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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바둑의 요람 후지쓰배, 올해 성적은?
 
▲제22회 후지쯔배 이창호 9단의 착수모습


제23회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가 4월 9일 도쿄 일본기원에서 막을 올린다. 요즘엔 국제기전이 꽤 늘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후지쓰배는 여러 측면에서 특기할 만한 사연들을 갖고 있다.

우선 후지쓰배는 세계 최초의 국제대회로 기록되고 있다. 1988년 출범, 잉창치배에 한 발 앞서 창설돼 ‘1호’의 영예를 누렸다. 대만 재벌 잉창치씨가 잉씨배를 만든다는 소문이 나자 세계 바둑의 리더를 자임하던 일본이 서둘러 후지쓰배를 먼저 론칭시켰다. 아무튼 후지쓰배는 이후 올해까지 23회란 최다 회수를 기록하면서 굴지의 세계기전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에선 이후 후지쓰배에 이어 CSK아시아대항전, 도요타덴소배 등 국제 타이틀전이 이어졌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대형 기전으로 기대를 모았던 도요타덴소배는 모기업의 운영문제로 인해 2009년 4회 대회를 끝으로 중단돼 버렸다. 후지쓰배는 이제 일본 주최의 유일한 기전으로 남은 것이다.

일본 주최 국제기전의 잇단 폐지는 일본기원 소속기사들의 성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후지쓰배의 경우 일본 기사들은 1회부터 5회까지 5년 연속 우승하는 등 초강세를 보였으나 이후 17회 동안 정상에 오른 회수가 단 한 차례에 그쳤을 만큼 부진했다.
이처럼 자국 기사들이 부진하자 일본 스폰서들은 더 이상 대회를 열어갈 의욕을 잃고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런 상황에서 후지쓰배는 일본 바둑의 급전직하에 구애됨 없이 초지(初志)대로 면면히 이어져 온 대회였다.
▲제22회 후지쯔배 생애 첫 세계대회 결승에 오른 강동윤 9단


그렇다면 일본 바둑에게 그토록 기를 못 펴도록 한 나라는 어디였을까. 바로 한국이다. 한국은 93년 제6회 대회 때 유창혁이 우승한 것을 신호탄으로 후지쓰배의 ‘한국 땅 만들기’작업에 들어갔다. 한국 기사들은 후지쓰배 22년 간 총 14회에 걸쳐 우승, 주최국 일본(6회)과 중국(2회)을 압도하고 있다.

특히 98년 제11회 때부터 2007년 20회까지 10년 동안엔 10연패(連覇)라는 세계 바둑사상 유례가 없는 기록까지 추가했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대 기록으로 평가된다. 10년 연속 특정 국가 기사에게 꼬박꼬박 우승상금을 바치면서도 묵묵히 대회를 이어온 후지쓰배 관계자의 꾸준함과 인내심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아무튼 ‘출세’했던 한국기사 치고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10년 사이 후지쓰배를 한 두 번쯤 거점 삼지 않았던 기사는 드물 정도다. 조훈현 이세돌이 3번, 유창혁 이창호 박영훈 등이 2번 우승했다. 일본과 중국은 한국 기사들의 우승을 장식해주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던 셈이다.

한국의 후지쓰배 연패(連覇)는 일단 10에서 머물렀다. 2008년 제21회 대회 패권이 중국 구리에게 넘어가면서 연속우승 기록이 일단 깨졌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우승컵은 어김없이 한국으로 되돌아 왔다. 강동윤이 이창호와 결승을 펼쳐 생애 첫 우승을 장식한 것. 이게 작년의 얘기로, 현재 후지쓰배 보유자는 바로 강동윤이다.

이런 상황에서 4월 10일부터 올해 제23회 대회가 개막된다. 출전자 T.O. 24명의 국가별 분포는 한국 8, 일본 7, 중국 5, 대만 유럽 북미 남미 각 1명으로 짜였다. 전년도 1~3위인 강동윤 이창호 박영훈이 규정대로 자동출전권을 차지하면서 한국이 주최국 일본보다도 1명 많아졌다.

자동출전자 외에 이세돌 최철한 김지석은 국내 랭킹순으로 우선 선발된 케이스. 한국기원은 나머지 2 자리의 주인을 가리는 국내 선발전을 실시했다. 국내 랭킹 8~15위 기사 8명이 토너먼트를 펼친 결과 목진석과 박정환 2명이 마지막으로 후지쓰 본선행 열차에 승선했다.
▲제22회 후지쯔배 박영훈-창하오 3,4위전 전경

한국기사 8명의 면면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이창호는 23년 간 후지쓰배를 치르는 동안 올해까지 21회 참가한 터줏대감이다. 2차례 우승 외에 준우승도 3회나 차지했다. 이세돌은 10번째 출전이고, 9번째 후지쓰 땅을 밟는 박영훈은 이 대회 두 차례 우승을 발판삼아 세계적 기사로 성장했다.

역시 후지쓰에서 첫 세계제패를 맛본 디펜딩 챔프 강동윤의 목표는 당연히 2연속 우승이다. 한 차례 준우승 경력의 최철한, 한 번 3위에 올랐던 목진석도 이번 대회를 단단히 벼르고 있다. 첫 출전의 김지석 박정환의 각오도 물론 남다르다.

한국 전사들과 패권을 다툴 상대 기사들은 어떤 얼굴일까. 중국에선 랭킹 1-2위 쿵제와 구리가 나란히 출전한다. 또 한 명의 중국 간판스타인 창하오도 출사표를 던졌다. 이밖에 퍄오원야오(박문요)와 추쥔이 가세한다. 이들 셋의 현재 중국 랭킹은 각각 7위, 10위, 11위다. 사실상 최강의 진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올해엔 최근까지 선발전을 거행해 이시다(石田芳夫) 다카오(高尾神路) 사카이(坂井秀至) 등의 선수를 선발했다. 과거엔 대회가 끝나기 무섭게 일찍 차기 대표선수를 선발했었으나, 성적이 좋지 않자 올해는 최대한 예선일자를 늦췄다.
대회 개막일 가까운 시점에 최상의 컨디션을 갖춘 기사를 뽑기 위한 조치다. 대만 대표로는 한국기원서 입단한 뒤 귀국한 그곳 1인자 천스위안(陳詩淵)이 출전한다.

한국 바둑은 2000년대 중후반까지 10년 넘게 세계를 지배하다가 이후 중국의 맹렬한 추격을 받으면서 주춤하고 있다. 세계타이틀 판도를 보면 한국이 잉씨배(최철한) 후지쓰배(강동윤) 및 단체전인 농심배 등 3개, 중국이 LG배(쿵제) 삼성화재배(쿵제) 춘란배(창하오) 도요타덴소배(구리) 비씨카드배(구리) TV아시아선수권(쿵제) 등 6개를 갖고 있다.

이 중 도요타덴소배는 이제 계산에서 빼야하고, 비씨카드배도 한국에 돌아올 공산이 높아졌다. 그렇다면 현 시점의 전황은 한 중 양국이 팽팽한 접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한국으로선 현재 보유 중인 후지쓰배를 빼앗길 경우 졸지에 열세로 빠져들게 된다. 후지쓰배에 앞서 3월 하순 개막된 춘란배와 함께 후지쓰배가 올 상반기 세계판도를 가늠할 척도가 될 전망이다.

제23회 후지쓰배는 4월 9일 개막식 겸 대진추첨을 실시한 뒤 10일부터 본격적인 레이스에 돌입한다. 10일 24강이 겨루는 1회전, 12일 16강전(2회전)을 치른 뒤 14일 8강으로 압축하는 일정이 확정돼 있다. 그 뒤의 스케줄은 차후 결정된다.

1988년, 제1회 후지쓰배가 열렸을 때 본선 24명의 멤버 중 한국 기사는 조훈현 서봉수 장두진 등 단 3명뿐이었다. 그나마 조훈현은 고바야시(小林光一)에게, 서봉수는 린하이펑(林海峰)에게, 장두진은 마샤오춘(馬曉春)에게 져 약속이나 한 듯 1회전에서 전원 탈락했었다. 한국 바둑의 ‘후진성’을 확인하는 씁쓸한 ‘최초의 세계기전’이었다.

바로 그 마당에서 한국은 이후 10년 연속 태극기를 꽂는 등 최다 우승국으로 발돋움했고, 현재도 우승컵을 보유하고 있으며, 올해 참가국 중 가장 많은 8명의 기사가 무대를 점령했다. 어느 새 한국의 텃밭으로 탈바꿈한 후지쓰배가 그 무대다. 올해도 한국의 전사들이 이 같은 전통을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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