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바둑계 ‘별 중의 별‘은 누구일까. 바둑 동네는 스포츠와 달라서 시작과 끝이 뚜렷한 시즌이란 게 따로 없지만, 매년 연말을 기준으로 그 해 큰 활약을 보인 기사를 시상한다. 이른바 바둑 대상(大賞)이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상이 최우수기사상이다. 흔히 MVP라고 부른다. 부상(副賞)은 고작(?) 순금 10돈짜리 메달에 불과하지만 이 상이 지니는 상징성은 부상에 비할 바 아니다.
올해 MVP는 지난 11월 초까지만 해도 이세돌(31) 김지석(25) 박정환(21)등 3명이 팽팽하게 맞서 주인공을 점치기 어려워 보였다. 박정환은 국내 무대를 확고하게 장악했고, 김지석은 국제무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진전을 보였으며, 이세돌은 바둑 사상 전무후무한 거액을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2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대세는 김지석 쪽으로 확연하게 기우는 분위기다. 제19회 삼성화재배서 전기 우승자인 중국 탕웨이싱을 눕히고 정상에 오른 것이 ‘만루 홈런’에 비견할 만큼 획기적인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시안(西安)서 벌어졌던 이 대회서 김지석은 생애 첫 세계 제패의 숙원을 이뤘다.
이 우승은 개인뿐 아니라 한국 바둑계에 특히 큰 의미를 띠고 있다. 2012년 삼성화재배 때 이세돌이 구리를 꺾고 우승한 이후 열린 메이저급 대회서 한국기사가 거둔 첫 우승이기 때문이다. 지난 2년 동안 벌어진 7번에 걸친 메이저 대회를 중국이 모조리 차지하는 동안 한국은 무관(無冠)에 그쳤다. 이 한 가지 업적만으로도 김지석은 올해 MVP로 뽑히기 위한 충분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김지석의 실적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LG배에서도 결승에 진출해 또 한 번의 우승을 노리고 있다. 11월 열렸던 준결승에서 김지석은 최철한을 제압, 박영훈을 따돌린 박정환과 내년 2월 결승 3번기로 패권을 다툴 예정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국제대회 최고 성적이 4강 두 차례뿐이었던 김지석의 화려한 도약이다. 2개 세계대회 동시 결승 진출은 올해 한국과 중국 기사를 통틀어 유일하며, 과거 국제바둑계에서도 전례가 드물었다. 김지석은 국내 무대에선 최철한을 제물로 GS칼텍스배를 품에 안았고 승률 1위 확보가 유력하다. 국내 랭킹은 올해 내내 박정환에 이어 2위 붙박이였다.
이번엔 박정환을 보자. 그는 이번 달(12월)을 포함해 무려 13개월 동안 한국랭킹 1위 자리를 지키면서 한국바둑의 간판 역할을 했다. 다승왕이 유력하고 승률도 1~2위권을 오가는 중이다. 연초 최철한을 2대0으로 셧아웃시키고 천원전서 우승, 국내 타이틀 홀더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바둑왕전과 맥심배에선 이세돌에게 패해 준우승했다. 아쉬운 것은 국제대회 성적이었다. 삼성화재배와 바이링배서 생애 두 번째 세계 제패를 향해 잘 치고 올라갔지만 각각 고비를 못 넘기고 4강에 그쳤다.
김지석과 박정환은 12월 25일과 27일 중국 허페이(合肥)서 열리는 제10회 춘란배 8-4강전에 나란히 출전한다. MVP 집계 마감 시한 때문에 어느 정도 반영이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대회 성적은 올해 MVP 다툼에서 또 하나의 변수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이번엔 이세돌을 되돌아 볼 차례다. 그에게 2014년은 기사생활 중 가장 잊지 못할 감격적 한 해였을 것이다. 동갑내기 국제라이벌 구리와 펼친 10번 승부를 6대2의 일방적 스코어로 마무리하면서 ‘세기의 대결’을 승리로 장식했기 때문이다. 이세돌은 이 승리로 세계바둑 사상 최고액인 500만 위안(약 8억5000만원)의 상금을 획득했다. 웬만한 세계타이틀전 3~4개 우승 상금을 합친 것과 맞먹고, 현존 최고 규모인 잉씨배(우승 40만 달러)의 2배에 달하는 거액이다. 패자에겐 소정의 교통비만 주어지는 사실상의 ‘승자 독식’ 방식이어서 더욱 극적이었다. 주최측인 헝캉그룹은 대국장소 10곳 중 9곳을 중국 도시에 배정하는 등 일방적으로 구리에게 유리한 일정을 마련했지만 영광은 이세돌에게 돌아갔다.
이세돌의 올해 실적은 이뿐이 아니다. TV아시아선수권서 일본 고노린을 꺾고 우승했다. 비록 각국 TV 속기전 우승, 준우승자와 전기 챔프 등 7명만 출전하는 마이너급 대회긴 하지만 중국세에 눌려 지내던 한국으로선 실로 20개월 만에 맛보는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이세돌은 국내무대서도 바둑왕전과 맥심배 우승, 국수전 준우승 등의 실적을 곁들였다. 예년 같으면 이의없이 MVP에 뽑히고도 남을 만 한 실적이었다.
이들 3명은 올해뿐 아니라 최근 수년 사이 바둑대상(大賞) 시상식장에서 가장 많이 호명되는 ‘단골손님’들이다. 21세기 진입 이후만 따지면 단연 ‘이세돌 왕조’가 실감난다. 200년, 2002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10년, 2011년, 2012년 등 무려 8차례 MVP를 거머쥐었다. 2010년엔 다승상, 승률상, 연승상 등 기록 3개 부문을 독식하기도 했다.
박정환은 2009년 신예기사상, 2011년 연승상, 2012년 다승-승률-연승상으로 예열을 마친 뒤 지난 해(2013년) 마침내 생애 첫 최우수기사의 영예를 안았다. 다승상과 승률상도 곁들인 원맨쇼였다. 김지석의 바둑대상 상복은 이들 2명에 비하면 다소 초라하다. 2009년 다승-승률-연승을 한 차례 휩쓴 뒤 잠잠하다가 지난 해 우수기사상 수상으로 아쉬움을 마감했다. 우수기사상은 최우수기사상에 버금가는 ‘2등상‘이다.
2013년 박정환과 김지석은 각각 몇 %씩 득표해서 1-2등으로 갈렸을까. 박정환이 37.8%, 김지석은 32.5%를 얻었다. 상당히 근소한 표차로 최우수-우수가 갈린 접전이었던 셈. 2011년엔 이세돌이 박정환을 47.5% 대 26.3%로 따돌렸고, 2010년엔 이세돌(49.8%)이 박정환(23.7%)을 더블 스코어 차이로 누르며 최우수에 뽑혔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간 한국 바둑은 결국 이들 3명이 좌지우지해 왔음이 새삼 확인된다. 올해도 일단 표면적으론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다(2012년은 최우수와 우수를 별도로 선정했으며 각각 이세돌-백홍석이 수상했다. 올해부터 는 우수기사상이 폐지됐다.)
2013년도 바둑대상 수상자
최우수기사상의 효시는 1978년 처음 제정된 기도문화상이었다. 이후 프로기사 MVP, 바둑문화상, 바둑대상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그 해 최고스타를 선정 발표해 왔다. 역대 최고스타들의 MVP 수상 경력을 살펴보면 조훈현이 8회, 이창호가 11회, 이세돌이 8회였다. 이들 거봉들 틈에서 서봉수 유창혁 최철한이 1회씩 최고 자리에 올랐다. 조훈현의 초창기 6연속(78년~83년), 이창호의 5연속(95~99년)과 이세돌의 3연속 두 차례(2006~2008, 2010~2012)가 눈길을 끈다. 해당연대(年代)에 이들은 가위 무적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올해 최우수기사 후보 3인의 특장을 요약한다면 이세돌은 ‘실속’, 박정환은 ‘서열’, 김지석은 ‘국위선양’으로 정리된다. 일단 김지석의 세계대회 활약이 워낙 돋보여 수상이 유력해 보이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이세돌은 ‘프로는 돈‘이란 논리로 2000년대의 맹주 자리를 되찾고 싶을 테고, 박정환은 지난해 처음 받아든 바통을 결코 내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김지석이 MVP에 오른다면 생애 처음 맛보는 영광이 된다.
최우수기사는 기자단 투표 70%, 팬 투표 30%로 선정한다. 올해부터는 점수제를 도입, 1순위 5점, 2순위 3점, 3순위 1점을 부여한 후 합산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주관 기관인 한국기원은 투표를 일단 12월 22일 마감하되 연말까지 주요 대국 결과를 최대한 반영할 방침이다.올해 우리 바둑계 최고의 마무리 잔치가 될 바둑대상(大賞) 시상식은 12월 29일 호암아트홀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