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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회 LG배 결승이 남긴 기록들
 


승부란 곧 숫자 싸움이다. 바둑게임의 승패를 다투는 방식부터가 집 수효를 다투는 싸움이 아니던가. 선거(選擧)는 표 싸움이고 입학시험은 점수싸움이다. 스포츠맨들의 승패는 스코어나 신기록, 순위로 판가름 난다.
세계바둑대회 대표 브랜드인 LG배 세계기왕전이 어느덧 16번째 성상(星霜)을 쌓으며 2월 15일 종료됐다. 알려진 대로 중국의 신예기사 장웨이지에(江維杰)가 한국 배테랑 이창호를 2대0으로 따돌리고 왕관을 썼다. 그 과정에서 또 각종 숫자, 데이터가 신기록이란 이름으로 양산됐다. 역사(歷史)의 나이테가 또 하나 늘어난 것이다.

장웨이지에의 나이가 이번 16회 대회의 핵심 키워드였다. 91년 10월 출생으로, 만 20세 4개월의 나이에 LG배 우승이란 위업을 달성했다. 이 나이는 우선 LG배 16년 사상 최연소에 해당한다. 작년까지 역대 최연소 LG배 우승자는 다름 아닌 이창호였다. 97년 5월에 끝난 원년 LG배 우승 당시 그는 21세 10개월이었다. 이 기록은 15년 동안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있다가 이번에 장웨이지에가 무려 1년 반이나 앞당긴 것. 기록 보유자가 새 기록 수립자의 희생양이 된 것도 아이러니다.

20세 4개월은 또 중국 바둑역사상 최연소 세계제패에 해당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이 부문 상위권은 한국기사들이 독차지해왔다. 이창호가 제3회 동양증권배를 차지하면서 세운 16세 6개월 세계챔프 신화는 20년째 꿈쩍도 않고 있다. 이창호의 뒤를 이어 박정환(18세 7개월‧후지쓰배), 박영훈(19세 3개월‧후지쓰배), 이세돌(19세 5개월‧후지쓰배)등이 2~4위를 점하고 있다.

장웨이지에의 20세 4개월은 역대 5위에 해당한다. 그 동안 5위였던 최철한의 20세 5개월(중환배)이 6위로, 6위였던 강동윤의 20세 6개월(후지쓰배)이 7위로 각각 밀려났다. 범위를 중국기사들로만 좁혀서 보면 장웨이지에의 나이는 발군이다. 종전 최연소 세계정복 기록이던 박문요의 22세 10개월을 2년 반이나 단축한 것. 박문요의 기록은 지난 해 제15회 LG배 때 수립된 것이다.

장웨이지에는 또 이번 대회서 10연승 무패란 눈부신 기록으로 LG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0승까지 가능했던 것은 통합예선을 거쳤기 때문. 출전 당시 낮은 자국 랭킹으로 시드를 받지 못해 국제예선에 출전, 거기서 4승을 챙겼다. 뒤이어 본선에서 4승, 결승에서 2승을 보태 합계 10승을 기록한 것.

장웨이지에가 우승에 이르기까지 거둔 10승 가운데 9승이 한국기사에게 얻은 승리였다. 특정국가 기사를 상대로 얻어낸 기록적인 승수다. 통합예선 준결승서 겨룬 중국출신 일본기사 장펑유(張豊猷)가 유일한 비(非) 한국기사였다. 통합예선서 김혜림 이영구 권효진, 본선서 조한승 목진석 원성진 김지석이 1승씩, 그리고 결승서 이창호가 2승을 제공했다.

장웨이지에 뿐 아니라 이창호도 통합예선부터 출발해 이번 16회 대회 결승은 세계바둑 사상 통합예선 출신 기사끼리 펼친 최초의 결승전으로 기록된다. 2005년 제10회 삼성화재배 때 우승자 뤄시허(羅洗河)가 통합예선을 거쳐 정상을 밟았지만 상대역인 이창호는 본선에 직행한 케이스였다. 그 우승의 영광을 장웨이지에가 가져가버렸다.

이번 대회는 또 LG배 16년 결승전 사상 최다 연령차 결승 기록을 바꿔놓앗다. 만 나이로 따지면 둘 모두 아직 생일이 안 지난 관계로 장웨이지에가 20세, 이창호는 36세다. 16세 차이는 2002년 제6회 대회 때의 13년(조훈현 48세, 유창혁 35세) 차이를 3살 넘어선다. 이 부문 세계 최고기록은 1992년 제3회 동양증권배 패권을 놓고 75년생 이창호와 42년생 린하이펑이 겨뤘을 때의 33년이다.

단위(段位)도 기록의 대상이 된다. 5단의 우승은 LG배 역사상 최저단 2위 타이기록이다. 이세돌이 3단시절이던 2002년 제7회 LG배를 정복한 것이 최고기록. 이번 경우는 재중 동포기사인 박문요가 지난 해 제15회 LG배 때 5단 신분으로 정상에 오른 케이스와 똑같다.

장웨이지에는 우승 전리품으로 9단 단증까지 챙기게 됐다. 국제대회서 우승하거나 준우승 2회를 차지하면 최고단인 9단을 주는 중국 승단규정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는 현역 중국내 최연소 9단이 된다. 또 중국 최연소 9단 승단 기록으론 역대 2위를 마크하게 된다. 중국바둑사상 최연소 9단 승단기록 보유자는 천야오예(陳耀燁). 89년 12월생인 그는 2006년과 2007년 두 차례 세계대회 준우승을 거둬 17세 5개월 만에 9단이 됐다. 이 기록은 현재 세계 최단기록으로 아직도 남아있다(한국의 최연소 9단 기록은 박정환의 17세 11개월).

장웨이지에의 수훈으로 중국은 단일 국제기전 4연패(連覇)란 새 기록도 쓰게 됐다. 그 동안 중국은 LG배 3연패, 삼성화재배서 두 차례 2연패, 춘란배 2연패가 최고 연패(連覇) 기록이었다. 참고로 한국은 후지쓰배에서 10연패(98~2007년), 삼성화재배 6연패(97~2002년)를 기록 중이다. 일본은 국제대회 초기였던 89년부터 94년까지 TV아시아선수권대회서 6년 연속 우승을 기록한 바 있다.

연패 아닌 총 우승회수를 합할 경우 중국은 LG배서 6회째 우승해 7회의 한국을 바짝 추격하게 됐다. 중국이 6번이나 우승한 국제대회는 LG배 뿐이다. 이런 추세라면 역전 가능성도 보인다. LG배는 현재 추세로만 본다면 중국바둑계에 한국 추월의 전진기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떤 사물에도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이번엔 패자인 이창호와 한국바둑 쪽의 ‘새 기록’을 훑어볼 차례다. 우선 이창호의 국제대회 연속 준우승 숫자가 6개째로 늘어났다. 중국기사가 빠진 채 우승했던 마이너급 중환배(2007년 8월)를 빼고 계산할 경우 이창호의 결승전 패배 행진은 10개 대회로 늘어난다. 2005년 3월 춘란배 제패를 끝으로 이창호는 장장 7년째 제대로 구색을 갖춘 국제대회 우승 트로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이창호의 ‘무관(無冠)시대‘도 곧 1년을 넘어서게 된다. 그는 2011년 3월 국수 타이틀을 잃고 빈털터리가 됐다. 전성시절 수중에 13개의 타이틀을 동시 보유할 정도로 ’타이틀 폭식‘을 일삼았던 이창호에게 무관이란 상상하기 힘들 만큼 어색하다. 그는 지금까지 비공식 대회 2개를 포함해 국제대회 23회, 총 140회의 믿기 힘든 우승기록들을 지니고 있다.
이창호가 이번 대회를 제패했더라면 개인 단일타이틀 최다우승 기록을 경신할 수 있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현재까지는 LG배의 이창호, 동양증권배의 이창호, TV아시아선수권에서의 다케미야(武宮正樹)가 나란히 4차례 우승, 이 부문 기록을 공유하고 있다. ‘LG배의 사나이’란 애칭을 지닌 이창호로선 이래저래 아쉬운 이번 16회 결승이었다.

이밖에도 이창호는 생애 처음 예선부터 출전한 LG배를 ‘통합우승’하는 기회를 놓쳤다. 통합예선 이후 9연승을 달리다 막판 2패를 당한 죄과(?)였다. 이 마지막 고비마저 넘었더라면 통합예선을 거쳐 총 11승이란 엄청난 승수로 LG배 역사의 다른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아쉬움의 뿌리는 만 36이란 숫자, 즉 이창호의 나이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모른다. 한 중 양국 정예들의 층이 넓어지고 연소화되면서 전성기는 20대 초중반으로 옮겨가고 있다. 불세출의 대스타 이창호로서도 이런 흐름을 역행하기란 힘든 것인지 모른다. 뒤집어 볼 때 만 20세 약관인 장웨이지에의 선전(善戰)도 같은 증거로 설명이 가능하다.

LG배는 오는 6월 제17회째를 맞아 다시 1년간의 대장정에 들어간다. 세계 어느나라 프로에게도, 비록 좁긴 하지만 심지어 아마추어들에게도 문호는 열려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새로운 ‘숫자에의 도전’에 나설 자격이 주어진다. 이창호나 장웨이지에도 예외일 수 없다. 역사는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 같은 것. 이번엔 또 어떤 기막힌 진기록들이 쏟아져 나와 바둑 팬들을 열광시켜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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