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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 10번기, 초반 기선을 잡아라
 

이세돌(31)이 동갑라이벌 구리와의 10번기 첫판을 잡은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지난 1월 26일 베이징서 벌어졌던 1국서 이세돌은 중반 이후 완벽하게 주도권을 잡아나간 끝에 흑으로 불계승했다.
10번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승수는 6승이다. 아직은 머나먼 여정이 남아있어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긴 해도 승부에선 기세(氣勢)란 것이 있다. 일단 주도권을 잡느냐, 잡히느냐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 그런 점에서 먼저 따낸 ‘최초 1승’의 의미는 단순한 1승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승리로 이세돌은 10번기에 대한 엄청난 중압감에서 크게 해방됐을 것이다. 반대로 구리는 반드시 반격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있을 게 분명하다. 이 심리적 여유는 틀림없이 남은 10번기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점에서 더욱 중요해진 것은 2국이다. 2국서 승리한다면 이세돌이 10번기 승리 고지(高地)의 1차 문턱을 넘어선 것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패한다면 1대1이 될 텐데, 산술적으론 균형을 되찾은 스코어지만 심리적 측면에서 주도권은 추격자 쪽으로 넘어가게 돼있다. 10번기 제2국은 2월 23일 상하이 핑후(平湖)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세돌과 구리는 한 때 제각기 허리춤에 세계타이틀을 주렁주렁 매단 채 월드 최고스타를 다투던 맹장들이지만 현재 양국 1인자들은 아니다. 자국 랭킹에서도 이세돌과 구리는 나란히 3위로 처져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이 10번기가 주목받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나이 서른을 넘기기까지 국제무대에서 이렇게 길게, 그리고 팽팽하게 라이벌로 맞서온 커플은 일찍이 없었다. 똑같은 나이와 입단연도 등 다른 ‘스펙’도 둘 간의 천적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것만으로도 흥행 요인은 충분하다. 두 번째는 두 기사의 호전적 기풍이다. 수읽기가 뛰어나고 난전을 즐기는 두 사람이 격돌하면 예외 없이 일진광풍이 반면을 휩쓸고 지나간다. ‘컨텐츠’ 자체의 경쟁력부터 발군이란 뜻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아직도 국제바둑계에서 두 거인이 누리고 있는 확고한 위상이다. 양국 프로바둑계를 대표하는 상징적 선봉장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박정환과 스웨라고 답하는 사람보다는 이세돌 구리를 먼저 떠올리는 쪽이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한 중 양국 세력판도 점검 차원에서 그 둘의 격돌은 여전히 최고의 잣대 역할을 한다.
이 대결을 지켜보는 심정은 중국보다는 한국이 좀 더 절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 정상권 판도가 이른바 ‘90후’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아직 80년대 출생기사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90후’만 놓고 보면 아직은 한국이 중국에 크게 뒤진 게 사실인 만큼 한국 80년대 기사들의 역할은 좀 더 필요하다. 83년생인 이세돌은 그 80년 출생그룹의 대표 아이콘이다. 이번 10번기가 우리에게 단순한 구경꺼리가 아닌 이유다.

그렇다면 이세돌은 구리와의 10번기를 이길 수 있을까. 단기적으로 23일의 2국 승리를 기대해도 좋을까. 결국 이세돌의 현재 전력과 컨디션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좀 헷갈린다. 한마디로 ‘구름이 많이 걷혔으나 쾌청은 아닌’ 상황으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이세돌의 새해 출발은 좋지 않았다. 연초 조한승과의 국수 도전기서 실패했다. 그는 그 직후 벌어진 바둑왕전서 랭킹 1위 박정환을 딛고 우승, 13년 만의 무관(無冠) 탈출에 성공했다. 6개 대회 연속 따라붙던 준우승 징크스도 떨쳐냈다. 이세돌은 뒤이어 나흘 뒤 벌어진 구리와의 10번기 첫 판마저 쾌승함으로써 오랜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주일 뒤 열린 하세(賀歲)배에서 또 다시 실망스런 결과가 나왔다. 한 중 일 3개국서 대표 1명씩 나와 겨루는 속기전인데 우승은커녕 최하위(3위)에 그친 것이다. 패권을 다툴 것으로 예상되던 스웨와는 겨뤄보지도 못한 채 복병 무라카와에게 패배, 허무하게 탈락했다. 한 중 양국이 한 수 아래로 보는 일본, 그것도 이야마 대신 ‘대타 출전’한 무라카와에게 내용적으로도 완패했다는 점은 실망을 주기 족했다. 전체적으로 ‘갰다 흐렸다’의 반복이다.

구리의 동향에 대해선 뚜렷이 전해진 게 없으나 특별히 경계해야 할 만큼 좋은 상황이란 소문은 없다. 결국 라이벌 간의 대결은 전력보다는 현재의 기세가 승부를 좌우하는 법이다. 대국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는 것도 요령이다.
이세돌-구리 10번기의 가장 큰 특징은 점심시간 없이 1인당 4시간씩 주어진다는 점이다. 이세돌은 무려 9시간이 걸린 1국에서 매우 효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했다. 긴 제한시간이 주어질수록 이세돌 쪽이 속기파 구리에 비해 유리하다는 게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10번기 첫 판이 이세돌의 승리로 끝나면서 둘 간의 통산전적은 쌍방 17승 1무 17패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게 됐다(비공식전 2판을 포함할 경우엔 이세돌이 19승 1무 17패로 2판을 더 이기고 있다). 이날 대국 때 캐나다에 유학 중인 7살 된 딸이 날아와 응원한 것도 큰 힘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2국은 1국과 반대로 이세돌이 백을 쥘 차례다. 이세돌이 스스로 최대 약점으로 생각하는 포석 단계를 무난히 넘긴다면 또 한 번의 승리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이번 10번기는 중국 룰에 따라 거행되는 관계로 흑이 부담해야 할 덤은 한국보다 1집이 많은 7집 반이다.
이세돌-구리 10번기는 4국(4월 27일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9판이 중국 각지를 순회하며 치러진다. 6월 한 달만 쉬고 나머지는 매달 마지막 일요일 치러질 예정. 구리도 옮겨 다녀야 하지만 이동거리는 이세돌이 훨씬 길 수 밖에 없다. 잠자리와 음식, 시차(時差), 대국 환경 등 모든 면에서 아무래도 불리한 입장이다.

올해 10번기로 인해 이세돌의 개인 연간 스케줄도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각종 국내외 주요 대국 일정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둑리그만 해도 출전 여부가 의문시 된다. 참가를 하더라도 100% 출전은 무조건 불가능할 것이다. 중국 내에서 구리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한국 바둑계에서 이세돌이 갖고 있는 위상이 훨씬 높다. 이세돌이 져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이유다.

이 모든 부담은 10번기 승리로만 보상받을 수 있다. 당장 상금만 놓고 봐도 진다는 건 너무 억울한 결말이다. 승자가 500만 위안으로 우리 돈 9억원에 가까운 거액인데 반해 패자는 위로금 조로 20만 위안만 지급받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승자 독식(獨食)의 ‘데드매치’다.

2013년 한 해 동안 중국은 6명의 세계 챔프를 동시에 쏟아내며 일약 국제무대의 ‘졸부(猝富)’로 떠올랐다. 거꾸로 한국은 18년 만에 우승자 한 명 없는 무관으로 전락했다. 올해 한-중 전면전이 또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이세돌과 구리의 10번기가 올 연말 양국대결 성적 결산 때 한국 측의 ‘화룡점정’이 될지, ‘설상가상’이 될지도 아직 알 수 없다. 물론 ‘일득일실’이나 ‘피장파장’일지도 모른다. 바로 5대5 무승부로 끝나는 경우다. 2국이 종료된 후엔 자욱했던 안개가 약간이나마 베일을 벗게 되리라. 그래서 다시 결론은 하나다. 이세돌이여, 반드시 2국도 이겨 초반 기선을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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