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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바둑, 뚜렷한 회복세
 
▲ 이세돌(왼쪽)이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26회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고노 린(日)을 꺾고 우승했다.

한국바둑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지난 1년 여 동안 중국의 위세에 억눌려 숨도 크게 못 쉬던 상황에서 벗어나 최근엔 회복의 기미가 뚜렷하다. 지난 8월 이세돌이 제26회 TV아시아선수권 우승으로 한국은 무려 20개월 만에 세계 챔프를 배출했다. 2012년 12월 삼성화재배서 이세돌이 정상에 오른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 바둑은 지난 해, 2013년 1년 동안 국제무대서 사상 유례가 없는 수모를 겪었다. 6개 메이저급 개인전 패권을 모조리 중국기사들에게 내주었고, 마이너급인 TV아시아선수권도 일본 이야마(井山裕太에)게 넘어감으로써 한국만 무관(無冠)의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신호탄 구실을 한 무대가 2012년 3월에 창설된 제1회 바이링(百靈)배였다. 바이링배 통합예선에서 중국의 나이 어린 정예들은 갑자기 무시무시한 화력(火力)을 과시하며 한국 기사들을 압도했다. 베이징 통합예선에 출전한 한국 프로 및 아마추어 기사 수는 87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 살아 돌아온 기사는 단 12명이었다. 그 대회의 한-중 간 생존기사 비율을 보면 64강에서 43대 16, 32강 때 22대 8, 16강에서 11대 5를 거쳐 8강에선 7대 1의 격차가 이어졌다. 결국 중국의 4강 독점에 이어 천야오예(陳耀燁)가 우승컵을 안았다.

이어진 다른 국제대회서도 스웨(時越)가 LG배를, 판팅위(范廷鈺)가 잉씨배를, 천야오예가 춘란배를 각각 접수했다. 제1회 몽백합배는 당시 17세였던 미위팅(羋昱廷)이 자국 대선배인 배테랑 구리(古力)를 결승서 꺾고 정상에 등극했다. 연말엔 역시 무명에 가까웠던 탕웨이싱(唐韋星)이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이세돌을 무릎 꿇리며 세계 챔프 클럽에 등록했다. 2013년 벌어졌던 6개의 개인 세계타이틀을 중국이 독식한 것이다.

하지만 올해의 흐름은 작년과는 뚜렷이 다르다. 비록 마이너 타이틀이긴 해도 이세돌이 TV바둑아시아선수권 우승으로 한국바둑을 무관(無冠) 상태로부터 끌어올린 것은 의미가 컸다. 공식 타이틀전은 아니지만 이세돌과 구리의 10번기 대결서도 이세돌의 우승이 사실상 결정된 상황이다. 세계 유일의 여성 개인타이틀전인 궁륭산병성배에선 한국의 18세 소녀 최정이 중국의 노장 루이나이웨이를 따돌리고 세계무대 첫 대관(戴冠)에 성공한 것도 낭보였다. 이런 대회들은 지류(支流)라고 치고 본류(本流)의 흐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 제19회 LG배 8강에 4명이 올라간 한국기사들

우선 LG배다. 19회째를 맞는 LG배는 한국 4명 대 중국 4명의 팽팽한 구도 속에 오는 11월 17일부터 8강전 및 4강전을 맞게 된다. 4대4라면 일견 대단하달 게 없는 것 같지만, 최근 대다수 국제대회 8강 여덟 자리 가운데 평균 6개 안팎을 중국이 쓸어갔던 흐름을 감안하면 상당한 선전(善戰)이다. 꼭 1년 전 같은 LG배 8강 구도가 중국 6명, 일본 2명에 한국이 전멸했던 ‘참사’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이에 앞서 3월 시작된 제10회 춘란배만 중국 5명, 한국 2명, 일본 1명의 8강 구도로 진행되고 있다. 박정환 대 천야오예, 김지석 대 미위팅, 스웨 대 저우루이양, 구리 대 장쉬의 대진표가 나와 있으며 일정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2회째를 맞는 바이링배는 작년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8강까지 치른 결과 오히려 한국이 5명, 중국 3명으로 역전된 것이다. 국제대회 8강에서 한국 출전자 수가 중국보다 많은 것은 2012 제17회 삼성화재배(한국 5, 중국 3) 이후 2년만이다. 8강 1대7, 4강 중국 독점 등의 1년 전 상황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바이링배는 4강까지 한국 2, 중국 2명 싸움으로 좁혀져 있다(9월 17일 현재).

한국의 상승세를 주도하는 얼굴을 살펴보자. 일단 박정환과 김지석이 쌍두마차를 형성하고 있다. 10개월 째 한국랭킹 1위를 독주 중인 박정환(21)은 국제무대서도 승승장구, 춘란배 LG배 바이링배 8강과 삼성화재배 16강 고지를 확보하고 다음 라운드를 기다리고 있다. 올해 초 한 중 단체전인 초상부동산배 때는 양국이 동률을 이룬 후 주장전에 나선 박정환이 스웨를 눕힘으로써 규정에 따라 한국이 우승했다. TV아시아서도 4강에 들었다. 현재의 페이스라면 어떤 대회가 되건 또 하나의 세계 우승컵을 품에 안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박정환의 세계 제패는 2011년 제24회 후지쓰배 한 차례뿐으로, 실력에 비해 큰 운이 따르지 않았었다.

김지석(25)의 기세도 가위 욱일승천이다. 역시 LG배, 춘란배, 바이링배 8강과 삼성화재배 16강 등 모든 메이저 국제기전서 순항을 계속 중이다. 연초 초상배 우승 때도 맹활약했던 멤버다. 한국랭킹은 10개월째 연속 2위. 이토록 막강한 김지석의 국제대회 최고 성적이 고작 4강 한 차례(제15회 삼성화재배) 였다는 사실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김지석이 올해 시즌 생애 첫 세계 제패의 한을 올 해 풀 수 있느냐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바둑팬 모두의 관심사로 모아지고 있다.

이세돌(31)의 활약도 꾸준하다. 무엇보다 세계 바둑역사상 최고 상금 500만 위안(약 8억 3000만원)이 걸린 구리와의 10번기서의 승리가 결정적이다(7국까지 5승 2패로 우세. 9월 28일 8국 거행). 이 대회는 정통 스타일의 개인 세계기전은 아니지만 여러 상징성을 감안하면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10번기와 TV아시아대회 성과 외에도 이세돌은 초상배, 국수산맥 등 한 중 단체전서 활약했다. 16강까지 추려낸 삼성화재배에서도 현재 살아있다.

최철한(29)은 LG배와 바이링배 8강을 밟았다. LG배는 현재 진행 중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강타자답게 꾸준히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는 셈. 춘란배서 16강전서, 삼성화재배 때는 32강전서 탈락한 게 다소 아쉽다. 초상부동산배 한국 우승에는 최철한도 한 몫했다. 최철한과 함께 ‘송아지 3총사’ 멤버인 박영훈(29)은 11월 LG배 8, 4강전 속행을 기다리고 있다. 평년보다 저조한 페이스지만 대신 LG배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붓겠다는 각오. 중국 신예 셰얼하오와 준결승행 티켓을 다툴 예정이다.

9월 한국랭킹에서 4위로 점프한 데서 보듯 강동윤(25)의 올해 기세도 심상치 않다. LG배 16강전서 아깝게 탈락했지만 삼성화재배에선 6연승 무패 가도를 달리며 16강에 안착해 있다. 농심배 예선을 6연승으로 돌파해 본 대회서의 활약이 기대된다. 국수산맥배 때 역시 무려 6연승으로 예선을 돌파한 뒤 중국 최고 엘리트 중 한 명인 탄샤오(檀嘯)와 1승 1패를 기록했다. 안국현(22)은 바이링배서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밖에 안성준(23) 진시영(25) 조한승(34) 김승재(22) 강승민(20) 등도 올해 국제무대에서 의미 있는 활약을 펼치고 있다.

지난 해 중국 광풍이 불어닥칠 때만 해도 한국바둑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랬던 한국 바둑이 다시 일어선 비결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당사자인 프로기사들이 스스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정신무장을 새롭게 한 효과로 분석된다. 대표 팀이 구성되고 잇단 리그전 실시, 집중 연구 등을 접하면서 기술 뿐 아니라 긴장도를 높인 것이 주효했다는 것. 대표 팀이 자리를 잡고 궤도에 안착하면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란 게 중론이다.

무엇보다 중국 소년 기사들에게 느꼈던 막연한 공포심을 떨치고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 가장 큰 수확으로 꼽힌다. 올해 한 중 결전의 대미(大尾)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매듭지어질까. 분명한 것은 세계를 휩쓸던 한국바둑의 영광이 재현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 반상(盤上) 전사(戰士)들이 1년 여의 휴식을 끝내고 또다시 질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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