선 한웅규와 박승화 등 한국 무대에서 경쟁하던 옛 동료들을 따돌리고 8강 고지를 밟았다. 천스위안에게 세계 8강 등정은 처음 있는 일. 지금까지는 2005년 제10회 삼성화재배, 2010년 제3회 비씨카드배서 거둔 32강이 최고 성적이었다. 천스위안으로서도 바둑 인생이 걸린 일생일대의 승부처를 맞이한 셈이다.
이창호는 내년 봄 아버지가 된다. 13세 첫 타이틀, 17세 세계 첫 제패 등 웬만한 기록들을 독식해 온 이창호가 이를 의식해 새삼스럽게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는 소식이다. 전진이냐, 후퇴냐의 기로에서 맞는 이번 8, 4강전은 어쩌면 일생일대의 최고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이창호와 천스위안은 2002년 제1회 KTF배 본선서 딱 한 차례 만나 이창호가 불계승한 바 있다.
◇원성진
원성진(26)은 이른바 ‘송아지 3총사‘ 멤버다. 소띠해인 1985년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발군의 활약으로 장래를 촉망받은 최철한, 박영훈과 묶인 패키지 별명이 ’송아지 3총사‘였다. 하지만 두 차례 후지쓰배서 우승하는 등 3번이나 세계제패에 성공한 박영훈, 현재 잉씨배를 포함해 3관왕으로 군림 중인 최철한에 비해 원성진은 상대적으로 초라함을 면치 못해왔다.
그러나 올 들어 원성진의 기세는 셋 중 가장 매섭다. LG배 8강전 외에도 삼성화재배에선 일약 4강까지 점프, 10월 말 중국 천야오예(陳耀燁)와 결승 진출을 다투게 돼 있다. 8강전에선 친구이자 라이벌인 박영훈을 눕혔다. 국내 무대서도 국수전 도전자 결정전까지 가는 등 눈부신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과거 한 번도 세계를 제패해보지 못했던 원성진에게 가장 아쉬웠던 국제무대는 다름아닌 LG배였다. 그는 7회(2003년)와 8회(2004년) 두 번이나 LG배서 준결승에 올랐으나 두 번 모두 당시 절정기를 누리던 이창호에 막혀 결승고지를 밟는데 실패했었다. 그 한을 풀고 첫 세계제패까지 진격한다는 게 원성진의 목표다.
원성진의 준준결승 상대 장웨이지에는 올해 꼭 20세인 약관의 청년기사. 단위도 6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난 해 중국 명인전서 구리(古力)를 3대2로 꺾고 정상에 오른 대목에서 보듯 현재 당당한 중국 정상(頂上) 중 일원으로 군림하고 있다. 2005년 입단, 만6년의 짧은 경력임에도 벌써 국내외 우승 숫자가 3회에 달한다. 이번 LG배에선 조한승과 목진석 등 한국의 ‘헤비급’ 강펀처들을 제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현재 중국랭킹은 8위.
원성진과 장웨이지에는 물론 초면(初面)이다. 아직 한 번도 맞선 채 힘을 겨뤄본 적이 없다. 원성진은 내년 초 군 입대를 앞두고 뭔가 꼭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현재의 페이스만 유지한다면 작년에 비해 약간 주춤하고 있는 장웨이지에보다 관록에서 앞서 있다. 이번 8강 멤버 중 나이가 가장 어린 장웨이지에는 상대에 비해 부담이 훨씬 적다는 게 이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허영호
허영호(25)는 좀 특이한 성장 사이클을 보여온 기사다. 2001년 데뷔 직후 유망주로는 꼽혔지만 최정상권에 오를 대기(大器)란 평가는 따라온 적이 없었다. 실제로도 프로생활 10년째인 2009년까지 그가 수확한 최고성적은 신예대회 두 번의 우승과 한 번의 준우승이 고작이었다. 농심배, 삼성화재배 등 국제대회에도 얼굴을 내밀었지만 두드러진 성적은 안 나왔다. 14회 LG배(2009년)서 거둔 16강이 세계대회 최고 성적이었다.
그러나 허영호는 2010년 대폭발했다. 제2회 비씨카드배 본선진출에 이어 국수전서 4강까지 오르더니 연말에 끝난 제15회 삼성화재배서 승승장구 끝에 결승까지 올랐다. 구리와의 결승서 1대2로 져 아깝게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허영호의 재발견‘이란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그 직후 벌어진 제8회 춘란배서도 그는 4강에 진출했다. 연말 바둑대상(大賞) 감투상은 허영호의 몫이었다.
허영호의 호조는 2011년 초반까지 이어져 3회 비씨카드배 4강, 9단 승단 등 경사가 잇따랐다. 하지만 이후 허영호의 보폭은 2010년 절정기 때보다 다소 좁아졌다. 여름에 열린 16회 삼성화재배 본선서도 첫 관문을 돌파하지 못하고 32강에 그쳤다. 한때 최고 4위까지 올랐던 국내 랭킹은 현재 11위로 떨어져 있다.
이런 허영호에게 이번 LG배는 진퇴가 걸린 격전장이다. ‘LG고지‘를 잘 넘어 결승전까지 진격한다면 지난해의 돌풍을 재현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 ’유망주 10년’의 과거 위상으로 돌아가기 딱 쉬운 기로에 놓여있다.
상대인 셰허(謝赫)는 난적이다. 올해 27세로 단위는 7단에 불과하지만 ‘한국기사 킬러’로 악명이 높다. 한국기사들이 잘 나갈 때 고비에서 발목을 잡아챈 경우가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 2003년 제8회 삼성화재배 4강, 2007년 제6회 춘란배 3위, 2008년 제4회 도요타덴소배 4강에 올랐다. 올해 제8회 춘란배에선 이세돌과 패권을 놓고 격돌, 1대2로 져 준우승했다.
한국 랭킹 11위 허영호와 중국 랭킹 4위 셰허의 격돌은 얼핏 열세로 보이지만 승부는 당일 컨디션에 따라 결정될 공산이 높다. 허영호가 1년 전만큼의 상태를 유지한다면 오히려 승산이 더 많다. 두 기사는 지금까지 2010년에만 두 차례 맞대결해 1승씩 나눠가졌다. 이번 대회서 허영호는 왕시(王檄)와 박정상을, 셰허는 이원영과 박영훈을 누르고 올라왔다.
◇김지석
김지석(22)의 각오 또한 누구보다 비장하다. 그는 한국의 강동윤, 중국의 천야오예(陳耀燁), 일본의 이야마(井山裕太)등과 89년생 동갑이다. 김지석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모두 이른바 ‘출세’를 경험했다. 강동윤은 후지쓰배를 통해 세계 정상에 등극했었고, 이야마는 현재 야마시타(山下敬吾)와 함께 일본바둑계를 양분하고 있다. 천야오예 역시 중국을 대표하는 최강 중 1명으로 꼽힌다.
김지석은 이들 동갑내기들과 항상 동열로 분류되면서도 아직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2009년 물가정보배 우승으로 한 차례 국내를 제패한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2011년 한 해 동안 김지석은 비씨카드배, LG배, 삼성화재배 등 3개 국제대회서 모두 8강에 진출해 그의 화력(火力)이 아직 제대로 폭발하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김지석은 비씨카드배와 삼성화재배 8강전서 모두 구리에게 발목을 잡혀 탈락했다. 남은 것은 이제 LG배 뿐이다. 올해 LG배서 김지석은 일본의 유키(結城聰)에 이어 전기(前期) 우승자 퍄오원야오(朴文堯)를 누르고 8강까지 올랐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전진해도 국제무대에서 개인 최고성적을 작성하는 셈이다. 두 걸음 이상을 떼놓을 경우 이번 베이징 회전을 통해 화려한 ‘김지석시대‘ 개막의 신호탄을 쏘아올리게 된다.
추쥔(邱峻)은 올해 29세로 이번 8강 멤버 중 이창호에 이은 2번째 ‘고령’이다. 언제나 상체를 바둑판에 파묻듯하는 진지한 자세, 제한시간을 1초도 안 남기고 모두 소진하는 집념의 승부사로 유명하다. 중국랭킹은 12위. 올해 LG배서 강동윤과 최철한 등 한국 간판급 스타들을 딛고 올라온 데서 보듯 셰허 못지않은 한국기사 킬러다.
2009년 제14회 삼성화재배 준우승, 2010년 제23회 후지쓰배 3위에 이어 올해 제24회 후지쓰배서는 한국 박정환에 결승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막강한 파워를 실감하게 하지만 과거 LG배만 놓고 보면 한 차례 8강(14회)이 고작이었다. 김지석은 10월 국내랭킹서 9위에 올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