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경기에선 예정됐던 선수가 중도에 다른 선수로 교체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바둑은 어떨까. 스포츠보다는 훨씬 적지만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당초 멤버가 다른 선수로 바뀌는 경우가 몇 차례 발생했다. 자료를 뽑아본 결과 이번 제18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까지 모두 4개의 사례를 발견했는데 그 사연은 각각 달랐다. 시간 순으로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①제6회 농심배(2004~2005년)때의 장쉬
농심배는 한 중 일 3개국서 5명씩 나와 마지막에 1명이라도 남는 나라가 우승하는 국가 연승제 방식의 대회다. 2라운드 최종국(2004년 11월 29일)서 이창호가 중국 뤄시허를 꺾음으로써 한국 1명, 일본과 중국이 각 2명씩 남은 상황에서 2라운드가 종료됐다.
최종 3라운드는 2월 23일 상하이에서 속개됐는데, 그 이전에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의 다음 주자(4번)로 예정돼 있던 가토 九단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당시 일본기원 이사장이기도 했다. 가토의 자리는 장쉬 九단이 이어받았다. 이창호 九단은 장쉬를 꺾어 2연승했고, 여세를 몰아 왕레이(중국) 왕밍완(일본) 왕시(중국)까지 제쳐 5연승하며 바둑사에 남을 유명한 역전 우승을 완성했다.
농심배 출전기사 명단은 대회 개막에 앞서 주최측에 통보가 된다. 따라서 엄밀하게 따지자면 대체선수를 인정하지 않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각국에서 최고의 선수들을 임의로 선정, 출전시키는 이 대회 성격에 비춰볼 때 사망한 기사는 기권패로 처리하는 게 옳다고 주장할 분위기는 아니다. 혹시 가토가 1승이라도 거둔 상태에서 사망했더라면 좀 애매해질 뻔 했다.
②제15회 TV아시아선수권(2003년)때의 장주주
TV아시아선수권대회는 한 중 일 3개국의 TV 속기 타이틀전 우승 및 준우승자들 6명에 전기(前期) 대회 우승자를 포함해 7명이 토너먼트로 우승자를 가리는 미니 국제기전이다. 소규모이긴 하지만 빠른 템포로 속기왕을 뽑는 행사여서 인기가 높다.
이 대회의 한국 대표 선발은 KBS바둑왕전 우승 및 준우승자에게 주어진다. 이창호가 우승, 이상훈 七단(당시)이 준우승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런데 이창호가 전기(前期) 우승자로 자동 출전권을 가지고 있어 중복 출전권을 지님으로써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고 6명으로 토너먼트를 치르는 것은 대회 전통과 관례에 어긋난다.
이 대회 공동 개최자인 동양 3국은 숙의 끝에 나머지 출전권 1장의 권리가 한국에 있다고 정리했다. 이렇게 해서 그해 21기 KBS바둑왕전 3위 입상자인 장주주 九단이 TV아시아선수권 출전의 행운을 잡았다.
하지만 이 처리 역시 개운치는 않았다. 국제대회가 ‘전기시드’와 ‘국가시드’ 제도를 함께 운용하는 데는 다 그럴 만 한 이유가 있다. 전자는 전년도 성적을 기준해 대회 권위를 살리려는 뜻이고, 후자는 국가별 안배로 국제대회 골격을 갖추겠다는 뜻이다. ‘전기 우승자’ 시드는 국가 아닌 지난 번 대회 성적 우수자에 대한 우대 개념이란 뜻이란 의미다. 그렇다면 이 경우엔 전기 준우승자에게 출전권을 주는 게 옳지 않았을까. 14회 TV아시아선수권 준우승자는 조훈현이었다.
③제18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2013년)
LG배도 전기(前期) 우승자 및 준우승자에게 대회시드를 부여한다. 국가별로 주는 국가시드 중 한국에 할당된 티켓은 5장이다. 전기(17회) 1-2위 기사인 중국 스웨와 원성진이 대회시드를 받았다. 국가시드는 4월 랭킹 1~5위인 이세돌 박정환 김지석 박영훈 조한승에게 돌아갔다.
6위 최철한, 9위 강동윤은 통합예선에 나가 힘들게 싸워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7, 8위에 랭크된 백홍석과 원성진은 군 복무중이었다. 대회 개막이 한 달 앞으로 임박한 시점에 군 기관이 대회시드를 가진 원성진의 ‘출전 불가’ 방침을 최종 결정했다. 한국기원 측은 회의를 열어 차순위자(4월 랭킹 10위)인 이영구가 대체 출전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대회시드를 해당 선수 소속국의 권리로 간주하는 결과가 된 것은 앞의 예들과 흡사하다. 전기(前期) 준우승자가 사정상 못 나온다면 대회시드의 뜻을 살려 지난 해 순위로 승계자를 뽑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이게 생각보다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17회 LG배 4강은 스웨 원성진 강동윤 최철한인데, 뒤의 두 한국기사는 이미 통합예선을 통해 본선행 티켓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8강까지 내려가다 보면 나현 리캉 렌샤오 이영구가 남는다. 이들 중 누구에게 대회시드 승계권을 주어야 할지 난관(?)에 봉착한다. 앞으로 각국 국제대회는 시드와 관련해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규정을 마련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④제25회 TV아시아선수권(2013년)
이 대회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전기 우승자로 자동출전권을 지닌 기사는 한국의 백홍석. 하지만 역시 현역 군인이란 사실이 걸림돌이 돼 출전 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렇다면 백홍석이 비운 자리는 누가 채울 것인가. 이번에도 일본과 중국은 백홍석의 소속국인 한국에게 결정을 위임했다.
대회시드의 취지를 살려 전년도 성적개념으로 승계자를 뽑는다면 전기 준우승자인 중국 쿵제에게 차례가 돌아가는 게 맞는다. 쿵제는 21~23회에 걸쳐 이 대회 3연패(連覇)를 기록했는데, 올해 CCTV 속기전에선 왕시와 장웨이제에게 밀려 출전권을 따내지 못했다.
한국에선 백홍석의 ‘대타’로 이세돌을 선정했다. TV아시아선수권 출전 기준 대회인 KBS바둑왕전서 박정환과 이창호에 이어 3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퀴즈(?) 하나가 더 남았다. 이 대회는 7명 토너먼트이며, 전기 우승자 1명에게 4강 직행(直行) 특권을 부여한다. 전기 우승자가 빠진 상황에서 4강 직행 특권은 누가 차지할까. 한국의 KBS 우승자인 박정환으로 결론이 났다. 백홍석이 여러 동료에게 좋은 일(?)을 한 셈이다.
대타 출전 기사들의 성적
제6회 농심배에 고인이 된 가토 대신 출병한 장쉬는 앞서 말한 대로 ‘이창호 대첩‘의 조연에 그쳤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장쉬는 일본을 대표할 만 한 최고기사 중 한 명이었다.
제15회 TV아시아선수권 때 이창호의 분신(?)으로 기용된 장주주의 성적도 신통치 못했다. 1회전서 중국 저우허양을 만나 패해 대진표에서 사라졌는데, 저우허양은 그 후에도 연승가도를 달린 끝에 우승했다.
이번 제18회 LG배서 이영구가 거둔 성적은 1승 1패. 1회전서 대만 대표 샤오정하오를 눌렀으나 2회전서 일본 1인자 이야마에게 패배, 16강까지 진출했다. 평작(平作)의 성적표지만 그나마 지금까지의 대타 출전선수 중 가장 좋다.
다가올 제25회 TV아시아선수권서 백홍석의 ‘아바타‘로 출격할 이세돌이 어떤 성적표를 받아들고 귀국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