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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번째 LG배의 문을 열며
 

어느덧 17번째 LG배 세계기왕전을 맞이한다. 6월 17일 대진추첨 겸 개막식을 신호탄으로 18일 본선 32강전, 20일 16강전이 거행된다. 장소는 곤지암 리조트. 11월 8강전 및 준결승을, 그리고 2013년 2월 결승3번기를 치르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있다.

돌이켜 보면 LG배 만큼 고집스런 국제기전도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징크스라면 세계 어떤 기사에게도 2년 연속우승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전통이다. 우승 이듬해 또 결승에 올랐던 기사는 13회 때의 이세돌과 15회 때의 쿵제(孔杰) 단 2명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우세 예상을 뒤엎고 준우승에 머물러 연속우승에 실패했다. 2연패는커녕 같은 기사가 우승 다음 해 연속 결승에 진출하는 것에도 매우 인색했다. 총 4회로 LG배 최다 우승자인 이창호도 이듬해엔 결승고지조차 밟아보지 못했다.

다른 기전에선 연패(連覇)가 꽤 많이 나온다. 이창호의 경우 삼성화재배에서 3연패(連覇)를 기록했고 동양증권배와 춘란배서도 2년 연속 정상등극에 성공했다. 일본의 노장 다케미야(武宮正樹)는 젊은 시절 TV아시아선수권대회 창설과 함께 1회부터 4회 대회까지 4기를 연속 제패해 국제대회 최다 연속우승 기록을 세웠다.

LG배의 또 다른 징크스는 다양한 국가에게 우승을 허용해 왔다는 것. 지난 해 16회까지 한국이 7회, 중국 6회, 일본 2회, 대만 1회 우승했다. 동양 바둑4강이 고루 패권을 나눠 가진 국제대회는 오직 LG배 뿐이다. 일본과 대만이 하락하고 한-중 대결이 심화되가고 있는 추세여서 이 기록은 보기보다 꽤 오래 지속될 전망이다.

우승컵이 한번 둥지를 들면 그 나라를 쉽게 떠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지금까지 LG배가 이어온 전통 중 하나였다. 한국은 2001년 5회 대회부터 4년 연속 패권을 가져갔고, 중국도 2008년 13회 이후 16회 대회까지 4연패(連覇)를 작성 중이다. 만약 이번 대회서도 중국이 수성(守成)에 성공한다면 5년 연속 우승이란 대회 신기록이 수립될 판이다.

올해 17회 LG배의 관전 포커스는 그래서 한국의 반격이냐, 중국의 5연패(連覇)냐로 모아진다. LG배 외에도 최근 여러 무대서 두 나라가 치열하게 경합 중인 상황이지만, 4년 연속 중국기사에게 안방을 내주는 역할만을 해 온 LG배로선 특히 와신상담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일단 병력 측면에서 올해도 전망이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출전 숫자에서 중국에 뒤지기 때문이다. 본선서 싸울 총32명 중 한국이 10명인데 반해 중국 소속기사는 무려 17명에 이르는 것. 본선의 나머지 5자리는 일본 4명, 대만 1명의 기사가 채운다.

중국이 압도적으로 많은 본선 멤버를 확보하게 된 것은 통합예선 결과 때문이다. 총 16자리를 놓고 각국기사들이 겨뤘던 통합예선에서 중국은 전체의 75%에 이르는 12자리를 독차지했다. 한국은 단 4명이 예선관문을 뚫었을 뿐이다. 1년 전 16회 때 한국 11, 중국 5명이었던 구도가 단숨에 뒤바뀐 것이다. 한국은 국가시드(예선 면제에 의한 자동출전자) 수에서 중국보다 1명 많은 6명을 배정 받았지만 통합예선 참패가 전체 ‘병력 열세’로 이어졌다. 일본과 중국은 통합예선서 전멸하고 국가시드로만 출전한다.

올 들어 중국바둑의 기세는 놀랄 만 하다. 연초에 벌어졌던 제16회 LG배 결승서 중국 장웨이지에(江維杰)가 한국 이창호를 2대0으로 누르고 우승컵을 가져간 것이 가장 상징적인 사건. 국가대항 단체전인 농심배와 초상부동산배, 여자단체전인 황룡사쌍등배 등도 모조리 중국으로 넘어갔다. 비씨카드배, 바이링배 등 국제대회 통합예선은 중국의 나이 어린 신예들의 ‘리사이틀 무대’였다.

하지만 숫자가 많다고 언제나 대세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LG배를 통해 움츠렸던 한국바둑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지난 몇 년 간 ‘중국기사 아지트’ 구실을 했던 LG배 자체의 명예도 회복해야 한다는 게 우리 바둑팬들의 기대다. 그리고 그런 기대가 이뤄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한국기사로는 세계 1인자 이세돌(29)과 LG배 최다우승자 이창호(37) ‘투톱‘이 일단 눈에 띤다. 또 한국바둑의 미래 박정환(19), 잉씨배 보유자 최철한(27), 삼성화재배 보유자 원성진(27), 천재기사 강동윤(23) 등 6명이 국가시드로 본선무대에 상륙해 출발 총성을 기다리고 있다.

통합예선을 통과한 한국기사는 이영구(25) 박승화(23) 최기훈(23) 나현(17) 등 4명. 이영구는 현재 물가정보배 타이틀 보유자이면서 랭킹 최상위 10명 안에 드는 강호다. 박승화는 지난 해 LG배 본선 1회전서 우승후보 천야오예(陳耀燁)를 눕혔던 기세 재현이 기대된다. 입단 7년차인 최기훈 역시 2007년 13회 대회에 이어 4년 만에 돌아온 LG배‘단골 멤버‘다.

LG배에 처음 상륙한 막내 나현에 대한 기대는 다른 어느 기사보다 크다. 17세로 국내에서 어린 나이로 줄을 세우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나현은 이번 통합예선 때 한-중 간에 벌어진 결승 7판 중 유일하게 승리한 한국기사였다. 지난 해 이미 삼성화재배서 4강에 오를 만큼 실력을 검증받은 나현의 분전이 기대된다.

중국기사로는 전기 우승자 장웨이지에(21) 구리(古力 29) 셰허(謝赫 28) 박문요(24) 스위에(時越 21)등이 국가시드를 받았다. 5명 중 3명이 LG배 정상을 경험한 맹장들이다. 예선 통과자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저우허양(周鶴洋 36) 쿵제(30) 니우위티엔(牛雨田 28) 류싱(柳星 28) 리캉(李康 25) 멍타이링(孟泰齡 25)등 중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중국에선 그러나 이들보다 스무살 전후 젊은 신예들의 겁 없는 행보가 더욱 주목된다. 우광야(鄥光亞 22) 펑리야오(彭立堯 20) 탄샤오(檀嘯 19) 렌샤오(連笑 18) 당이페이(党毅飛 17) 리쉬엔하오(李軒豪 17)가 그들이다. 이 중 탄샤오는 현재 중국랭킹 1위이고, 당이페이는 제4회 비씨카드배 결승진출자다.

일본은 장쉬(張栩 32) 요다(依田紀基 46) 유키(結城聰 40) 사카이(坂井秀至 39) 등 배테랑 중심으로 팀을 짰다. 대만에선 새로운 정상의 일각으로 떠오른 샤오정하오(蕭正浩 24)가 단기(單騎) 필마로 이번 대회에 나온다. 두 나라 모두 8강 대열에 1명이라도 이름을 올릴 수 있으면 성공이다.

LG배는 1인당 3시간의 정통 방식으로 출범 당시부터 지금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2억 5000만 원의 우승상금 역시 대회 권위에 어울리는 대규모다. 세계 최고권위의 바둑제전인 올해 17번째 세계기왕의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우렁찬 개막 팡파르가 마침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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