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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이창호의 7년 랭킹전쟁
 


뛰어난 준재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판도를 많이 바꿔놓긴 했지만, 아직도 바둑 팬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을 물으면 예외없이 나오는 대답이 이창호와 이세돌이다. 새 천년 진입 후 최고의 활약을 보인 기사는 역시 이들 2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정상을 다툰 2인 조합(組合)또한 이들 커플이란 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둘은 최고의 라이벌이자 최근 10년 간 한국바둑을 상징하는 대표 아이콘들이었다.

이창호와 이세돌, 흔히 양이(兩李)로 통칭되는 양웅의 경쟁사는 랭킹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다른 데이터들이 그랬듯, 랭킹 또한 거의 두 사람을 위한 역사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 한국바둑의 랭킹제도는 2005년 8월 도입됐으므로 그 이전의 성적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전제가 따른다. 한국랭킹은 매달 초 1회씩 발표되며 최근 76개월째 ‘성적표‘가 나왔다. 랭킹전쟁이 만 6년을 지나 어언 7년째로 접어드는 셈이다.

랭킹제도 또한 거의 이들 두 사람을 위한 통계였다. 첫 랭킹 발표 이후 76개월 동안 1위 자리에 이들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빠진 달은 딱 두 번 뿐이었다. 2006년 1월(최철한 1위, 이창호 2위, 이세돌 3위)과 2009년 11월(최철한-이세돌-이창호)이 그것. ‘양이’의 비중과 점유율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실감난다. 나머지 74개월을 둘이 양분했다. 이세돌이 52회, 이창호는 22회에 걸쳐 1위 자리를 꿰찼다.

이창호는 2005년 8월 최초로 발표된 랭킹서 2위 이세돌을 따돌리고 선두로 나섰고 2006년 2월부터 1년간 1위를 유지, 독주체제에 들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2007년 11월부터 이세돌 시대가 열렸다. 그는 2009년 10월까지 24개월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 랭킹의 역대 최장 1위 기록이기도 하다.
이세돌은 그 직후 4개월 동안 2위로 물러나 잠시 숨을 고르더니 2010년 3월 이후 지금까지 또 다시 독주를 계속 중이다. 최근 발표된 11월 랭킹까지 이세돌의 1위 행진은 21개월째 계속 되고 있다. 만약 이세돌이 내년 3월까지 지금의 위치를 계속 지켜낸다면 25개월 연속 1위로, 자신이 보유했던 종전 한국 최장기록 24개월을 스스로 경신하게 된다.

이세돌이 지난 6년 여 세월 동안 1, 2위 아닌 3위로까지 처졌던 달은 총 76개월 중 단 6개월에 불과하다. 3위권 밖으론 한 번도 내려가지 않았으니 놀랍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테니스나 골프같은 개인스포츠종목에서는 그 어떤 세계적 스타들이라 해도 이처럼 6년 이상 최정상권을 지킨 예를 찾아보기 드물다.

이세돌에 비한다면 이창호는 상대적으로 좀 더 뚜렷한 부침(浮沈)을 보여왔다. 2009년 4월 처음 3위로 내려가더니 그해 10월 4위, 2101년 12월 7위를 거쳐 2011년 3월과 5월 9위까지 내려앉았다. 그가 과연 ‘바닥’을 친 것인지, 아니면 곧 10위권 이하로 더 내려갈 신호탄인지는 아직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창호는 주위의 우려를 보란 듯 떨치고 지난여름 이후 다시 상승커브를 타기 시작, 이달 11월 현재 5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창호는 랭킹 경쟁에서 또 다시 이세돌을 따돌릴 수 있을까. 답변은 다소 비관적이다. 바둑은 언젠가부터 20세 전후 젊은이들을 위한 운동장으로 판도가 바뀌었다. 몇 달 뒷면 한국식 나이로 38세가 되는 이창호가 8살이나 어린 이세돌을 다시 돌려세울 확률은 높지 않아 보인다. 이세돌은 현재 세계타이틀 2개(비씨카드배, 춘란배), 국내기전 2개(올레배, 원익배) 등 4관왕으로 군림 중이다. 국내 기사들 중 최다관왕이다.

반면 이창호는 올해 2월 국수전 방어전서 패하면서 현재 무관(無冠)신세다. 통산 140개(비공식 기전 2개 포함)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었다지만 그건 지난날의 얘기다. 권토중래의 투지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란 뜻이다. 현재를 기준시점삼아 앞으로의 랭킹에 경쟁을 붙인다면 이창호가 절대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그러나 이창호에겐 비록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랭킹 역전‘을 이뤄냈던 짜릿한 기억이 남아있다. 2007년 11월 이세돌에게 1위를 내준 이창호는 이후 내리 25개월 동안 줄곧 눌려 지냈다. 그 사이 2위조차 지키지 못하고 4위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모두들 재역전은 이미 불가능하다고 짐작하고 있던 2009년 12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이창호가 의연히 1위로 복귀하면서 이세돌을 다시 2위로 쫓아낸 것이다. 이런 판도는 한 달도 아닌 3개월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 석 달이 마지막이었다. 이세돌은 2010년 3월 선두를 재탈환했고, 이후 그가 구축한 랭킹 철옹성은 더욱 난공불락의 요새로 자리잡아갔다. 이창호는 최근 21개월 동안 단 한 차례도 이세돌을 앞지르지 못했다. 지금 이창호로선 랭킹에 앞서 무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보인다.

랭킹과 관련해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는 이세돌의 1인체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그 아성을 허문다면 누가 과연 주역을 맡을지에 모아질 수도 있다. 이창호 아닌 다른 추격자에게도 시선을 줄 필요가 커져가고 있다는 뜻이다. 랭킹 1위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젊은 무리들은 한창 시절의 이창호, 이세돌 못지않게 용맹스럽고 사납다.

가장 최근 발표된 11월 랭킹에서도 그런 조짐이 보인다. 이세돌이 1위를 지켜내긴 했지만 2위와의 점수 차가 크게 좁혀졌다. 이세돌과 2위 박정환 간의 점차는 고작 47점으로 한 달 전 10월의 128점보다 81점이나 줄었다. 47점은 최근 몇 달 사이 이세돌이 2위 추격자와 사이에 기록한 가장 근소한 점차다. 이런 추세라면 12월 초 발표될 다음 달 랭킹에서는 22개월 만에 1위가 바뀔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재미 과학자 배태일박사가 주도하는 현행 랭킹점수 방식은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패할 경우 점수가 많이 깎이고, 하위자가 상위자를 이기면 많은 점수를 얻게 돼 있다. 1위 랭커로선 잠시만 방심하면 점수를 대폭 잃을 수 있다는 뜻이다. 기전(棋戰) 별로도 규모와 상금 등을 감안해 가중치가 주어진다. 이세돌은 10월 한 달 동안 가중치가 큰 삼성화재배에서 중국 쿵제(孔杰)에게, 상대적으로 하위권 랭커인 김기용과 한웅규에게 패하는 등 3승 4패에 그쳐 61점이나 잃었다.

반대로 박정환은 4승 1패를 기록하며 이세돌에 바짝 접근했다. 3개월째 연속 2위 자리도 지켜냈다. 최근 호조를 보여온 원성진이 6승 1패로 43점이나 보태면서 두 계단 올라선 3위로 뛰어올랐다. 얼마전 국수위에 오른 조한승(4승 2패)도 11월 랭킹에서 전달보다 한 단계 올라선 7위에 랭크됐다. 반면 최철한 이창호 이영구 등은 각각 4위, 5위, 8위 등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3위 원성진과 4위 최철한 간의 점차는 10점에 불과하고, 5위 이창호와 강동윤 간 차이는 단 1점이다. 10위 박영훈과 11위 허영호도 1점 차로 순위가 갈라졌다. 한 판, 한 판의 승패에 따라 랭킹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숨 가쁘게 움직인다.

랭킹 ‘태평성대’를 누렸던 이세돌이 사방에서 위협받고 있다. 성문(城門) 바로 앞까지 도전자들이 진격했다. 일단 이세돌을 정점으로 한 무리의 젊은 정예들이 협공을 펼치는 구도가 예상된다. 하지만 최대의 변수는 어쩌면 이창호가 되지 않을까. 최고의 자리 재탈환까지는 몰라도 상위권 판도 형성에 결정적 열쇠를 구사할 가능성이 보인다. 이 유서 깊은 랭킹전장(戰場)에서 선대(先代) 최고지존 이창호의 몫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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