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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이 맺어준 또 하나의 커플
 


한국바둑이 세계 최고로 올라서기 시작한 것은 대략 15년 쯤 된다. 바둑하는 나라라야 한 중 일 대만 정도였지만, 그 이전엔 그들 틈에서도 변방국 취급을 받았다. 특히 일본은 기라성 같은 스타 기사들을 거느렸고 타이틀 숫자도 엄청 윤택했다. 기사의 저변 역시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두터웠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우리 바둑계엔 200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 단 하나의 기사 커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한국바둑계의 초라함을 말해주는 단면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이나 중국엔 수 십 년 전 결혼해 꼬부랑 노인이 된 기사부부, 최정상 고수커플, 스승의 사위가 된 프로 등이 즐비했다. 그것만으로도 해외 바둑계는 이야기꺼리가 넘치고 항상 화제가 꼬리를 물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장주주(江鑄久)-루이나이웨이(芮乃偉) 커플이 있긴 했다. 둘은 화장실 빼곤 가는 곳마다 붙어 다닐 만큼 금실 좋기로 유명한 부부다. 둘은 객원도 아닌 정식기사로 등록돼 있다. 하지만 순 토종(土種) 기사 커플은 새 천년을 맞은 뒤에도 한참동안 등장하지 않았다.

2004년도 저물어가려는 9월 어느 날, 드디어 낭보가 전해졌다. 이상훈 9단과 하호정 3단 커플이 결혼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각각 31세, 24세 되던 해였다. 날짜는 2005년 3월 12일. 하호정은 “혼수품 1호는 바둑판”이라 했고, 이상훈은 “결혼하면 설거지 내기 바둑으로 아내를 돕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1호’란 쉬운 게 아니었다. 김영삼 7단과 현미진 3단(이상 당시 단위)이 이상훈-하호정 커플보다 두 달 늦은 11월 결혼 발표를 한 뒤, 뭐가 그리 급했는지 결혼식을 발표 다음 달인 12월에 해치워 버린 것. 결과적으로 이-하 커플은 '국내 1호 부부기사' 자리를 새치기(?) 당한 결과가 돼버렸다.

2004년 여름, 이번엔 우리 바둑사상 최초의 프로기사 국제결혼이란 뉴스가 터졌다. 권갑룡 8단과 부녀기사로 유명한 권효진 4단이 중국 프로기사 위에량(岳亮)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발표한 것. 두 사람은 2005년 5월 한국에서, 그 직후 중국에서 두 번에 걸쳐 웨딩마치를 올렸다. 현재 5단인 위에량은 2007년 한국기원 객원기사 자격을 얻어 국내서 활동 중이다.

또 하나의 국제 커플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김현정 3단과 일본 나카네(中根直行)도 일본에서 잘 살고 있다. 2005년 4월이었다. 김현정은 김효정 2단의 친언니다. 한 번 시작되니까 마치 봇물이 터지듯 프로기사 커플이 속출하더니, 그러나 그 이후 프로기사끼리의 결혼 소식은 다시 뜸해졌다. “누구와 누구가 친하다”, “결혼할 가능성도 있다더라”…는 식의 소문은 많았지만 정작 성사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마추어 강자들인 홍슬기-이승현의 결혼이 유일하게 맥을 이었다.

최근에 터진 이창호-이도윤 커플의 결혼 소식은 모처럼만의 빅 뉴스였다. 이창호는 어쩌다 보니 한국프로기사 노총각군(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어쩌다 성적이 조금 내려가거나, 건강에 약간의 이상 징후라도 보일 경우 팬들은 “결혼만이 해결책”이라고 아우성쳐 댔다.

최근 약 5년 여 동안 이창호의 결혼 문제는 바둑계 최고 이슈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었다. 매년 한 차례 치러지는 바둑대상(大賞) 시상식 같은 무대에 이창호가 올라오면 으레 “올해는 국수 먹여줄 거냐”는 질문이 사회자의 고정 레퍼터리로 등장할 정도였으니까.

그 이창호의 반려자가 될 이도윤씨는 프로기사는 아니다. 하지만 프로기사 직전까지 갔던 연구생 1조의 실력을 가진 바둑인이다. 게다가 약 2년 여 동안 인터넷 바둑사이트(사이버오로)에서 바둑 기자생활을 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을 싹 틔우고 결혼까지 골인하게 된 모든 과정이 바둑의 힘으로 이뤄졌던 셈이다.

꼭 둘이 모두 프로기사여야만 하는가. 이 정도면 만천하 바둑 팬들의 우레 같은 갈채 속에 새 인생을 축복받을 ‘바둑인 커플’ 자격이 충분하다. 같은 의미에서 대만 1인자 저우쥔쉰(周俊勳)과, 프로를 지망해 오랜 연구생 생활을 거쳤던 왕밍완(王銘琬) 9단의 여동생 정수칭(鄭淑卿) 부부도 이 범주에 속한다. 왕리청(王立誠) 위빈(兪斌)의 부인도 입단만 안 했을 뿐 바둑인이었다.

이창호-이도윤 커플의 결혼뉴스 중 가장 화제를 모은 대목은 역시 두 사람의 나이 차였다. 75년 생 토끼 띠인 이창호는 86년 생 호랑이 띠인 이도윤씨 보다 11살이 많다. 이렇다 보니 이창호보다 두어 살 아래 후배들은 자신들보다 거의 10살이나 아래인 여성(그것도 바둑계에서 오며가며 자주 보아온 사이)을 꼼짝없이 형수님으로 모셔야 하게 생겼다.

한 쪽에서 이창호를 향해 X둑X’이란 비난(?)이 터져 나온 것도 당연했다. 물론 친한 동료들의 허물없는 ‘축복성 비난’이다. 하지만 이창호는 그 신중하고 느릿느릿하던 평소 모습과 달리 엄청 발 빠르게, 그리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판단력이나 지혜는 나이대로 가는 게 아니더라. 도윤이는 나보다 훨씬 현명하고 사려 깊다. 우리는 서로 보완하면서 훌륭히 가정을 이끌어갈 것이다.”부러운 김에 예비신랑을 놀리던 동료들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보니 사랑엔 국경이나 나이 따위가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는 건 바둑계라고 다르지 않았다. 중국의 천재기사 뤄시허(羅洗河)만 해도 2003년 결혼한 같은 프로 량아디(梁雅弟)는 신부 쪽이 3살이나 더 많았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뤄시허와 같은 6소룡(小龍) 출신이면서 동갑이기도 한 창하오(常昊)의 경우는 자신보다 8살이나 연상인 장쉔(張璇) 8단과 2000년 결혼, 예쁜 딸 낳고 잘 살고 있다. 일본 고바야시(小林光一)의 첫 아내는 무려 13살 위였던 스승의 딸 레이코(禮子)였는데 훗날 사별했다. 저우쥔쉰의 아내 정수칭도 남편보다 14살이 더 많다.

일본은 프로제도가 가장 오래된 나라답게 장쉬(張栩)-고바야시(小林泉美), 요다(依田紀基)-하라(原幸子) 등 정상급 커플도 상당수 배출됐다. 바둑만으로도 줄잡아 10쌍은 족히 넘고, 체스나 일본장기 등까지 범위를 넓히면 다시 그 2배쯤 된다.

그 중에서도 올해 만 90세인 스기우치(杉內雅男) 9단과 83세인 가즈코(壽子) 8단은 특별한 존재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령 바둑커플임은 분명하고, 타계한 바둑인들을 포함하더라도 부부 프로기사 1호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프로커플 1호였던 녜웨이핑(聶衛平) 9단과 콩상밍(孔祥眀) 8단은 일찌감치 이혼했지만 둘 사이에서 태어난 콩링원(孔令文)은 일본기원 소속기사 6단으로 활동 중이다.

국내 바둑계 일각에선 ‘이창호의 신부’ 이도윤씨의 만만치 않은 바둑실력을 아까워하기도 한다. 지금이라도 입단을 시도할 경우 패스할 가능성이 꽤 높고, 그 경우 색다른 프로커플이 탄생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 하지만 이와 관련된 질문에 이창호는 “본인이 그럴 의사를 갖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했고, 이씨 역시 “기질 상 승부사가 아니라고 생각해 포기했다”고 밝혔다.

긴 시간은 아니었어도 이도윤씨가 겪은 바둑계의 경험은 한국의 ‘국보 기사’ 이창호를 내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씨 자신도 “승부사의 아내로서 항상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모든 지혜를 다 모아 보살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창호 역시 바둑계 출신 ‘어린 신부’를 맞으면서 새롭게 각오를 다지는 모습이다. 오는 10월 ‘어른’이 될 이창호가 펼쳐갈 ‘인생 2막’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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