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바둑계가 갑자기 10대(代) 영재 찾기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약관(弱冠)에 발을 들여놓기 앞서 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어린 기사들 중 누가 최강자냐 하는 의문은 바둑 팬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다. 이 명제는 또 미래 세계 바둑의 주역이 누구냐의 의문과도 연결돼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한국 속담이 바둑만큼 잘 어울리는 분야도 없기 때문이다.
조훈현과 이창호, 조치훈, 창하오, 구리, 이세돌, 박정환에 이르는 역사상 최고수들이 예외 없이 10대 초반에 프로가 됐고, 10대 후반엔 이미 최정상에 섰거나 그 직전 상태까지 이르렀었다. 영재 육성 환경이 갈수록 좋아지면서 그들의 최정상 정복 기간도 무섭게 빨라지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프로제도가 존재하는 바둑 강국들에선 이미 무시무시한 10대 강자들이 속속 배출되는 모양새다.
내로라하는 10대 강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대회를 치르는 것은 전 세계 바둑 팬들의 꿈이었다. 그 꿈이 마침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최근 세계 바둑의 ‘큰 손’으로 등장한 중국이 여기서도 앞장서는 모습이다. 대회 이름은 2014 리민(利民)배 세계바둑신예최강전. 40만 위안(약 6800만원)의 우승상금이 걸려있다.
아무나 출전할 수는 없고 예선 참가 자격부터 다소 까다롭다. 프로기사는 94년 1월 1일 이후 출생자만 참가할 수 있다(10대를 막 넘긴 ‘꽉 찬 스무살‘도 포함된다). 아마추어인 경우 97년 이후 출생자(만 17세) 중 중국기원 남자 아마랭킹 50위 이내이거나 한국기원 및 일본기원 연구생 1조 소속에 한한다. 유럽 및 미주 출전자에겐 91년 이후 출생자(만 23세)로 제한을 다소 완화해 주었다. 여기에 주최측 특별초청선수 3명이 가세해 예선을 치르게 된다.
일정도 제법 복잡하다. 우선 4월 30일부터 5월 3일 사이 항저우에서 1차 예선을 갖고 6명을 선발할 예정. 7월~9월 열릴 2차 예선서도 6명을 뽑는데 1차 예선 탈락자도 출전할 수 있다. 1, 2차 예선을 통해 선발된 12명은 시드를 받은 기사 12명과 어울려 모두 24명이 10월 본선전에 집결, 토너먼트로 최종 우승자를 가린다는 스케줄이다. 시드는 중국에 2명, 한국 일본 대만에 각 1명이 배정됐다. 이 대회에 앞서 일본에서 열리는 글로비스배 세계신예바둑대회 상위 진출자 4명에게도 시드를 부여키로 했다.
리민배는 1인당 1시간에 30초 초읽기 3회의 준 속기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선 참가에 드는 비용은 본인 부담이란 점도 긴박감을 높이는 요소다. 예선 방식을 종합해 볼 때 본선전에선 중국 기사들이 수적으로 월등히 많은 자리를 차지할 공산이 보인다.
게다가 질적으로도 중국이 다소 앞서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 96년생 동갑내기 현역 세계챔프인 판팅위와 미위팅이 이 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다. 또한 리친청 양딩신 셰얼하오 등 98년생 트리오도 매우 위협적 존재들이다. 당이페이 타오신란 렌샤오(이상 94년생) 커제 황윈송 위즈잉(이상 97년생) 역시 무섭게 성장 중인 강자들.
한국 프로기사 중 출전자격을 가진 사람은 김승민 김누리 박대영 박민규 이현준(이상 94년생) 나현 양우석 황재연 백찬희 송상훈 김민호(이상 95년생) 최정 김채영 한승주 김진휘 오장욱(이상 96년생) 변상일 김명훈(이상 97년생) 이동훈 오유진(이상 98년생) 신민준 최영찬 설현준(이상 99년생) 신진서(2000년생) 등이다. 이 중 누가 튀어나와 이 대회의 주역으로 발돋움할지 현재로선 속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실적과 지명도로만 본다면 나현 변상일 이동훈 신민준 신진서 등에게 기대가 쏠린다.
한국기원 연구생 중 17세 이하로 1조에 속한 기사들도 출전 자격이 주어진다.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사고(?)를 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마와 프로가 섞여서 맞붙는 오픈전 형식의 대회에선 아마추어의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법이다. 저변이 두터운 중국의 아마추어 영재들도 경계 대상이다.
일본은 한 수 뒤지는 전력으로 평가되지만 최근 분위기는 몇 년 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일본 신인왕전 준우승자 위정치(18), 제8회 히로시마 알루미늄배 우승자 이치리키 료(16), 대만 출신 비밀병기 쉬자웬(16), 제69기 본인방전 본선멤버 이다 아쯔시(19) 등이 급성장 중이다. 쉬자웬은 올해 초 열렸던 한 일 주니어 교류전서 한국기사들을 상대로 4승 1패를 거둔 바 있다.
이보다 앞서 오는 5월 8일부터 4일간 도쿄에선 제1회 글로비스배 세계신예바둑선수권대회가 열린다. 후지쓰배를 폐지하는 등 최근 몇 년간 침체가도를 걸었던 일본이 모처럼 의욕적으로 만든 국제대회다. 이 대회 역시 94년 1월 1일 이후 출생한 만 20세 이하의 세계 영스타들을 참가대상으로 못박고 있다.
리민배와 달리 예선을 거치지 않고 각국에 출전자 수를 할당하는 방식을 취했다. 주최국 일본이 6명으로 가장 많고 한국과 중국이 각 3명, 대만 유럽 남미 오세아니아 각 1명 등 총 16명이 토너먼트로 패권을 가린다. 단 1회전은 4개조 더블 일리미네이션 방식으로 8강 진출자를 가릴 예정이다.
한국이 할당받은 시드 3장의 주인은 나현 최정 신진서에게 돌아갔다. 나현은 해당자 중 최고 랭킹으로 선발전 없이 뽑혔고, 최정과 신진서는 20세 이하 출전 희망자 26명이 펼친 선발전을 통과했다. 나현은 이미 세계 4강(2011년 제16회 삼성화재배)까지 밟아보는 등 국내 주니어들 중 간판스타로 꼽혀온 기사. 96년생 최정은 여성 기사로 험로를 뚫었다는 점에서, 2000년생인 신진서는 국내 최연소 프로란 점에서 각각 선전이 기대된다. 중국과 일본 등 경쟁국의 출전선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글로비스배는 별도의 제한시간 없이 1분 10회의 속기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승 상금은 300만엔(약 3100만원). 항공료는 개인, 숙식비는 주최측 부담이다. 앞서 설명했듯 이 대회서 4강까지 오르면 가을 중국서 열리는 리민배 본선 24강에 자동 출전권도 확보하게 된다.
한국에도 신예기전이 있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메지온배 신인왕전이다. 하지만 대회 출전규정이 입단 3년차 이하(2012년 이후 입단자) 프로기사 및 한국기원 소속 연구생 10명(남자상위 7명, 여자상위 3명)으로 규정돼 있다. 외국이 미래 동량(棟樑) 발굴의 포인트를 나이에 두고 대회를 치르는 것과 달리 입단 시점이 기준이란 점이 눈길을 끈다. 물론 연구생은 그 자체로 연령 상한제 아래 운영되므로 전원이 10대지만, 프로 출전자 중엔 스무 살이 훨씬 넘어 입단한 기사들도 있다. 아무튼 별도의 예선 없이 프로와 아마추어가 동등한 자격으로 맞대결을 하는 형식은 신선해 보인다.
최근 중국에선 97년생 위즈잉이 여성으로는 국내 신인왕전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중국 신인왕전 참가자격은 20세 이하, 7단 이하로 제한돼 있으며 구리 쿵제 추쥔 저우루이양 스웨 판팅위 등이 신인왕을 거쳐 당대 최고수로 등극했다. 중국에는 위즈잉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건교배 신인왕전 외에 이광배에도 신인왕전이 있다. 중국에서 뛰어난 영재들이 속출하고 있는 현상은 이같은 바둑계 환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일본 신인왕전은 25세 이하, 6단 이하로 출전이 제한된다. 25세의 높은 연령 상한선이 노령화 및 신예기사 부족에 허덕이는 일본의 실정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나카노배(中野杯)처럼 20세 이하의 프로와 원생을 경쟁시키는 멋진 신인 무대도 있다. 작가이면서 바둑을 사랑하고 후원했던 고 나카노 코지(中野孝次)씨가 만들었다. 대만 역시 신인 육성에 큰 비중을 두고 꾸준히 밀어붙인 결과 96년생 1인자 왕위안쥔을 배출해 냈다.
바둑에서 조기 교육과 빠른 성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계 바둑의 중심축은 ‘90후(後)’에서 어느덧 ‘95후(後)’로 옮겨갔다는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95후‘란 95년 이후 출생자, 즉 만 19세 이하를 의미한다. 세계 각국이 다투어 국내, 국제 주니어대회를 만들고 지원하는 이유도 미래 싸움의 열쇠가 영재 육성에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젊은 사자들이 올해 잇달아 열릴 국제 주니어 대회서 어떤 성적표를 받아들지 기대된다. 하지만 남들이 열어주는 국제대회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주니어들이 뛰어 놀 운동장을 마련해 주려는 국가적, 사회적 노력이 병행될 때 한국바둑의 옛 영화 재현 꿈도 실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