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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배, 그 15번째 축복의 출발
 

다시 또 시작이다. 세계 최고권위의 국제기전인 LG배 세계기왕전이 15번째 장정에 돌입한다. 장소는 경기도 광주 소재 곤지암리조트. 각국 대표 32명이 스타트라인에 도열, 6월 7일 1회전과 9일 2회전을 거쳐 일단 8강까지를 추려내게 된다.

1996년 출범해 15년에 이르는 역사를 쌓는 동안 LG배는 정통파적 대회진행방식을 고수, 주옥같은 명승부의 산실로 각광받아왔다. 2억 5천만 원이란 거액의 우승상금도 이 대회가 가장 권위있는 국제행사로 인정받게 만든 든든한 장치였다.

요즘엔 다양한 형태의 국제기전이 많이 생겨났지만 LG배에 대한 각국 프로기사들의 애정은 남다른 데가 있다. 중국의 대표적 바둑사이트인 ‘기성도장’은 2009년 봄 세계기전 순위를 매겨 발표했는데 LG배를 단연 1등으로 올려놓았다. “모든 면에서 가장 공평한 대회이고, 상금도 연례대회 중엔 가장 많으며(최근엔 다소 변화가 있었다), 국가별 시드부여 숫자가 합리적이고, 매 라둔드 추첨으로 동국인 대결을 피해 관전 재미를 극대화시킨 점 등 1위 기전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설명이 붙었었다.

대다수 국제기전이 제한시간 축소를 단행한 상황이라 이제 1인당 3시간짜리 국제기전은 LG배가 대표격이다. 지금은 국제표준(?)으로 통용되고 있는 흑번 6집 반의 덤 크기도 1998년 제3회 LG배 때 처음 도입해 국내외 각종 기전으로 확산됐었다.
LG배의 역사는 곧 세계 바둑판도의 역사였다. 첫 우승자가 배출된 97년부터 2001년 까지 초기 5년 간 우승자는 한국 이창호가 3회, 일본 왕리청(王立誠)과 중국 위빈(兪斌)이 각 1회씩 정상에 섰다. 그 당시 동양 3국 간의 세력 균형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였다.


6회 때는 그때까지 3번이나 준우승에 그쳐 ‘준우승 징크스’에 시달렸던 유창혁이 마침내 첫 우승의 염원을 달성했다. 그리고 2003년 7회 때 마침내 이세돌이 등장했다. 세계 최정상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던 이세돌이 완벽한 세계 성주(城主)의 일원으로 공인받은 것이다.

8회 대회까지 8년 간 한국은 총 6회나 패권을 차지했다. 거의 독점 수준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거의 10년 동안 한국이 국제 바둑무대에서 누렸던 지위와 정확히 일치했던 셈. 하지만 ‘한국기사들의 보루’로까지 불렸던 LG배는 2005년 9회 대회부터는 거꾸로 한국바둑에 일대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지난 해 제14회 대회까지 6년 동안 한국기사의 우승은 단 한 차례(2008년 12회 이세돌)뿐이었다.

그 결과 2009년 제13회 대회와 2010년 14회 대회에선 구리(古力)와 쿵제(孔杰) 등 두 중국기사가 교대로 정상에 섰다. 2년 연속 중국 대륙으로 넘어간 LG배를 과연 한국이 찾아올 수 있을까. 6일 실시될 1회전 추첨식이 어떤 대진표를 만들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343명이 제15회 LG배 통합예선에 참가


올해 대회의 기상도는 그러나 한국 측 입장에서 그리 밝지만은 않아 보인다. 중국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 중국의 본선 출전자 수는 무려 16명으로 주최국인 한국(11명)을 압도하고 있다. 나머지 5자리는 일본 4명, 대만 1명으로 구성됐다. 이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은 각국 기사들이 1차적으로 힘을 겨루는 통합예선에서 중국이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 올해 통합예선엔 물경 343명이란 국제대회 사상 최대 인원이 출전했었다.

중국은 11명이 통합예선 관문을 통과, 시드를 갖고 있는 5명과 합류해 16명의 대군단을 형성했다. 한국은 불과 5명만이 통합예선의 혈로를 뚫었다. 한국이 국가시드 6명으로 중국보다 1장이 더 많음에도 총 출전자 수에서 크게 뒤지게 된 이유다. LG배 역사상 총 출전자 수에서 한국이 중국보다 적었던 해는 2006년 제10회(한국 10명, 중국 13명) 때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하지만 미리부터 주눅들 필요는 없다. 언제나 그렇듯 양(量)보다는 질(質)이 중요한 법이다. 한국 바둑을 이끌고 있는 일당백의 고수(高手)들이 격전의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우선 이창호-이세돌의 ‘양 날개‘가 눈길을 끈다. 이창호는 역대 LG배를 4차례나 제패, 이 대회 최다 우승기록을 보유 중이다. 또 두 차례 정상에 섰던 이세돌은 휴직에서 돌아온 뒤 더욱 무시무시해진 화력을 휘두르며 사실상 세계 최강자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다음 주목되는 기사가 국내랭킹 3위 최철한, 5위 박영훈 등 기존 강자 그룹이다. 둘 모두 LG배에선 아직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지만 이미 세계대회 패권 경험이 있는 기사들이다. 세 번째 그룹은 허영호(7위) 안조영(10위) 목진석(12위) 등의 묶음이다. 아직 최정상권엔 이르지 못했지만 언제 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용사들로 꼽힌다. 김지석(8위) 박정환(4위) 등 신예그룹이야 말로 가장 주목되는 기사들. 박정환은 이미 국내 2관왕이고, 김지석도 지난 해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며 최고 엘리트로 떠오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희성(21위) 백대현(49위) 등 ‘다크호스 군단’이 호시탐탐 상위권을 넘볼 태세다.

인해전술로 나오는 중국 진영에선 역시 쿵제(孔杰)와 구리(古力) 양대 에이스가 요 주목대상. 쿵제는 LG배 디펜딩 챔프인데다 중국 공식 랭킹 1위다. 구리도 요즘 다소 슬럼프에 빠져있다곤 하지만 손색없는 우승 후보로 꼽히고 있다. 이 밖에도 창하오(常昊) 왕야오(王堯) 펑첸(彭筌) 왕시(王檄) 퍄오원야오(朴文堯) 천야오예(陳耀燁) 등 강자가 우글거린다. 신구가 잘 조화돼 있어 언제 어떤 선수가 튀어나올지 예상이 어렵다는 게 중국 팀의 강점이다.

일본은 요다(依田紀基) 야마타(山田規三生) 다카오(高尾神路) 이야마(井山裕太) 등 4명이 현해탄을 건넌다. 역시 가장 주목되는 기사는 명인 타이틀 보유자인 이야마. 연전 메이저 타이틀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을 갈아치운 이야마는 한국 강동윤(아깝게 이번엔 뽑히지 못했다), 중국 천야오예와 21세 동갑 라이벌 관계로도 유명하다. 이 밖에 대만은 샤오정하오 1명이 조국을 대표해 출전한다.

▲제14회 LG배 우승자와 준우승자


올해 LG배 통합예선서도 드러났듯 국제바둑계에서 중국세의 기세는 괄목할 만 하다. 올해 초 벌어졌던 14회 LG배 결승에서 이창호가 중국 쿵제에게 0대2로 완패하면서 위기감은 더욱 증폭됐었다. 다행히 그 직후 단체전인 농심배에서 이창호가, 비씨카드배에서 이세돌이 분전함으로써 한국바둑은 위기를 넘기고 건재함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시점에서 시작되는 제15회 LG배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저변의 두터움을 무기삼아 주인으로 들어앉으려는 중국, 이세돌 등 최고 고수 중심으로 세계패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한국 등 두 나라의 흐름 싸움이 불꽃을 튀길 것이다. 또한 어떤 기사가 기성(旣成) 우승후보들의 숲을 헤치고 깜짝 활약을 펼칠지 지켜보는 것도 관전 요령이다. 15번째 주사위는 마침내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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