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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악의 한 해를 보내고 있는 한국바둑
 

올해 대한민국 바둑계는 지속적으로 우울하다. 들려오는 소식마다 패했다는 소식뿐이다. 무서운 속도로 거인화(巨人化) 하고 있는 중국과 대조적으로 한국바둑은 갈수록 왜소화돼 가는 중이다. 올해 우리 프로바둑이 국제무대에서 받아든 성적표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자.

중국 대륙풍은 신년 벽두부터 강하게 불어 닥쳤다. 새로 창설된 제1회 바이링배가 진원지였다. 통합예선부터 중국세가 압도적 우세를 보이더니 저우루이양을 우승자로, 천야오예를 준우승자로 배출하고 온통 중국 잔치로 막을 내렸다. 이미 16강 대열에 한-중 비율은 2대14로 벌어졌고, 8강전이 끝났을 때는 전 좌석이 중국기사로 채워졌다.

3월에 끝난 제7회 잉씨배도 마찬가지였다. 이세돌 원성진 김지석이 24강전서 탈락했고, 박정환 이창호가 4강까지 오르며 분전했으나 중국은 판팅위라는 17세 소년을 비장하고 있었다. 준결승서 이창호를 꺾은 박정환은 한국의 잉씨배 세습 전통(?)을 이어주리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1대3으로 패배함으로써 준우승에 그쳤다.

6월 벌어졌던 제9회 춘란배 결승서의 설욕 꿈도 물거품으로 끝났다. 믿었던 이세돌이 천야오예의 제물이 됐다. 큰 승부에 강해 단기(單騎)로 적진을 허물고 우승컵의 주인이 될 것으로 기대되던 이세돌은 뜻밖에 1대2로 무릎을 꿇었다. 준우승 행진은 6월 일본서 개최된 TV아시아선수권서도 재현됐다. 한국대표 박정환이 일본 이야마에게 세계대회 첫 우승의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하지만 준우승만 해도 상당한 선전(善戰)이었다. 한국 바둑은 올해 몇 차례나 전멸의 수모를 면치 못했다. 특히 제18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한국은 중국과 똑같은 8명의 예선통과자를 안고 수적으로 대등하게(14대 13) 출발했지만 16강전엔 3대7로 변했고, 8강을 추렸을 때 한국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한국 바둑이 8강 대열에서 전멸한 것은 88년 제1회 후지쓰배, 99년 제10회 후지쓰배 이후 세 번째였다. 중국이 여섯 자리를 차지했고, 나머지 두 자리는 한 수 아래로 취급 당해온 일본에게 돌아갔다. 사실상 중국의 LG배 6연패(連覇)도 결정돼 버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국이 신설한 또 하나의 국제대회인 제1회 몽백합배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중 양국의 라운드별 잔류자를 비교하면 예선통과자 14대 35, 64강전 18대 41, 32강전 6대 25, 16강전 2대 13을 거쳐 8강은 전원 중국기사로 채워졌다. LG배에 이은 또 한 번의 전멸이었다. 이 대회는 저우루이양 대 구리, 왕시 대 미위팅의 중국기사 간 ‘4강 잔치’를 남겨놓고 있다.

남자기사들이 불을 질러놓은 상황에서 이번엔 여자기사들이 기름을 부었다. 9월 중순 열린 제4회 궁륭산병성배 세계여자바둑대회도 중국 잔치로 막을 내린 것. 왕천싱이 위즈잉과의 결승서 승리, 우승했다. 한국 박지은이 1, 2회 대회 이후 다시 패권을 되찾아와 주리란 기대가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중국은 3회 대회 때의 리허에 이어 2년 연속 월드챔피언을 보유하게 됐다. 세계 유일의 여성 개인전인 이 대회서 박지은과 오정아는 첫판, 최정은 2회전서 각각 탈락하는 허무한 무대였다.

이에 앞서 8월 체코 프라하에서 거행됐던 제30회 세계청소년바둑선수권대회 결과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이 대회는 창하오 구리 박영훈 강동윤 박정환 저우루이양 천야오예 등 훗날 최고 자리에 오른 스타들이 거쳐간 전통 깊은 등용문이다. 한 중 일 대만이 은근하면서도 치열한 경쟁을 펼쳐왔다. 그런데 올해 대회서 한국은 주니어부 송민석과 시니어부 심재익이 나란히 3위에 그쳤다. 중국은 시니어부서 5년째 연속 우승했고, 주니어부에선 6연속 우승 눈앞에서 2위에 머물렀다. 시니어, 주니어를 합해 30년간 준우승자만 5명을 냈던 일본은 주니어부를 제패함으로써 첫 우승자 배출의 감격을 누렸다. 반면 한국은 2007년 제24회 보스톤대회 시니어부서 한승주가 우승한 뒤 6년째 우승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2위도 아닌 3위권으로의 뒷걸음질이다. 이 대회가 미래 세계챔프의 산실이란 점에서 매우 우울한 패전보였다.

이상 훑어본 대로 한국바둑은 올해 남녀노소 구별 없이 골고루 부진함이 확인된다. 아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를 따지는 게 부질없을 정도로 총체적으로 고전했다. 2000년 조훈현의 후지쓰배 우승을 신호탄으로 2003년 초 이세돌이 제7회 LG배서 우승하기까지 이어졌던 한국의 세계대회 23연속 우승 행진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고대(古代) 신화’가 돼버렸다.

한국바둑의 부진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가 정체돼 있는 사이 중국이 워낙 급격한 향상을 이루면서 형세가 역전됐고, 그 간격이 갈수록 더 벌어져가고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중국은 국가, 사회, 민간이 3박자를 이루면서 유례없는 바둑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바둑의 유용성이 널리 인정받으면서 바둑 도장은 지망생들로 넘쳐나고, 국가에선 프로기사들에게 대학 선택권을 부여할 정도로 제도적 지원에 나서고 있다. 주말이면 크고 작은 아마추어 대회가 전국에서 백 개도 넘게 열리고 수 천명의 출전자가 열전을 펼친다. 세계최대규모의 바둑리그는 최고 스포츠 행사 중 하나다. 대기업들은 앞다퉈 프로기전을 만들고 바둑이벤트를 지원한다. 14억에 달하는 ‘인구 자산’까지 가진 중국에서 바둑실력이 비약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남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한국도 최근 국가대표 팀을 구성해 엘리트들의 경쟁과 연구 분위기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올해 한국바둑이 전반적으로 죽을 쑤었다지만 완전히 스윕을 당했던 것은 아니다. 국가대항 단체전인 농심배와 초상부동산배, 여성 단체전인 화정차업배와 황등사쌍등배 우승컵은 한국이 가져왔다. 최현재의 제34회 세계아마선수권대회 제패도 큰 경사였다. 최현재는 한국의 이 대회 여섯 번째 우승자로 등록하면서 프로 입단의 기쁨도 함께 누렸다.

올해 한국에게 남은 국제대회는 제18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10월 하순 시작할 제15회 농심배 정도다. 삼성화재배는 한국 5명, 중국 11명이 잔류한 가운데 10월 초 4강을 추리고 연말 우승자를 가려낼 예정이다. 입단자 조정에 의한 영재 등용기회 확대, 영재급 프로들의 집중 양성책 마련, 기전 확대를 통한 프로들의 의욕 고취, 학교 군부대 병원 등 사회 각 분야에 대한 보급 강화, 바둑의 효용성에 대한 홍보 극대화, 국가 및 기업인들의 바둑 지원 유도 등 한국바둑 재기를 위한 방안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한국은 올해 1년을 쉬었다 가는 해로 하고 다시 옛 보폭을 되찾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재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것을 학수고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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