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있는 기성(棋聖)으로 추앙받아온 우칭위안(吳淸源) 선생이 오는 5월 19일 100회째 생일을 맞는다. 99세를 뜻하는 백수(白壽)도 아닌, 꼭 한 세기를 채운 백수(百壽)다.
수 천 년 동안 숱한 천재기사들이 출현해 자기 시대를 수놓았지만 바둑의 본질 규명이란 주제와 관련해 우칭위안만큼 큰 영향을 끼친 기사는 없었다. 그는 언제나 새로움과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개혁성과 창의성은 우칭위안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정작 놀라운 것은 그의 그같은 항로가 만 100세를 넘긴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또 하나의 세기(世紀)로 넘어가면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한창 중국의 스타기사 구리와 ‘세기의 10번기’를 펼치고 있는 이세돌은 최근 우칭위안 선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매우 존경하며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거인”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바둑의 기술적인 면이 빠르게 발전해 왔다고 하지만 선생의 경지는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이다. 특히 중반전에서의 창의성을 비교하자면 나는 선생의 10분의 1만 되어도 만족이다.“ 이세돌이 이렇게 완벽하게 무릎을 꿇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중국 푸젠(福建)성 태생인 우칭위안은 14살 때 일본으로 건너왔다. 순전히 독학으로 바둑을 연마한 13세 소년이 당시 바둑의 메카로 통하던 일본의 중견 프로들과 대등하게 맞서자 주변 사람들이 그를 당대 거물 세고에(瀨越憲作)에게 천거했다. 시험기를 거쳐 일본기원 三단을 인허 받은 우칭위안은 곧바로 일본 바둑계를 석권해가기 시작했다.
1933년 평생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기타니(木谷實)와 함께 ‘신포석’ 이론을 발표함으로써 바둑사에 큰 획을 그었다. 바둑사 최대의 패러다임 혁명이 펼쳐진 것이다. 우칭위안의 바둑관은 ‘조화(調和)’란 한 마디로 요약된다. ”바둑의 모든 착점은 조화를 향해 나아가는 항해의 과정이다. 전체의 균형을 잡으려면 조화를 이뤄가야 한다“고 했다. 영어로는 하모니(harmony)가 가까울까. 아무튼 조화는 비단 바둑만이 아니고 모든 예술에 적용될 수 있는 멋진 개념이다.
우칭위안의 바둑 인생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치수(置數)고치기 10번기‘ 시리즈다. 그는 1939년부터 17년 간 총 11번의 치수고치기를 펼쳐 기타니(木谷實), 하시모토(橋本宇太郞) 후지사와(澤朋齊), 다카가와(高川格)등 당대 최고스타들의 치수를 모조리 바꾸었다.
1936년 일본으로 귀화했다가 49년 대만 국적을 취득했고, 다시 30년 뒤인 79년 일본으로 재귀화했다. 바둑을 떠나선 그도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을 인간적 고뇌가 읽힌다. 대만은 그에게 ’대국수’ 칭호를 내렸고 중국도 여러 차례 우칭위안을 초청했다. 2006년엔 우칭위안 일대기가 중·일 합작영화로 제작됐다.
우칭위안의 위대함은 ‘선수’ 시절 못지않게 은퇴 이후도 알차고 훌륭한 삶을 살아왔다는 점에도 있다. 우칭위안은 1983년 은퇴했으나 그 후의 활동도 현역 시절 못지않게 역동적이었다. ‘21세기 포석법’을 연구해 저술로 남긴 것, 세계 최강의 여류 루이나이웨이를 제자로 맞아들여 지도한 것, 잉창치배 세계대회 심판장을 맡은 것 등이 모두 80세 넘어 해 낸 일들이었다. 2012년 9월 28일 제36기 일본 기성전 도전기(장쉬-다카오) 6국 현장에 노구를 이끌고 나타나 바둑계를 놀라게 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칭위안은 100세 해를 맞은 올해 2월 한 층 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38기 기성전 이야마 대 야마시타 전 검토실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린하이펑 왕밍완 고토 등 현장에 있던 후배들은 어쩔 줄을 모르며 노장의 열정에 감읍했다는 후문이다.

우칭위안(吳淸源)은 세계 바둑 사상 짝을 찾기 힘든 대표적 천재로 꼽히지만 그 자신은 그런 분류를 단호히 부정한다. “천재란 없으며 모든 것은 노력의 대가”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우칭위안의 엄지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휘어있다. 양쪽 손이 모두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한 권으로 묶은 무거운 바둑책을 놓고 하루 종일 기보를 놓아본 탓이다. 손이 저려오면 다른 손으로 바꿔 들어가며 그런 식으로 평생을 공부하다 보니 양쪽 엄지손가락의 방향이 꺾여버린 것이다.
일본 소식통들에 의하면 우칭위안은 요즘도 상당한 수준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변함없이 바둑도 둔다고 한다. 거주지인 가나가와 현 근처에서 큰 대국이 열리면 여전히 현장을 찾는다. 38기 기성전 도전기 5국 관전을 위해 아타미 시를 찾았던 것이 그 예다. 젊은 시절엔 약골로 통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신비스런 변화다. 그는 한 때 심장병과 고혈압 약을 상복했고 허리 치료도 계속 받아야 했었다. 그랬던 우칭위안이 100세 나이에 오히려 더 건강해진 비결은 무엇일까. 서둘지 않는 여유, 평정심, 조화를 추구하는 균형감각, 예술가적 자세 등 심리적 측면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승부사 우칭위안을 젊었을 때부터 평생 보살펴 주던 일본인 부인 오카즈코(吳和子)여사가 남편의 100세 생일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우칭위안과 장장 70년을 해로했던 오카즈코 여사는 2년 전인 2012년 연말 90세로 별세함으로써 남편의 100세를 지켜보지 못했다. 조금만 더 생존했으면 그야말로 ‘100년 해로’를 누릴 뻔했는데 이루지 못했다.
우칭위안은 ‘천재는 박명(薄命)’이란 속설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바둑계 삶에 있어 최고의 질(質)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양(量)에서도 가장 풍요한 기록을 남기는 중이다. 음악 미술 건축 문학 등 모든 예술분야들을 망라해 이 점에서도 우칭위안을 능가하는 존재는 찾기 어려워 보인다. 위대한 승부사이자 예술가인 우칭위안이 언제까지 생존하고 또 어떤 경이로움을 이어갈 것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의 요즘 움직임을 보면 언제까지나 이승에 머물며 바둑을 두고, 큰 대국장을 찾아다니고, 천진한 미소를 띠며 후학들과 바둑 수를 논할 것 같다. 언젠가 세상을 떠난 후 ‘살아있는 기성’이란 그의 별명은 바뀔까. 지금 봐서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