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명이 LG배 통합예선에 참가
4월 하순 한국기원서 제15회 LG배 세계기왕전 통합예선이 벌어졌다. 장내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한국과 중국의 대결, 여성 진출자 수, 입단 초년병들의 활약 여부 등 ‘관전 포인트’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게 하나 있었으니, 아마추어들이 과연 본선 공략에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초점이었다.
이번 LG배에선 총 8명의 아마추어에게 통합예선 출전권을 부여했다. 그러려면 우선 필요한 것이 아마대표 선발전이다. 한국기원 연구생에게도 LG배 통합예선 출전을 허용키로 한 것은 LG배 사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2005년 제10회 때부터 2009년 14회 대회까지 매년 아마추어 4명이 통합예선에 승선했지만 현역 연구생 아닌 일반 아마추어들로 한정됐었다.
아마대표 선발전은 총 64강 토너먼트 3회전으로 치렀다. 8명을 선발하므로 8대1의 경쟁률이다. 아마추어 상위랭커 1~30위와 연구생 상위 34명(남자 32명, 여자 2명)을 순위에 따라 뽑았다. 그리고 토너먼트를 치른 결과 나현 김정선 민상연 이주형 정두호 강승민(이상 연구생), 김남훈 황인철(이상 아마 강자) 등 8명이 4월 17일부터 시작된 통합예선에 진출했다.
통합예선에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서 활약 중인 유명 프로기사들이 대거 출전한다. 아마추어 기사들로서는 모처럼 그들과 대국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아마추어들의 야심은 단순히 대국만 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웬만한 프로들 정도는 무서워하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 내심 실력으로 본선 진입까지 넘보며 대회에 임했다.
▲아마강자 김남훈!!
통합예선이 진행되면서 그 같은 그들의 야심은 적중되는 듯 보였다. 이주형 나현 김정선 황인철 등이 첫 판서 고배를 들었지만 나머지 네 명은 프로를 잡고 첫 관문을 넘었다. 특히 김남훈 민상연 강승민 등 3명의 활약이 눈부셨다. 강승민은 세 차례나 일본 천원 타이틀을 차지했던 류시훈을 꺾은 뒤 프로 김동희마저 눕혀 조 예선 준결승에 올랐으나 박정상에게 막혀 분루를 삼켰다.
민상연도 권오민, 김영삼과 중국 양딩신까지 한 중 프로들을 상대로 3연승을 내달렸으나 강호 펑첸(彭筌)에게 덜미를 잡혔다. 김남훈 역시 김영환 탄샤오(檀嘯) 등 국내외 강타자들을 딛고 조 4강까지 오르는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마추어의 본선 상륙은 연구생에게도 문호가 개방된 올해에도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LG배를 제외한 다른 대회에선 이미 아마추어의 바람이 상륙했다. 삼성화재배의 경우 1997년 제2회 대회 때부터 아마에게 일부 문호를 개방, 매년 2~5명의 아마기사들이 통합예선에 출전했다. 2008년 13회 때는 6명으로 늘어났고, 처음 연구생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2009년엔 11명이나 참가했다. 그리고 이원영이란 아마가 마침내 32강이 겨루는 본선에 발자국을 찍었다.
올해 만 18세인 이원영은 2009년 10월 연구생 내신성적에 의해 프로로 임관됐다. 아마시절 이원영이 프로들을 상대로 거둔 성적은 5승 5패. 그가 꺾은 상대 중엔 권오민 한상훈 강지성 한웅규 홍기표 등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망라돼 있다.
연구생들에게 문호를 연 첫 국제대회는 2009년 제1회 비씨카드배였다. 대거 15명의 아마가 통합예선에서 프로들 틈에 섞여 경쟁한 결과 이지현 전준학 정찬호 홍석의 김정현 등 5명이 본선에 상륙했다. 그 중 최고의 스타로 올라선 기사는 이지현이었다.
이지현은 본선에 올라가서도 첫 관문을 통과했다. 세계 32강 대열에 당당히 합류한 것이다. 그가 1회전서 눕힌 선수는 중국이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주니어 멤버 중 한 명인 스위에(時越)였다. 금년 18세인 이지현 군도 현재 신분은 프로다. 해를 넘겨 올해 4월 연구생 내신 성적에 의해 프로 초단이 된 것.
올해 벌어진 제2회 비씨카드배에서도 아마 돌풍은 계속됐다. 출전자 15명 중 5명이 본선에 올랐다. 가장 좋은 활약을 보인 기사는 한태희. 통합예선에서 남치형 최창원 유재호 쯔루야마를 제치고 4연승, 본선에 진출했다. 그리고 바로 그 대목서 바둑사에 길이 남을 사건(?) 하나를 저질렀다. 첫 판서 이창호를 눕힌 것이다. 새해 벽두 이창호가 아마추어에 패해 1회전서 탈락했다는 쇼킹한 뉴스의 진원지가 바로 한태희였다.
한태희 돌풍은 2회전서 안조영에 의해 진압, 더 이상 뻗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93년 생으로 아직 만 17세에도 못 미치는 한태희는 대(對) 프로전적 5승 3패를 기록하면서 연구생 1조 랭킹 3위로 묵묵히 정진 중이어서 머지않아 프로 무대에 발을 들여놓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앞에 열거한 사례들은 모두 현역 연구생이거나, 연구생 시절의 활약상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만 19세까지 프로에 입단하지 못하면 연구생에서 퇴출된다. 연간 프로에 입단하는 숫자는 고작 10명. 일반인 대회 2명, 연구생 대회 1명, 여류 대회 2명, 지역연구생 중 1명, 연구생 리그(내신 성적)를 통해 2명이 프로로 배출된다.
▲박영롱 아마7단
워낙 좁은 문이다 보니 이 범위에 못 든 채 만 19세를 넘겨 퇴출된 아마기사들이 또한 부지기수다. 바둑계에선 이들을 가리켜 ‘퇴출 아마 고수’들이라고 부른다. ‘퇴출’이란 불명예스런 이름이 붙어있지만 이들의 실력은 대단하다. 이 그룹에서 요즘 가장 괄목할 만 한 활약을 보이는 기사가 박영롱(21)이다.
박영롱은 2008년 4월 나이 제한에 걸려 6년 여 동안 머물렀던 한국기원 연구생에서 퇴출당했다. 당시 랭킹은 1조 8위. 하지만 올해 박영롱은 국제대회인 비씨카드배, 국내 행사인 명인전과 KT배 등 3개 기전서 무서운 기세로 본선 진입에 성공했다. 어지간한 프로들도 못 이룰 대업을 이뤄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프로들이 수모를 당했다. 박영롱은 이상훈(9단) 이형로 서무상 최철한 최원용 이춘규 권형진 등을 꺾으며 프로기사와의 통산 전적에서 무려 승률 8할(8승 2패, 4월 23일 현재)을 기록 중이다. 누구보다도 현역 세계챔프이자 2관왕인 최철한을 명인전서 이긴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2패는 모두 박영훈에 의해서만 기록됐다.
프로 입단관문이 지나치게 좁으므로 입단대회와 별도의 프로진출 기회를 확충해줘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한국기원은 2009년 7월 이사회에서 ‘입단 점수제‘를 통과시켰다. 아마추어가 프로 기전에 출전, 소정의 성적을 얻을 경우 입단점수를 부여하고, 그 점수가 5점이 되면 입단대회와 관계없이 프로로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입단 점수제의 구체적 배점은 국제대회 64강이 1점, 32강이 2점, 16강에 오르면 3점을 준다. 8강 이상까지 올라갈 경우 5점을 부여해 곧바로 입단하게 된다. 국내 대회 중 명인전의 경우 통합예선 결승 진출시 1점, 본선 진출 시 3점이고 4강까지 오르게 되면 프로 면장(免狀)을 수여한다. 신설된 KT배는 본선 4라운드 진출 때 1점부터 시작해 8라운드까지 오르면 5점을 얻게 된다.
이 방식에 가장 접근해 있는 아마기사가 바로 박영롱이다. 박영롱은 현재 입단 점수 2점을 획득해 놓고 있다. 만약 박영훈과의 명인전 예선 결승서 이겼더라면 2점을 더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마 팬들로부터 많은 아쉬움을 샀다.
이들 외에도 연구생 그룹에서 나현 박준석 채민혁 등 상위 멤버와 송홍석 김현찬 유신환 이상헌 유병용 함영우 등 퇴출 아마강자 최상위권 기사들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 올해 15세에 불과한 나현 군은 이지현이 프로로 전향한 이후 연구생 1조 1위 자리를 지키면서 내일의 대기(大器)로 안팎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아마들에게 프로기전은 피안(彼岸)의 별세계였으나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연구생에 몸담고 있건, 연구생에서 쫓겨난 신세이건 열심히 연마해 소정의 실적을 올리면 최종 목표인 프로진입이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창호 최철한 조훈현 등 당대 최고의 프로 맹장들조차 넘어갈 정도로 가공스런 파괴력을 보이고 있는 아마추어들. 단순한 32강 정도가 아니라 이들이 국내, 국제전 결승 자리에까지도 치고 올라오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이 요즘 바둑계다.
아마추어란 이유만으로 발이 묶인 채 한숨 쉬던 아마들에겐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팬의 입장에서도 또 다른 구경꺼리 하나가 더 늘었으니 즐거울 뿐이다. 내년 LG배에선 더 뛰어난 아마추어가 등장해 판을 더 흥겹게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