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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배, 세 번의 상하이 원정記
 
▲4강을 차지한 중국기사들 왼쪽부터 멍타이링 콩지에 왕야오 박문요


LG배 15년. 그 사이 세계기왕전은 세 차례에 걸쳐 상하이(上海) 땅을 방문했다. 그 족적을 새삼스럽게 되돌아보게 됐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나 세상이 바뀌는지 실감이 난다. 오늘 우리 바둑계의 좌표는 어디쯤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1997년 10월 27일 제2회 대회 8강전>
상하이 화유엔 호텔 자스민 룸. 세계 8강 중 한국 기사는 5명이다.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최명훈. 일본은 고바야시 사토루와 왕리청 2명이 이 자리에 합류했다. 중국은 마샤오춘 1명뿐이다. 아직 일본 바둑은 제법 힘을 쓰고 있었다.

마샤오춘은 이창호의 ‘밥’이던 시절이다. 이창호는 이번에도 이 ‘밥’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그는 그 무렵 큰 차이로 이기지 않으면서도 매번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만큼 마샤오춘을 괴롭히곤 했었다. 백 1집 반 승. 유창혁도 사토루를 백 불계로 일축했다. 최명훈은 ‘동족상잔’ 끝에 대선배 서봉수를 탈락시켰다.

또 한 명의 노장 조훈현은 왕리청에 의해 대진표에서 사라졌다. 결국 최명훈 대 왕리청, 이창호 대 유창혁의 4강 대진표를 만들고 LG배의 첫 상하이 잔치는 일단 막을 내렸다. 절묘한 대진표가 그려졌다고 우리 측 관계자들 모두가 만족해했다. 훗날 왕리청은 유창혁을 꺾고 일본에 기념비적인 LG배 우승컵을 안겨준다.

8강전이 벌어지는 동안 화유엔 호텔엔 1천여 명의 바둑 팬들이 쇄도했다. 공개해설을 듣기 위한 인파였다. 주최 측은 호텔에서 가장 큰 500석 규모의 바화팅 룸을 전세내 공개 해설장으로 배정했으나 밀려드는 팬들을 수용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미처 입장치 못한 팬들이 항의 시위를 펼치는 통에 경찰까지 동원됐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실에 성공한 팬들은 녜웨이핑의 이창호-마샤오춘 전 해설에 탄성을 연발하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대회 협찬사 LG그룹이 제공한 컬러TV, 오디오세트, 화장품 등 경품에 당첨된 팬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호했다. 주최 측은 미처 입장 못한 팬들을 위해 호텔 뜰에 야외 즉석 해설장까지 임시 가설하며 끝가지 서비스를 다했다.

8강전은 상하이TV가 자체 중계 외에 전국채널인 CCTV에 화면을 제공했다. 중국 전역에 국제바둑대회가 중계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상하이 일대서 1천만 명, 전국적으론 5~6천만 명이 중계를 지켜봤던 것으로 추산됐다. 당시 LG배 공동후원사 중 하나였던 SBS 서울방송은 곧 이어 벌어질 서울서의 4강전에 대비해 자료 확보를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매년 LG배 때마다 항상 새로운 기술을 등장시키던 LG그룹 인터넷 중계팀은 이번에도 첨단 무기(?)를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바둑판만 비치던 종전 화면에서 탈피해 다양한 대국장면을 화상 서비스하는 기술을 들고 나온 것.
또한 당시로선 획기적인 인터넷 폰을 도입해 한 중 양국간 동시통화를 시도했다. 8강전 네 판을 모두 서비스하면서 접속 건수가 무려 1만1천 여 회에 이르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제8회 LG배 8강전


<2003년 10월 28일 제8회 대회 8강전>
왕바오허 호텔에 한국 6명, 중국 2명의 선수가 집결했다. 동국인 끼리의 대결을 가능한 한 피하는 게 LG배 추첨방식이지만 한국기사 4명은 어쩔 수 없이 2명씩 짝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이창호가 김주호와, 이세돌이 조한승과 얼굴을 마주한 채 맞붙었다.

결과는 이창호와 조한승의 승리. 그 밖에 원성진이 창하오를, 목진석이 왕레이를 따돌려 한국의 4강 독점이란 비극(?)이 6, 7회 대회에 이어 3년째 연속 재현됐다. “이거 이러다가 LG배가 국내대회로 전락하는 거 아니야?“ 한국 관계자들은 짐짓 흥행효과를 걱정하면서도 한국의 계속되는 압도적 강세에 흐뭇해했다. 가위 한국바둑 전성시대였다.

한국의 독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LG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오히려 더 극성스러워졌다. 중국의 신랑망, 기성도장, 청풍 등 인터넷 사이트에 상하이TV, 한국의 바둑TV와 사이버오로 등이 대거 이날 실황 중계에 나섰다. 중국 CCTV는 이와 별도로 50분간의 특별 프로그램을 제작, 며칠 후 방영했다.

필자는 당시에도 준준결승 4판의 승부결과를 백분율 방식으로 예상했다. 언제건 위험천만한 전망 수법이다. 결과적으로 이창호의 대 김주호 전 승리(55대45), 원성진의 대 창하오 전 승리(52대48)를 맞췄다. 이세돌이 조한승에게 53대 47정도로 우세하다고 내다봤으니 멋지게 빗나갔다. 목진석 대 왕레이는 50대 50. 결과적으로 그냥 ‘망신을 면한’ 정도의 점괘였다.

아무튼 이 8회 대회 ‘상하이 대첩‘으로 한국바둑은 그 때까지 8년 간 LG배를 치르는 동안 6회를 독점하는 결과를 낳았다. 주최 측 관계자들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흐름이었다. 1국이 계속 독주한다면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20세기의 빛나던 활황이 무색하게 중국에게도 추월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8회 대회가 이후 LG배에서 한국이 고전의 길로 접어드는 출발점이었음을 당시엔 아무도 몰랐다. 이듬 해 9회 대회서 한국은 8강 중 5명을 올렸지만, 우승은 일본기사 중 유일하게 남았던 장쉬에게 내줘야 했다. 10회 때는 중국인끼리 패권을 겨뤄 구리가 우승컵을 가져갔고, 11회엔 바둑의 ‘제4국‘으로 취급되던 대만이 저우쥔쉰이란 우승자를 탄생시켰다.

12회 때 이세돌이 한상훈과의 결승을 장식하면서 ‘외풍(外風)’은 일단 가라앉은 듯 보였다. 그러나 13회 대회서 구리가 이세돌을, 14회 때는 쿵제가 이창호를 연속 2대0으로 셧아웃시켰다. ‘한국 전용 국제기전’이라던 LG배의 전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2010년 11월 8일 제15회 대회 8강전>
한국의 ‘결사대’가 다시 중국 상하이를 향해 날아갔다. 중국 5명에 한국 3명. 모두들 숫자에선 열세지만 질(質)에서 한국이 앞선다고들 했다. 따라서 결승언저리 까지 올라가면 한 중 양국이 대등한 숫자로 팽팽하게 맞서리라고 모두들 믿었다.

질적(質的) 우세의 근거는 양국 출전자들의 관록과 랭킹을 근거로 했다. 이창호는 비록 출전 당시 생애 처음으로 6위로 떨어졌다지만 상대인 왕야오는 중국 21위에 불과했다. 최철한의 11월 순위는 3위였고 그의 상대 퍄오원야요의 중국 랭킹은 10위. 한국 13위 안조영은 중국 23위 멍타이링과 맞서는 매치업이었다.

랭킹을 떠나 이름값에서도 한국은 모든 판에서 중국 선수들을 압도했다. 이창호는 세계기전 최다 우승자이고 최철한은 현역 잉씨배 보유자다. 멍타이링이 중국 안에서조차 아직 무명신인이란 점에서 안조영의 승리는 무난해 보였다.

필자는 LG사이트 바둑코너를 통해 이번에도 8강전 전망을 백분율 방식으로 했다. 한국 선수들이 세 판 모두 유리하다고 썼으니 결과적으로 100% 틀린 전망이 됐다. 세상에 이런 망신이 또 없으리라. 더 할려야 더 할 수조차 없는 완벽한 최악의 점괘였다.
솔직히 세 판 모두를 이길 것으론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객관적’ 자료상 어느 판도 한국선수가 열세라고 진단할 수 없었다. 또한 한 판 쯤 모종의 ‘감(感)’을 느꼈더라도 사기(士氣) 상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고 말한다면, 구차한 변명이 될까.

기자회견장은 예년보다 많이 쓸쓸했다. 몰려든 중국 보도진 숫자도 많이 줄어있었다. 예전에 같은 장소에서 LG배를 치를 때 대회장 안팎을 뒤덮던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일부 중국 기자의 맥빠진 질문에 이어지다가 이내 파장으로 치달았다.

이 대목에서 쿵제가 결정타를 날렸다. 임박한 아시안게임 전망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그는 “중국이 훌륭한 선수들로 구성됐지만 이세돌을 꼭 이길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한 것이다. 옆에 앉은 이창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회견장에 선수라곤 이들 2명만 초대된 자리였다.

이 수모를 바둑판에서 갚아주지 못했다. 한국기사 3명이 모두 8강전에서 패함으로써 후야오위를 꺾은 쿵제를 포함해 4강 네 자리를 중국이 독식하게 됐다. 준결승도 치르기 전에 3년 연속 중국의 LG배 연패(連覇)가 결정된 것이다.

국제대회 4강 대열에 한국기사가 1명도 보이지 않은 것은 이번이 여덟 번 째다. 2000년 대 이전, 한국 바둑이 아직 크게 약하던 초창기 후지쓰배 때의 4번을 제외하면 네 번뿐이었다. 그리고 그 4번 가운데 한국주최 국제대회로 첫 치욕의 역사는 하필 LG배에서 기록됐다.

이창호 최철한 안조영은 ‘상하이 참사(慘事)’가 벌어졌던 당일 밤 이창호 방에 집결했다. 그리고 무려 3시간 반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그날 진 세 판의 바둑을 공동 복기했다는 게 이창호의 동생 이영호씨의 전언이다. 승부로 먹고사는 그들이 그날 느꼈던 분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팬들에 대한 미안함과 당혹감이 절절히 전해져 온다.

준준결승전 이틀 뒤 준결승전이 열렸다. 지들끼리 치고받고 하더니 쿵제와 퍄오원야오가 결승에 올라갔다. 내년 2월 둘이서 결승 3번기를 펼쳐 2억 5000만 원의 거금을 다투게 된다. 바둑은 개인종목이지만 다른 어떤 승부 못지않게 내셔널리즘의 정서 위에서 치러진다. 중국인들은 싱겁고, 한국 팬들 입장에선 쓸쓸하기 짝이 없는 결승전이 잉태됐다.

<15회 상하이대회가 남긴 것>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兵家)의 상사(常事)다. 이번 ‘상하이 참사’로 한국 바둑이 완전히 몰락한 것으로 진단하는 것도 성급하다. 하지만 8강전 직후 노골적으로 박수를 치며 함박웃음을 짓던 중국바둑 관계자의 표정은 잊을 수 없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잇단 ‘싹슬이’에 초죽음이 됐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 그러나 노력과 반성 없이 역사가 저절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본의 예처럼 더욱 추락할 수도 있다. 노력과 반성이란 비단 경기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2회와 8회 때의 상하이의 추억을 재현하려면 그 때의 열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로기사뿐 아니라 바둑 행정기관, 주최사와 후원기업, 그리고 팬들에 이르기까지 이번 참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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