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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성진과 군복무와 LG배






















이미 보도된 대로 제17회 LG배 세계기왕전 패권은 한국의 원성진 九단과 중국의 스웨(時越)五단 간의 결승 3번기로 결정나게 됐다. 최근 4년 동안 중국기사들이 이 대회 우승을 독차지해 온 상황이어서 원성진에 쏠린 기대는 과거 어느 해보다도 크다. 결승전은 2013년 2월 18일 시작돼 20일 또는 21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원성진이 2013년 1월 7일 입대하기로 입영 통지서까지 받아놓은 상황이기 때문. 그가 지원해 복무하게 될 곳은 해군이다. 원성진과 함께 허영호 백홍석 윤준상 강창배도 같은 날 같은 부대 입영이 결정돼 있다. 해군 과 한국기원 모두 역사상 처음 있는 특기병 입대다.

주목할 점은 입영 후 훈련이 7주일에 걸쳐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LG배 결승전 기간과 훈련기간이 딱 겹쳐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기원 규정엔 현역 입대한 기사의 경우 단체대회 및 세계대회엔 출전할 수 없고, 국내 개인전만 해당 부대장의 허락이 있을 경우에 한해 출전이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다.

해군 입대의 연령 상한선은 만 28세다. 원성진은 85년 7월생이므로 2013년 7월까지는 입대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해군 측과 한국기원, 원성진 측이 교감을 나눈 끝에 입대를 2개월가량 늦추는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났다. 입대 제한 나이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민간인 신분’으로 세계대회 결승전을 치를 수 있는 ‘묘수’다.

그런데 또 하나 문제가 불거졌다. 중국이 주최하는 국제대회인 제9회 춘란배가 그 무대다. 원성진은 여기서도 8강에 진출해 있다. 오는 12월 4일 벌어질 중국 장웨이제(江維杰)와의 준준결승서 승리하면 이틀 뒤 이세돌-중국 퍄오원야오(朴文堯)전 승자와 준결승을 갖게 돼있다.

만약 이 두 판을 모두 이길 경우엔 결승에 오르게 된다. 결승전은 아직 장소와 일정 모두 결정돼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내년 3월 이후, 그러니까 원성진이 해군 병사로 복무를 시작한 뒤에 치러진다는 사실이다. 장소 역시 중국 주최 대회인 만큼 한국 아닌 해외에서 열릴 공산이 훨씬 더 크다.


이겨 올라갈수록 고민스러운(?)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원성진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으나 개화(開花) 시기는 또래 경쟁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다. 첫 종합기전 국내 우승인 제12기 천원전 제패가 22세, 첫 세계제패(제16회 삼성화재배)는 26세 때인 작년 말에야‘ 이뤄졌었다.

승부를 직업으로 하는 프로기사들의 절정 연령은 통계적으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이다. 통상적인 군 복무 연령과 거의 일치한다는 얘기다. 뭔가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군 생활을 맞게 되면 환경적으로 바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쇠퇴한다는 게 젊은 프로들의 두려움이다. 실제 그런 예가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적령기 프로들이 입대를 서둘지 않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둑을 통해 국위 선양에 성공할 경우 합법적인 병역특례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최고조의 나이에 군 생활 대신 바둑에서 성취를 이루고, 그것이 병역 특례로 이어지는 코스를 목표로 삼는다는 뜻이다. 바둑계에선 이런 케이스가 지금까지 총 7명 있었다.

병역 특례 요건도 시대와 함께 변화했다. 바둑은 2008년까지는 예술로 분류됐으며 당시 병역 특례는 동양증권배와 잉씨배, 후지쓰배 등 3개 국제대회 우승 및 준우승자로 한정됐다. 여기에 해당돼 병역 특례를 누렸던 기사가 이창호 박영훈 최철한 박정상 송태곤 등 5명이다. 이들은 한국기원서 대국하는 것으로 군 복무를 대체했다.

2009년 이후 바둑이 스포츠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병역 특례도 스포츠 경기에 준해 변경됐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올림픽 금 은 동 메달로 대상이 바뀐 것. 이 규정에 따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박정환과 조한승이 혜택을 봤다(조한승은 현역 복무 중 출전, 금메달 획득에 일조함으로써 1년 정도 조기 전역 조치됐다).

2014년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엔 바둑종목이 포함되지 않았다. 올림픽에서 바둑이 치러진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현 시점에서 프로기사들이 현실적으로 병역 특례를 기대할 여지는 거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원성진의 경우 ‘핀트’가 좀 어긋났다는 느낌을 누구나 가질 것이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뒤늦게 펄펄 난다는 얘기가 나올 만하다. 이런 저런 특례가 주어지던 시기에 지금과 같은 호성적을 거두었다면 그는 일찌감치 병역 의무에서 자유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입대를 앞둔 원성진은 “마침내 군에 입대한다고 생각하니 설렌다. 색다른 환경에서 몸과 마음을 단련해 더 뛰어난 승부사로 거듭 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함께 복무에 들어갈 백홍석 허영호 윤준상 강창배 등도 비슷한 각오다. 군대가 프로기사들의 무덤이 아닌 요람임을 보여주겠다는 분위기다.

20대 중, 후반의 많은 나이에 입대하는 프로기사들의 심리를 헤아리기란 어렵지 않다. 성취욕과 초조감이 잇단 입영 연기를 부른 것이다. 그들은 병역 자체를 두려워한 게 아니라 시간의 단절과 그것이 가져올 쇠퇴를 두려워했고, 그러다 보니 그 나이까지 왔다.

사실 병역을 마치고 제대한 뒤 더 좋은 성적을 올린 기사들도 적지 않다. 제대 이후 국내 최고(最高) 최고(最古) 타이틀인 국수에 오른 조한승 九단이 좋은 실례다. 옥득진 六단은 군에 다녀온 직후인 2005년 제39기 왕위전 도전권을 획득, 입대 전의 성적을 훨씬 능가하는 실적을 보여주었다.

해군은 바둑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진 집단으로 바둑계에 알려져 있다. 특기병이라고 해서 부대 안에서 별도의 특혜가 주어지진 않지만 최대한 배려해 준다는 소문이다. 이들은 부대 안 장병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면서 주요 대국에 출전한다. 바둑특기자 운용계획과 관련해 해군이 한국기원에 발송한 공문엔 ‘국내대회 연 4회’ 및 ‘국내대회 성적 우수자에 대한 국제대회 참가기회 부여’란 대목이 있다.

바둑과 병역을 이어주는 최선의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프로기사 중 최초로 해군에 입대했던 손근기(25) 四단이 지난 4월 제대했고 현재도 홍민표 七단 등 5명의 프로가 모범적으로 복무 중이다. 이들은 해군에 특기자 제도가 도입되기 전 입대한 기사들로, 휴가를 이용해 각각 일부 대회에 출전해 왔다.

군 복무는 대한민국 건강한 남성의 표상이다. 의무이기도 하지만 결격 사유자들은 누릴 수 없는 신성한 권리이기도 하다. 군대는 아무나 받아주지 않는다. 현재 40대 이상 중장년 연령층의 프로기사들에겐 병역 특례제도가 아예 없었다. 그래도 모두 씩씩하게 복무하고 화려한 성적을 작성했었다.

우리 바둑계의 개척자로 추앙받는 고 조남철 九단은 6.25 전쟁 때 부상을 당한 상이용사였다. 온 힘을 기울여 쓴 바둑원고를 부인에게 맡기고 비장한 마음으로 입대했다. 김인 九단은 육군 본부에서 복무했다. 조훈현 九단은 입대하기 위해 10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공군 장병으로 만 3년을 채웠다. 그 밖의 기사들도 대부분 병영 시절에 대한 특별한 추억과 향수를 가지고 있다.

원성진이 내년 1월 LG배 결승전 관문까지 통과, 세계를 제패한 모습으로 해군 제복을 입었으면 하는 게 모든 바둑 팬들의 바램이다. 중국의 LG배 4년 통치를 한국의 신병(新兵) 대기자가 종식시킨다면 얼마나 멋진 ‘그림’이 되겠는가. 춘란배 역시 나중 문제를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12월 초에 벌어질 8강, 4강전에서 최선을 다 해 싸워 이기고 나면 어떤 형식으로건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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