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년 연속 LG배를 석권 중인 중국의 횡포(?)를 올해는 막아낼 수 있을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제법 희망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6월 9일부터 11일까지 강릉에서 벌어졌던 제19회 대회 32강전, 16강전에서 한국기사들이 기대 이상 분전해 준 덕분이다.
사실 이번 대회 본선 돌입 시점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세계 바둑계를 휩쓸고 있는 중국의 기세가 이번에도 충천했기 때문이다. 1차 승부처인 통합예선서 대거 12명을 통과시켰고, 그 서슬에 눌린 한국이 4명에 그친 것. 한국이 기록한 통합예선 통과자 수 4명은 LG배가 이 제도를 처음 도입했던 10회 대회 이후 최소 숫자였다.
시드 보유자를 합쳐 본선 스타트라인에 선 선수 숫자는 중국 17명, 한국 10명이었다. 머리 수가 같아도 안심할 수 없는 판에 기본 병력부터 2배 가까이 차이가 났으니 관계자들이 한숨을 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난 해 18회 대회 때 한국은 중국보다 1명 더 많은 14명으로 출발하고도 8강에 1명도 못 올리는 사상 최악의 전적을 남긴 바 있다.
한 중 양국의 출전자 수 17대 10으로 출발한 본선은 1회전(32강전)이 끝났을 때 10대6으로 바뀌었고, 2회전을 마쳤을 때는 4대4 타이로 변했다. 최근 1년 사이 각종 국제대회서 중국이 대거 6명의 우승자를 배출하는 등 독주해오던 터라 이번 4명대 4명의 중간 스코어는 상당한 선전으로 평가된다. LG배만 놓고 보면 2년 전 17회 대회 때 5명을 올려놓은 이후 2년 만에 과거 페이스를 되찾았다고 할 수 있다.
강릉 라카이 샌드 리조트에서 벌여졌던 이번 본선 1라운드 결과는 본선에서 이뤄졌던 한-중 기사간 맞대결 성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양대 세력은 강릉 대회전서 모두 16판을 겨뤘는데 1회전 6대4, 2회전 4대2로 모두 한국 쪽이 앞섰다. 본선 24판 중 한국이 중국을 10대6으로 압도했다는 얘기다.
1회전과 2회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특히 눈여겨 봐야 것은 한국 에이스급 강자들의 선전이다. 6월 랭킹 기준으로 한국은 1위 박정환, 2위 김지석, 4위 최철한, 5위 박영훈이 연승하면서 8강 티켓을 품에 넣었다. 이세돌을 1명만 중도 탈락했을 뿐 한국 ‘베스트 5’가 패키지(?)로 준준결승 무대에 안착한 것이다.
이들 한국기사 4명의 국내 랭킹을 합하면 12로 1인당 평균 3위란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중국은? 5월 말 기준으로 발표된 최신 랭킹을 보면 순위 합계 62로, 1인당 평균 15.5위란 계산이 나온다. 가장 높은 천야오예가 2위, 퉈자시가 6위이고, 판팅위는 10위다. 셰얼하오는 무려 44에 처져있어 랭킹 합계 및 평균을 크게 낮췄다.
양국 최고레벨의 장수들이 어울려 싸운 결과 일부는 살아남았고 또 다른 일부는 ‘전사(戰死)’했다. 한국 진영에선 3위 이세돌, 8위 강동윤의 낙마로 다소의 차질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변상일(14위) 안국현(23위) 김동호(45위) 안형준(47위)을 잃은 것도 아쉽다. 하지만 이같은 병력 손실은 중국에 비할 바 아니다.
중국은 1라운드 2회전을 치르는 동안 내로라하는 맹장들이 여럿 전사했다. 현역 세계 챔피언(삼성화재배) 중 1명인 탕웨이싱은 박정환, 중국의 ‘장기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셰허와 리저는 각각 최철한 및 김지석의 일격을 맞고 스러졌다. 최철한은 1회전서도 중국의 현역 세계챔프인 미위팅(몽백합배)을 거꾸러뜨린 바 있다. 스웨는 중국 톱랭킹 라이벌 천야오예와의 집안싸움 끝에 보따리를 쌌다.
아무튼 1위 스웨, 4위 미위팅, 5위 저우루이양, 6위 탕웨이싱, 19위 박문요, 20위 리저, 21위 셰허 등의 중국 톱스타들을 이번 LG배에선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됐다. 3위 구리는 통합예선 결승서 패하는 바람에 본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적어도 랭킹 상으로만 본다면 중국은 장수들이 대거 목숨을 잃은 탓에 8강전부터는 졸병(?)들 상당수가 최전선에 배치될 수밖에 없는 양상이다.
8강전이 한국 3위와 중국 15.5위 간 싸움이란 것은 물론 기존 랭킹에 대입한 상징적인 전력 비교일 뿐이다. 한국과 중국은 랭킹 체계 자체가 다른데다 순위란 것도 수시로 변한다. 또 아무리 평균 순위에서 앞서더라도 적진에 발군의 1인이 버틴다면 우승은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8강전을 치를 양국 기사들의 매치업을 살펴보는 게 또한 중요하다. 16강전 종료 직후 대진 추첨 결과 8강 대진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준준결승 4판을 예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최철한-판팅위>
최철한은 한국 3위, 판팅위는 중국 10위다. 최철한은 한국의 명인. 그러나 판팅위는 지난 해 한국 박정환을 3대1로 꺾고 잉씨배를 품에 안은 현역 세계 챔피언이다. 이번 대회서도 판팅위는 이세돌과 강동윤 등 한국 주력부대를 차례로 눕히고 올라왔다. 최철한이 미위팅과 셰허를 제물로 8강에 다달은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주목해 볼 것은 둘 간의 그간 전적이다. 뜻 밖에도 최철한이 5승 1패로 압도적 우세를 장악 중이다. 첫 만남서 패했지만 지난 해 제3회 초상부동산배서 승리하기까지 내리 5연승을 내달리고 있다. 상대전적은 무시할 수 없는 예상자료란 점에서 최철한으로선 최상의 카드를 뽑은 느낌이다.
<박정환-천야오예>
박정환 한국 1위, 천야오예 중국 2위. 지명도나 자국 내 위상으로만 본다면 올해 8강전 네 판 중 최고의 빅매치다. 랭킹상 양국 주장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박정환은 2012년 마지막 후지쓰배를 통해 세계 정상에 올랐던 인물. 그러나 그 이후로 세계 제패의 맥이 끊겼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모처럼 우승컵을 추가하며 세계 1인자에 복귀하려는 야심이 충만하다. 현재 국내 2관왕(물가정보배, 천원전)이다. 이번 대회선 중국 최연소 리웨이칭(14)과 탕웨이싱을 밟고 올라왔다. 천야오예는 현재 춘란배 보유자. 둘 간 통산전적에선 천야오예가 8대6 간 발의 차로 앞서 있다.
<박영훈-셰얼하오>
한국 5위 대 중국 44위의 대결이다. 일단 상대가 안 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중국의 선수층은 최근 몰라볼 만큼 두터워져서 2~30위 정도 차이는 거의 실력 차를 못 느낄 정도다. 박영훈은 이번 대회 32강전서 4년 전 LG배 우승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조선족 박문요(퍄오원야오)를, 16강전서는 안동쉬를 눌렀다.
두 중국기사 랭킹이 각각 19위, 42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박영훈의 이번 대회 대진운은 계속 좋은 편. 어쩌면 대박(?)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박영훈이 13년이나 아래인 신예 셰얼하오(16)를 어떻게 요리할지 지켜볼 일이다. 둘 간의 대결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지석-퉈자시>
퉈자시는 전년도 LG배 우승자로 이른바 디펜딩 챔피언이다. 이번 대회 개막식 때 “가장 피하고 싶은 기사는 누구냐”는 사회자 질문에 “한국기사 중엔 김지석이고 중국기사들은 다 피하고 싶다”고 했었다. 말이 씨가 됐는지 둘이 운명처럼 8강전서 맞닥뜨렸다.
퉈자시의 그같은 코멘트는 과거 전적과 무관치 않다. 둘은 세 번을 맞싸워 김지석이 모두 이겼다. 하지만 퉈자시는 저변 두터운 중국바둑계에서 6위에 올라있는 강자다. 일본의 이다, 한국 변상일을 탈락시켰다. 한국 2관왕(올레배, GS칼텍스배)이자 랭킹 2위인 김지석은 이번 대회를 개인 최초의 세계 제패 무대로 만들려는 야심으로 충만해 있다.
한국 4명 대 중국 4명이 겨룰 8강전은 오는 11월 열리며 장소는 추후 결정된다. 우승상금 3억원의 중국 유출을 올해는 막아낼 수 있을까. 중국의 국제바둑대회 연패(連覇) 기록이 해마다 LG배에서 경신되는 것을 이제는 막아야 할 때가 됐다. 이번 19회 대회는 LG배로 보나 한국바둑 전체로 보나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 확실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