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바둑의 꽃은 역시 타이틀이다. 타이틀 무대에 오르는 것은 기사들에게 최대의 꿈이자 로망이다.
그 영광을 가장 많이 차지했던 기사는 누구일까. 모두가 짐작하는 대로 조훈현 9단이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평생 157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추격자가 없는 최다 기록이다.
물론 타이틀전에 임한 횟수는 157회보다도 훨씬 많다. 생애 통산 3차례의 전관제패를 이룬 것을 비롯해 특정기전 최다연속 우승(패왕전, 16회)기록과 세계타이틀 사이클링 히트 등 금자탑을 수없이 완성했다. 그렇다면 조훈현과 가장 많이 패권을 다툰 결승전 파트너는 누구였을까. 또 다른 결승전 맞수로는 어떤 커플들이 있었을까. 한국바둑 최다 타이틀전 커플을 순위별로 살펴보자.
①조훈현-서봉수 69회
이 역시 예상했던 대로 조훈현과 서봉수라는 ‘세기의 라이벌’이 갖고 있다. 58세 동갑나기인 조훈현과 서봉수는 통산 69회에 걸쳐 타이틀전을 치러 조훈현이 56회, 서봉수가 13회 타이틀의 주인이 됐다.
둘 간의 첫 타이틀전은 74년 5월 시작된 제6기 명인전이었다. ‘순 토종기사‘ 서봉수는 명인전 3연패(連覇)에 도전하는 입장이었다. 모두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조훈현의 승리를 예견했지만 결과는 서봉수의 3승 1패로 끝났다.
두 라이벌이 마지막으로 겨뤘던 타이틀전은 지금부터 15년 전인 95년 제12회 박카스배였다. 조훈현이 3대0 스트레이트로 이겨 우승한 뒤 기전이 사라지는 바람에 조훈현은 ‘마지막 박카스 우승자’로 남았다.
두 기사는 첫 타이틀전부터 마지막 타이틀전까지 21년 여 동안이나 피나게 정상을 다투었던 셈. 물론 그 역정(歷程)이 이제 모두 끝났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둘 모두가 노익장을 과시하다 결승전서 조우, 또 다시 타이틀을 다투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시니어 제한기전 같은 무대가 늘어나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둘 간의 타이틀전 우승 스코어는 56대 13으로 승률 81.2%(조훈현 기준)지만, 타이틀전서 주고받은 대국승패에선 간격이 좀 좁혀진다. 총 272국을 겨뤄 조훈현이 190승 82패, 승률 69.8%를 기록하고 있다. 타이틀전이 아닌 본선리그 등 모든 기전에서의 양자대결 성적(조훈현 244승 119패, 승률 67.2%)과 비교해 볼 일이다.
둘 간의 총 대국수(363국) 대비 총 타이틀대국수(272국) 비율은 74.9%에 이른다. 둘이 만나 대국한 바둑 4판 중 3판은 타이틀이 걸린 바둑이었다는 뜻. 양웅이 70년대 중반부터 약 20년 간 한국 바둑계에서 차지했던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②조훈현-이창호 68회
세계바둑 역사상 최고의 사제 커플로 일컬어지는 조훈현과 이창호는 타이틀을 놓고 68회나 칼을 섞었다. 조훈현-서봉수 타이틀대결 69회에 불과 1회가 모자랄 뿐이다. 이 68회의 타이틀매치가 치러진 기간은 15년이 채 안 된다. 조훈현-서봉수 타이틀전이 21년에 걸쳐 69회 이뤄졌던 것과 비교해 훨씬 집중적으로 사제가 정상을 다퉜다는 의미다.
조훈현 이창호 간의 타이틀 전쟁 68회의 성적표를 보면 이창호가 49번, 조훈현이 19번 우승했다. 이창호의 승률이 72.1%에 이른다. 둘은 세계타이틀을 놓고도 4차례나 겨뤘는데, 여기선 사제가 사이좋게 2번씩 우승했다.
둘 간의 첫 타이틀전은 88년 말 벌어진 제28기 최고위전으로 조훈현이 3대1로, 마지막 타이틀전인 제34기 명인전에선 이창호가 3대2로 각각 이겼다. 이 대목 역시 두 천재가 앞으로도 언젠가 또 다시 타이틀을 겨룰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타이틀전 판수 합계로 보면 162승 97패(62.5%), 비 타이틀전을 포함한 총 전적에선 190승 119패(61.5%)로 모두 이창호가 앞서 있다. 우세한 쪽의 타이틀전 우승확률이 판수 승률이나 전체 승률보다 높은 결과가 나온 것은 앞서 조훈현-서봉수 간의 경우와 똑같다.
③이창호-유창혁 24회
두 사람이 타이틀을 놓고 첨예하게 부딪쳤던 기간은 91년부터 2005년까지 약 15년이었다. 조-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조훈현-이창호 간의 사제대결이 불을 뿜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유창혁은 이창호보다 9살이 많지만 이창호보다 약간 늦게 타이틀 무대에 진입하면서 조훈현과 함께 이창호 왕국 협공의 한 축 역할을 맡은 강자였다.
이창호 유창혁 두 사람은 총 24회에 걸쳐 타이틀을 다퉜고, 그 중 75%에 해당하는 18회를 이창호가 우승했다. 24번의 타이틀 만남 중엔 3번의 국제무대 결승전도 포함됐는데 모두 이창호가 가져갔다.
둘 간의 타이틀전 총대국수는 88국이었고 이창호가 64.8%의 승률(57승 31패)을 기록했다. 생애 전체 대국수는 142국으로 이창호가 95승 47패(66.9%)로 우세했다.
④조남철-김인 20회
한국 바둑역사에서 1인자 계보를 말할 때 1대를 조남철, 2대는 김인을 꼽는다. 이 두 원로는 한국바둑 최초의 세대교체를 놓고 총 20회에 걸쳐 타이틀무대에 마주 앉았다. 요즘과 달리 타이틀전이 귀하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빈번한 ‘만남’이었던 셈이다.
둘 간의 첫 우승다툼은 62년 초 벌어진 제3회 최고위전이었고 조남철이 3대2로 신승했다. 그리고 73년 제1회 최강자전(조남철 2대1 우승)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감했다. 11년에 걸친 ‘시작’과 ‘끝’을 모두 20세 연상의 선배가 장식했던 셈이다.
하지만 전체 성적은 후배인 김인이 앞섰다. 20차례 타이틀 다툼 중 김인이 13회, 조남철이 7회 우승했다. 김인은 타이틀전 총 71국의 대국전적에서도 43승 1무 27패(61.3%)로 우세했다. 비 타이틀전을 포함한 전체전적 역시 108전 70승 1무 37패(65.3%)로 김인이 앞선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⑤조훈현-유창혁 17회
두 기사는 총 17회 타이틀전서 격돌해 통산 최다타이틀전 커플 5위에 올랐다. 이 커플은 위의 4개와 달리 가장 팽팽한 접전 양상을 보인 커플이었다. 17회의 타이틀전을 통해 유창혁이 9회, 조훈현이 8회 우승했다.
두 기사의 타이틀전 역사에는 3개의 국제대회 결승이 포함됐는데 여기서도 유창혁이 2개, 조훈현이 1개를 따냈다. 역시 유창혁이 간발의 차로 조훈현을 앞섰다는 얘기다.
그런데 17번의 타이틀전을 통해 겨룬 총 대국성적이 매우 흥미롭다. 67국을 둔 결과 기막히게도 둘 모두 33승 1무 33패로 정확히 5할 승률을 마크한 것. 88년부터 2002년까지 13년 여 동안 치고받으면서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균형이 유지됐었다는 얘기다.
비타이틀전을 포함한 양웅의 총 대국 성적에선 스토리가 또 바뀐다. 총 124전을 겨뤄 이번엔 조훈현이 70승 1무 53패, 승률 56.9%로 앞선 것이다. 이 시기 1인자는 단연 이창호였다. 그 절대 강자를 틈틈이 타이틀무대 밖으로 밀어내 놓고 두 사람이 밀회(?)를 즐기며 호각의 승부까지 연출했으니, 무슨 애정영화 한 편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최근 인기카드는 이창호-이세돌 전>
요즘엔 타이틀 무대의 주역도 대거 교체됐다. 최근 가장 인기품목으로 꼽히는 커플은 이창호-이세돌의 ‘양이(兩李)’ 카드다. 랭킹 2위권인 이창호는 명인 국수 바둑왕 등 3관왕으로 군림하며 여전히 국내 ‘최대주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세돌은 6개월간의 휴직 탓에 세계타이틀인 비씨카드배 1개뿐이지만 톱랭커 장기집권 태세를 굳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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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이 타이틀을 다툰 것은 모두 6회. 그 중 이창호가 5개를 가져가 일단 8살 연하 후배를 압도하는 중이다. 총 판수에서도 이창호가 14승 10패(58.3%)로 앞서 있다. 비 타이틀전을 포함한 전체성적 역시 이창호가 30승 21패(58.8%)로 리드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베스트 5의 경우와 달리 이들 커플은 앞으로도 잇단 대결이 예상된다. 둘 간의 전적은 2001년 제5회 LG배서의 첫 격돌이후 10년 간 작성된 것인데 아직은 이창호가 35세, 이세돌 27세로 둘 다 젊다. 이세돌로선 유일한 결승 승리였던 2003년 제7회 LG배(3대1) 이후 승첩(勝捷)을 추가할 기회가 많으리란 뜻이다.
당장 두 기사는 8월 1일부터 제6기 물가정보배를 놓고 7번째로 자웅을 겨루게 된다. 이세돌로선 국내 무관(無冠) 신세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 할 입장. 반면 이창호는 이번에 우승할 경우 국내 모든 타이틀을 1회 이상 정복하는 소위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둘 모두 물러설 수 없는 고비에서 맞닥뜨리는 셈이다.
이창호 이세돌과 함께 앞으로 최철한 박영훈 강동윤 박정환 김지석 등 국내 간판스타들 간의 결승전 조합이 빈발할 가능성도 상존한다. 쑥쑥 성장 중인 신예들이 갑자기 타이틀 무대에 뛰어드는 단골이 될 수도 있다.
타이틀전은 앞의 예에서 보듯 팽팽한 5대5의 정상다툼 보다는 1인자와 2인자 간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커플이 앞으로 최정상 1-2인자 자리를 놓고 가장 많이 겨루게 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