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돌 구리(古力) 이야마(井山裕太). 한 중 일 3개국을 대표하는 최강자 3명이 5월 16일 중국 충칭(重慶)시에 모인다. 3각 대결을 통해 바둑 최강국을 가려보자는 중국의 기획에 따른 것. 주최 측은 당초 한국과 중국만의 대결로 대회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막판 일본을 포함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보통 세계기전은 32명 또는 24명의 각국 정예들이 모여 토너먼트로 패권을 다투는 형식으로 치러진다. LG배를 비롯해 잉씨배 삼성화재배 춘란배 후지쓰배 등이 모두 그렇다. 하지만 중국은 번거롭게(?) 수 십 명의 기사들을 불러 모을 것 없이 최정상 1명씩의 대결로 패권을 가리는 형식의 대회를 종종 치르곤 한다.
지난해에도 중국은 이창호 구리 이야마를 초청해 ‘한 중 일 명인전’이란 명칭으로 대회를 열었고 구리가 우승했다. 올해 이 명칭을 쓰지 못하는 것은 이세돌이 한국의 명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명인은 박영훈이다. 중국 역시 구리가 지난 연말 신예 장웨이지에(江維杰)에게 2대3으로 패함으로써 6년 연속 보유해 오던 명인 타이틀을 잃었다. 주최측이 이세돌과 구리를 이번 대결의 주역으로 선택함으로써 대회 이름도 ‘한중일 고수(高手) 초청전‘으로 조정된 것.
사실 동양 3국 최정상만을 따로 불러 기량을 겨루게 한 최초의 국가는 한국이었다. 1996년 동아일보 주최로 열린 세계바둑 최강결정전이 효시다. 이창호와 다케미야(武宮正樹), 마샤오춘(馬曉春)이 초청돼 더블리그를 펼친 결과 이창호가 4전 전승으로 우승했었다.
이번 한중일 고수 결정전 우승상금은 30만 위안(약 5100만 원)이나 된다. 준우승 20만 위안, 꼴찌인 3위에 그쳐도 10만 위안을 받는다. 1인당 1시간에 1분 초읽기 1회를 준다. 3자가 1승 1패 동률을 이룰 경우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선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3명 대결 때는 이것이 가장 큰 난제다).
이번 대회가 열리는 충칭은 중국대표로 출전하는 구리의 고향이다. 충칭시 난촨(南川)구 진포(金佛)산에서 벌어진다. 구리는 중국의 대표기사이기도 하지만 충칭이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해 마지않는 고향의 영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누가 우승할까. 일단 이세돌이 가장 유력해 보이지만 낙관할 정도는 아니다. 83년생 동갑내기인 구리와는 중국리그를 포함해 총 21번을 겨뤄 나란히 11승 11패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지난 해 2010년만 놓고 보면 세 판을 두어 구리가 2승 1패로 앞섰다.
이세돌 대 이야마 역대전적도 일방적이지는 않다. 2008년 후지쓰배, 2010년 농심배서 이세돌이 잇달아 이겼지만, 가장 최근에 해당하는 2010년 11월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는 이야마가 승리했다. 3판 두어서 2승 1패라면 이세돌이 승리를 장담할 만 한 데이터는 아니다.
그렇더라도 전문가나 팬들의 진단은 역시 이세돌의 우승이 가장 유력하다는 쪽으로 모아진다. 이세돌의 최근 컨디션이 워낙 좋기 때문이다. 한국랭킹에서 14개월 연속 1위를 질주 중이다. 현재 보유 중인 세계타이틀은 비씨카드배 1개뿐이지만 6월 26일부터 중국 셰허(謝赫)와 제8회 춘란배 결승 3번기를 치를 예정이어서 2관왕 등극도 유력하다.
이에 대항하는 구리는 현재 삼성화재배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연말 아시안게임과 올해 초 국가대항전인 초상부동산배서 부진했어도 세계 최정상의 일각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이세돌과 구리가 제3회 비씨카드배 패권을 놓고 4월 23일부터 결승 5번기를 펼치게 됐으니 숙적은 숙적이다. 둘 중 누가 이기건 비씨카드배 2회 우승을 기록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통산 세계대회 우승 경력에선 둘 간에 차이가 좀 난다. 이세돌이 13회 세계 정상에 선 반면 구리의 세계우승 회수는 7회에 불과하다. 7차례 세계 제패는 지금까지 중국기사들 중 최다 기록이다. 녜웨이핑(聶衛平)이나 마샤오춘, 쿵제(孔杰)를 포함해 다른 어떤 중국기사도 세계 우승 3회를 넘지 못했다.
국내대회 우승 회수는 이세돌이 21회, 구리는 26회. 하지만 이 부분은 ‘노는 물’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 자료는 되지 못한다. 상대한 기사들이 전혀 다르기 때문. 구리가 2009년 국내대회 준우승이 3차례나 될 만큼 ‘골 결정력’이 예전만 못해 보인다는 점도 주목을 요한다. 1년여에 걸친 부진으로 구리의 자국 랭킹은 4위까지 떨어져 있다. 이에 비해 이세돌은 원익배와 KT배를 손에 넣으며 사이클링히트(전 기전 정복)를 달성하는 등 절정의 컨디션을 과시 중이다.
이세돌과 구리처럼 흔치 않은 라이벌 관계일 경우 전적이나 컨디션만으로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28세 동갑인 두 기사는 실제로 큰 대국 때마다 유난히 상대를 의식, 당시까지의 컨디션과 전혀 다른 결과물을 받아든 경우가 꽤 있었다.
2009년 초 벌어졌던 제13회 LG배 결승 3번기가 좋은 예다. 당시 나란히 세계 3관왕이었던 둘은 LG배 결승 돌입 한 달 전에 국가대항전(제10회 농심배)서 마주쳤다. 그 바둑서 이세돌이 승리하는 바람에 한국은 최종주자 이창호가 나오지 않고도 대회를 마무리했다. 이세돌로선 더 할 수 없이 기분 좋은 결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LG배 결승에 돌입한 이후 이세돌은 이해할 수 없는 초조감 속에서 쫓기듯 대국하더니 무기력하게 2연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었다. 당시의 ‘LG배 패전‘은 그 몇 달 후 이세돌이 세계 바둑사상 유례가 없는 프로기사의 6개월 휴직이란 일대 사건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됐다.
2010년 10월 벌어졌던 제15회 삼성화재배 8강전 때도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이세돌의 우세를 점치는 분위기였지만 승자는 구리였다. 이세돌은 국후 “그냥 평범하게 마무리했으면 무조건 반 집을 이긴 바둑”이라며 후회했지만 바둑은 이미 끝난 뒤였다. 역시 라이벌 의식이 평정심을 무너뜨린 케이스였다. 중국리그 등 비공식 대국을 제외하고 둘 간의 공식전 전적만 계산하면 구리가 이세돌에게 8승 5패로 앞서고 있다.
두 기사는 나이 외에 기풍도 매우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이세돌이나 구리나 격렬한 몸싸움을 즐기며 스케일 큰 전면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마다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둑을 그쪽으로 몰고가는 기풍이다. 이러다 보니 두 기사가 맞대결하면 거의 예외없이 전판이 흔들리는 무시무시한 살육전으로 이어지곤 한다. 관전용으로도 매우 흥미롭고 아기자기해 최고의 흥행성을 자랑한다.
일본 대표 이야마는 89년생으로 한국의 강동윤 김지석, 중국 천야오예(陳耀燁) 등과 동갑이다. 이세돌이나 구리에 비해선 나이로나 실적으로나 아직 한 두 학년 아래의 ‘하급생’이란 느낌을 준다. 조치훈 요다(依田紀基) 야마시타(山下敬吾) 하네(羽根直樹) 등으로 이어지는 일본 1인자 계보 ‘바통터치‘에 공백기가 생기면서 이같은 현상이 빚어졌다.
이야마는 16세 때였던 2005년 제12회 아함동산배를 통해 첫 우승을 기록한 기린아다. 조치훈의 수 십 년 묵은 기록을 갈아치우며 일본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을 경신하자 일본 팬들은 열광했다. 이야마는 그러나 이듬해 중국 아함동산배 우승자인 구리와의 제7회 중일 아함동산배 대결(2006년)에서 패했다.
이야마는 2009년엔 장쉬를 제치고 명인전을 제패, 일본 7대 타이틀 최연소 등극이란 또 하나의 역사를 썼다. 올해 방어에 성공하면서 현재 일본 2위 기전 명인전을 2연패(連覇) 중이다. 하지만 올해 랭킹 1위 기전인 기성(棋聖)을 놓고 장쉬와 일전을 펼쳐 실패했다. 실력 상으론 장쉬에 이어 현재 일본 2위란 분석이 유력하다.
이세돌 구리 이야마 등 동양 3강을 대표하는 간판스타들의 3각대결은 비록 단발대결이긴 하지만 나름 결과가 주목되는 짜릿한 이벤트다. 특히 한국과 중국은 몇 년째 세계바둑 패권을 다투는 상황이어서 국가적 체면까지 걸려있다. 한 발 뒤처친 상태에서 대지지진이란 악재까지 만난 일본으로선 이야마가 분위기 반전의 쾌거를 이뤄주길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동양 3강 ‘바둑 3국지’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