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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폭 물갈이에 나선 LG배 정상다툼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승부세계에 적용하자면 ‘우승도 해 본 사람이 한다’고 안성맞춤으로 정리된다. 우승 경험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군웅할거의 격전장을 뚫고 정상에 올라선다는 건 그만큼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지난 6월 15일 제16회 LG배 첫 라운드가 끝났다. 총 32명으로 출발해 두 차례에 걸쳐 솎아낸 결과 8명으로 좁혀졌다. 준준결승에 오른 8명의 면면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뭔가 세대교체의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받게 된다.

오는 11월 속행될 준준결승 진출 멤버 8명 중 우승을 경험해 본 기사는 이창호 단 한 명뿐이다. 나머지 원성진 허영호 김지석(이상 한국), 셰허(謝赫) 추쥔(邱峻) 장웨이지에(江維杰‧이상 중국) 천스위안(陳詩淵‧대만) 등 8명은 첫 세계제패 야심에 불타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해는 어땠을까. 작년 15회 때 준준결승 진출자 8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세계 정상 정복 경험자는 이창호 최철한 쿵제(孔杰) 등 3명에 달했다. 14회 때는 이창호 구리(古力) 박영훈 쿵제 최철한 등 5명, 13회 때도 이창호 구리 박영훈 창하오(常昊) 이세돌 등 5명이 대거 8강을 형성했었다.

이것은 기성(旣成) 최강자그룹의 텃세가 그만큼 강력했다는 의미다. 바꿔 말하자면 이번 제16회 LG배에선 이들 텃세멤버들이 대거 초반에 탈락했다는 의미가 된다. 현재 세계타이틀을 1개 이상 보유하고 있는 기사 가운데 이번 대회 8강 대열에 이름을 올린 기사는 1명도 없다. 이창호는 세계에서 정상을 가장 많이 정복해 본 기사지만 현역 챔피언은 아니다.

최근 비씨카드배를 2년 연속 우승한 이세돌은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 중 1명으로 꼽혔지만 이번 대회 1회전서 박영훈에게 잡혔다. 박영훈도 2회전서 중국 셰허에게 막혀 대진표에서 사라졌다.

현재 후지쓰배를 보유 중인 쿵제도 탈락했다. 최근엔 TV아시아바둑을 또 우승, 3연패(連覇)를 이뤄 유일하게 현역 세계 2관왕으로 군림 중인 그는 한국 박정상에 의해 체면을 구겼다.
쿵제와 함께 중국의 양대 ‘얼굴’로 꼽히는 구리는 어떻게 됐을까. 하필 첫 판서 한국의 이창호를 만나 단칼에 사라졌다. 구리는 과거 두 차례나 정상에 올라섰던 ‘친(親) LG배 기사’ 중 한 명인 동시에 삼성화재배 현역 챔피언이기도 하다.

지난 해 LG배 우승자 퍄오원야오(朴文堯) 역시 거센 새 물결의 파고(波高)를 피해가지 못했다. 이 조선족 청년에게 안겨주었던 처녀우승의 감격이 불과 넉 달도 지나지 않아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이다. 퍄오는 첫 관문은 넘어섰지만 2회전서 한국의 새로운 기대주 김지석의 칼을 피해가지 못했다.

역대 세계대회 우승 경험자 중 첫 라운드 돌파에 실패한 기사는 더 있다. 2006년 TV아시아 챔프 왕시(王檄)와, 같은 해 후지쓰배를 석권했던 박정상은 각각 1회전과 2회전서 허영호에 의해 제거됐다.
후지쓰배 2차례 우승의 박영훈은 셰허에게, 현역 잉씨배 보유자 최철한은 추쥔에게 꺾였다. 추쥔은 후지쓰배를 한 차례 정복한 바 있는 강동윤을 1회전서 낚아챘다. 2004년 제9회 LG배 우승자 장쉬는 최철한의 펀치를 못 견디고 첫 판서 사라졌다.

이밖에도 중국의 신예스타 천야오예(陳耀燁), 일본이 자랑하는 이야마(井山裕太) 유키(結城聰) 등이 보따리를 쌌다. 32강전과 16강전 과정을 통해 살아남은 8명의 면면과 준준결승 대진 추첨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창호-천스위안
허영호-셰허
원성진-장웨이지에
김지석-추쥔

이창호의 세계대회 우승회수는 통산 21회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숫자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LG배만 해도 네 번이나 우승해 최다 우승기록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가 새 얼굴로 구성된 이번 8강 멤버 중 유일한 중고품(?)인 셈이다.

그런데 이창호의 최근 족적을 살펴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는 2005년 3월 춘란배에서 우승한 이후 메이저급 세계기전 정상에 서보지 못하고 있다. 마이너 기전인 중환배를 2007년 제패하긴 했는데, 그나마 그 해를 마지막으로 대회가 폐지됐다.

세계 최고의 스타 이창호가 6년 넘게 메이저 봉(峰) 등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충격적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9차례나 결승에 올랐지만 번번이 실족,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이런 최근 이력서만 놓고 본다면 지난 수 년 동안 우승에 굶주려 있다는 점에선 이창호나 나머지 7명이나 다를 게 없다.

올해 이창호가 보여주고 있는 분전은 특별히 인상적이다. 그는 역대 LG배에 빠짐없이 출전했던 세계 유일의 기사다. 올해의 경우 랭킹 하락으로 ‘첫 결석’의 위기에 몰렸지만 통합예선을 통해 의연히 탈출, ‘개근 기록’을 유지해 갔다. 이러한 근성과 정신력이라면 이번 16회 LG배에선 우승이란 결실로 이어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창호가 어렸던 시절 LG배는 특별한 성장의 텃밭이었다. 그 LG배에 다시 깃발을 꽂는다면 매우 의미 깊은 금의환향이 될 것이다.

원성진은 실력에 비해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비운의 스타로 불린다. LG배만 놓고 보더라도 7, 8회 대회서 2년 연속 4강에 올랐으나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함께 ‘송아지 3총사’로 불리며 경쟁해온 동갑내기 박영훈 최철한과 달리 그는 아직 세계 정상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 원성진에게 유독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그는 26세다.

허영호(25)의 행보도 주목된다. 신인 타이틀전 등 마이너급을 빼면 국내무대서조차 이렇다 할 경력이 없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유망 신예‘의 수식어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대폭발 중이다. 작년 삼성화재배에선 구리와 결승을 펼쳤으며 춘란배서도 4강에 올랐다. 올 들어선 제3회 비씨카드배서 또 다시 준결승 고지를 밟아 세계적 스타로 성장했음을 입증했다. 몇 차례의 꽃망울이 이번 제16회 LG배서 활짝 핀 ‘만개(滿開)’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김지석(22)은 어린 시절부터 한국바둑의 천재 계보를 잇는 대기(大器)로 각광받아 온 인물. 준비기간이 다소 길어지는가 싶더니 요즘 바짝 날이 섰다. 빠른 수읽기와 번뜩이는 감각, 가공스런 공격력이 경지에 달해 세계를 제패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외국 기사들의 전력도 결코 만만치는 않다. 한국 기사들의 천적(天敵)으로 불리는 셰허, ‘끈기의 화신‘ 추쥔, 20세 나이에 명인에 오르는 등 중국 신세대를 대표하는 장웨이지에 모두 일당백의 강펀치를 자랑한다.

아무튼 16회 LG배는 초반 라운드에서 기존 강자들이 대부분 조기 탈락하고 새로운 얼굴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올해 컨셉트가 ‘물갈이’로 결정됐다. 16년 역사 동안 단 한 차례도 특정 기사의 연패(連覇)를 허용하지 않아 온 LG배 전통 또한 올해까지 이어졌다. 변화와 혁신을 통해 새 물결을 이끌어 준다는 대회 성격대로다. 그렇다면 올해의 주인공은 이들 8명 중 누가 될까. 정답은 결승 3번기가 벌어질 내년 초에야 알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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