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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쟈쟈, 여성바둑계 스타탄생
 


영웅은 난세에 태어난다던데, 바둑계에서도 예상 못했던 스타가 어느 날 불쑥 기습적으로 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주목 받던 사람은 물론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누구도 짐작조차 못했던 새 얼굴이 깜짝 쇼를 벌일 때 팬들은 뒤집어지게 마련이다.

세계바둑계 변방취급을 받던 대만에 일약 우승을 안겨주었던 저우쥔쉰이 좋은 실례(實例)다. 거슬러 올라가면 프로 진출 1년 여 만에 18세의 나이로 명인을 탈취했던 서봉수도 이에 해당한다. 입단 하자마자 초단의 몸으로 세계대회 결승까지 진격했던 한상훈도 이 범주에 속한다.

최근 여자바둑계에서도 놀랄 만 한 일이 벌어졌다. 프로가 된지 불과 2년에 불과한 16세의 혼혈 소녀가 제1회 궁륭산병성배란 이름의 새로운 세계여자선수권대회서 일약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헤이쟈쟈(黑嘉嘉).

궁륭산배는 세계 최강급 여성기사 16명이 초청받아 총 토너먼트로 진행됐다. 세계 최강의 여류로 꼽히는 루이나이웨이(芮乃偉)를 비롯해 탕이(唐奕), 쑹룽후이(宋容慧) 등 중국 아시안게임 여자대표 3명이 총 출동했다. 아시안게임 대표인 이슬아, 한국여류 넘버 3로 지목되는 김혜민 등 한국간판들도 우승 후보군에 포함됐었다.

중국 신예강호 왕천싱(王晨星), 일본 여성바둑계를 석권 중인 대만 출신 씨에이민(謝依旻)도 우승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우승 후보보다 우승 후보가 아닌 기사를 꼽는 편이 훨씬 쉬워보였다. 세계대회 구색을 맞추기 위해 끼워 넣은 헝거리 및 캐나다 대표 등과 헤이쟈쟈 등 3명은 만장일치로(?) 최약체로 분류됐다.

하지만 뚜껑을 열면서 주최 측과 참가 선수들은 놀라운 상황과 마주해야 했다. 햇병아리로만 보던 헤이쟈쟈가 뭇 강호들을 연파하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해 간 것이다. 첫 판서 일본의 관록파 아오키(靑木喜久代) 8단을 꺾더니 리허(李赫) 정옌(鄭岩) 등 중국의 간판급 맹장들을 연파했다.


헤이쟈쟈는 총 4국을 두어 한국 박지은과의 결승전을 제외한 3국을 승리했다. 박지은은 우승 후 “상대가 혜성같이 등장한 새 얼굴이어서 큰 부담을 안고 싸웠다”고 했다. 마지막 한 관문을 넘어서는데 실패하긴 했어도 헤이쟈쟈는 이번 대회를 긴장과 흥분으로 몰아넣는 청신제 같은 역할을 해냈다.

헤이쟈쟈에 주목하는 것은 그녀의 스타성 때문이다. 바둑실력 외에도 여러 가지 흥행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호주에 거주하던 대만 출신의 어머니와 호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대만으로 건너가 6살 때 바둑돌을 처음 잡았다. 그녀가 11세 때 가족이 샌디에고로 건너가면서 이번엔 미국생활이 시작했다.

바둑에 깊이 빠져들면서 14세 되던 2008년, 3년 만에 또 거주지를 옮겼다. 이번엔 중국 톈진이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중국에서 프로 입단에 성공했다. 올해(2010년) 1월엔 다시 대만으로 이주, 프로기사로 등록하고 활동 중이다. 짧다면 짧은 바둑 이력서지만 남들이 수 십 년 동안에도 경험 못 할 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동서양 양쪽의 용모뿐 아니라 사고방식까지를 모두 이해하고 또 겸비하고 있다고 짐작된다.

이번에 그녀가 호주 대표로 궁륭산배에 출전한 대목에서 보듯 헤이쟈쟈는 국적 측면에서 다용도(?)로 쓰일 수 있다. 법적으로 어느 나라 대표로 출전하는 것이 옳으냐의 문제는 여기선 논외로 한다. 아무튼 국제성은 바둑에서도 세계 스타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 중 하나다. 그녀는 올해 11월 중국 광저우서 열릴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기 위해 대만대표 선발전에 출전, 대표권을 따 놓은 상태다.

나이 또한 헤이쟈쟈의 상품성 제고에 제대로 한 몫 하고 있다. 헤이쟈쟈는 94년 생으로 2008년 입단 당시 14세 였다. 중국 최연소 프로인 양딩신(楊鼎新. 98년 10월 19일생)과 함께 입단했다. 이번 궁륭산배에서도 그녀는 가장 어렸다. 중국 전체 여자기사들 중에서도 최연소 그룹에 속한다.

또 하나는 이번 대회의 판도와 관련된 것이다. 궁륭산배는 중국이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야심차게 내놓은 ‘기획상품’이었다. 총 16명 중 6명의 중국선수가 배정됐고 한국과 일본은 각각 3명씩 초대받았다. 주최국으로선 당연히 중국기사가 이겨줘야 모양새가 좋았을 텐데, 민망스럽게도 결승에 조차 1명도 오르지 못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헤이쟈쟈의 결승 진출은 세계가 오래 기억할 만 한 인상적인 ‘데뷔무대’였다. 그녀는 혈통적으로도 중국인의 피가 절반 섞인 데다 프로 입단도 중국에서 했다. 결승 무대에서 13억 중국인들에게 중국을 대신한 대표로 깊이 각인된 것이다. 결승전 결과와 관계없이 헤이쟈쟈는 세계바둑계의 당당한 신데렐라로 떠오르는 기회를 낚아챘다.

헤이쟈쟈에게 이번 대회는 사실 국제대회 ‘신고 무대’는 아니었다. 2년 전 프로 입단 직후 베이징서 열렸던 세계마인드스포츠 대회 여자개인전 부문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때도 4강전서 박지은에 막혀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동메달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 역시 웬만한 기사들의 이력서엔 넣기 힘든 경력이다(실력보다도 기회 자체가 아무에게나 찾아오기 힘들다).

헤이쟈쟈의 마지막 매력은 ‘아마추어 스러움‘이다. 학업 성적도 뛰어나며 피아노 수영 등 많은 취미 겸 특기를 지녔다. 바둑은 미국 체류 시절엔 스승 없이 100% 인터넷 대국으로만 연마했다니 얼마나 발전 가능성이 높은가. 아직 승부에 속박돼 일희일비하지 않는, 때 안 묻은 원석(原石)이다. 이런 풋풋함이 세계여류 바둑계에 크게 어필하고 있다.

그녀는 이번 아시안게임서의 성적에 따라 자신의 향후 진로를 결정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광저우 대회에 올인 한다는 뜻도 된다. 일본의 여류 3관왕으로 군림 중인 씨에이민 등과 함께 대만 대표로 출전할 텐데, 이들 정도면 동메달 이상이라는 목표 달성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혼성페어전에선 저우쥔쉰과 파트너를 이룰 것으로 알려졌다.

스포츠건, 예술분야건 스타가 많이 출현해야 융성한다. 스타가 나와 주려면 그 방면의 대중적 인기와 저변이 두터워야 하지만 그 역(逆)도 훌륭하게 성립한다. 갑자기 뛰쳐나온 불세출의 영웅 한 명이 그 세계를 몇 단계 끌어올리기도 한다. 드물지만 그런 예가 종종 발생한다.

항상 여성바둑이 전체 바둑계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에 대해 말하곤 한다. 하지만 여성 바둑인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숫자도 적고 스타 또한 희귀하다. 헤이쟈쟈라는, 이름부터 그로테스크한 이 ‘다국적’ 16세 혼혈소녀가 침체해 있던 여성 바둑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바둑 팬들로선 즐겁게 지켜 볼 구경꺼리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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