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번 째를 맞은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초반 1라운드가 6월 10일 성황리에 끝났다. 3년 뒤 동계 올림픽이 치러질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열린 이번 ‘성인식(成人式)’에선 32명의 세계 열강이 각축한 끝에 8명이 살아남았다. 한국의 강동윤 원성진 박영훈 김지석, 중국의 커제(柯潔) 퉈자시(柁嘉熹) 스웨(時越), 그리고 대만 출신 일본기사 위정치(余正麒)가 그들이다. 이들 8명은 오는 11월 다시 한 자리에 집결, 8강전과 준결승을 거쳐 결승행 티켓의 임자를 가리게 된다.
20년간이나 대회를 치르고도 바뀌지 않은 LG배 만의 징크스가 있다. 어떤 강자도 2년 연속 LG배를 품지 못한다는 불문율인데 이는 올해도 이어졌다. 4년 터울로 벌어지는 잉창치배를 빼면 이 같은 옹고집(?) 국제대회는 오직 LG배 뿐이다. 단 한 번도 연패자(連覇者)가 없었다. 이 전통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승자 대부분은 이듬해 대회에선 우승은커녕 초반 탈락의 비참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LG배 원년(96~97년) 우승자는 이창호다. 총 31명이 겨룬 1회 대회 때 그는 4연승으로 결승에 진출한 뒤 유창혁과의 결승을 3대0 완봉승으로 장식, 7승 무패의 기록으로 보좌에 올랐다. 세계무대서 ‘이창호 왕조’가 본격화되던 무렵이어서 이듬해 2회 대회 개막 무렵 그의 2연패를 내다보는 전망이 많았으나 이창호의 종착역은 4강이었다. 전년도 결승 상대였던 유창혁에게 ‘복수의 일격’을 맞고 탈락한 것.
2회 대회 우승자인 일본 왕리청(王立誠)의 3회 대회 성적은 어땠을까. 뜻밖에도 첫 판 탈락이었다. 당시 비교적 약체로 취급되던 대만 저우쥔쉰(周俊勳) 앞에 허망하게 무릎을 꿇고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회 때에 이어 다시 이창호가 3회 대회 챔피언 벨트를 되찾았다. 그런데 이창호는 이번에도 앞서의 진행과 똑같이 4회 대회서 4강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번의 ‘저격수‘ 역시 유창혁이었다. 완벽한 ’데자뷔‘였다.
4회 대회 챔피언 위빈(兪斌)의 5회 대회 성적은 어땠을까. 역시 1회전이 끝나자마자 대진표에서 지워졌다. 그의 앞길을 막아선 기사는 서봉수였다. 이창호가 홀수 회 대회는 자기 차지라는 듯 세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5년간의 대회 중 3번을 우승한 이창호에게 LG배 최초의 2연패(連覇)를 기대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당시 바둑계는 온통 이창호 천하였기 때문. 하지만 이번에도 ‘데자뷔’ 반복이었다. 6회 대회 4강전서 그는 스승 조훈현에 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6회 대회 최후의 정상에 깃발을 꽂은 기사는 유창혁이었다. LG배에서 잇단 비운으로 ‘준우승 전문‘ 소리를 듣던 유창혁이 마침내 우승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해가 바뀌고 7회 대회가 시작되자 유창혁은 첫 관문은 통과했으나 이창호에게 패하며 짐 보따리를 쌌다. 8강이 그해 유창혁의 성적표였다. 신예 이세돌이 이창호를 3대1로 꺾고 대망의 LG배 첫 패권을 차지했다.
2003년 8회 대회가 개막됐고 이세돌은 첫 판서 위빈(兪斌)을 눕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입단 동기인 조한승의 태클에 막히면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최종 성적표엔 ‘8강’ 도장이 찍혔다. 이창호가 목진석을 결승서 꺾고 LG배 사상 네 번째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팬들이 그를 ‘LG배 터줏대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첫 연패(連覇)가 그의 손에 의해 이뤄질 공산이 높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9회 대회는 LG배 사상 최초로 한국기사가 빠진 결승전 끝에 대만 출신 일본기사 장쉬(張栩)가 마지막 승자로 기록됐다. 4회 LG배 챔프인 위빈과 결승전을 펼쳐 3대1로 역전 우승했다. 전년도 우승자 이창호는 이번에도 4강에 머물렀다. 준결승서 위빈에게 일격을 맞아 결승행 진입 길이 막혀버린 것.
2005년 제10회 대회가 열렸다. 거센 세대교체 바람 속에 싱싱한 얼굴들이 4강을 점령했다. 한국의 이세돌(당시 22세)을 구리(22), 퍄오원야오(朴文堯·17), 천야오예(陳耀燁·16) 등 중국 청를년들이 에워싼 형국이었다. 전기(前期) 우승자 장쉬는 첫 판서 쿵제(孔杰)를 이겼을 뿐 더 이상 진격할 힘이 없었다. 중국 저우허양(周鶴洋)에게 8강 티켓을 내주고 쓸쓸히 귀국했다. 우승은 천야오예의 추격을 3대2로 막은 구리의 몫이었다.
전년도 우승자에 대한 ‘저주’는 누가 풀 것인가. LG배에서 연패(連覇)하면 세계를 완전 정복했다고 봐도 좋을 만큼 그 난도(難度)는 갈수록 높아져가고 있었다. 10회 대회 우승자 구리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2006년 11회 대회가 시작되면서 구리는 박영훈과 고근태를 연파,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홍민표에게 한 칼을 맞으면서 8강에 그친 것이다. 저우쥔쉰이 홍민표와 후야오위(胡耀宇)를 연파하며 대만 바둑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 저우쥔쉰은 12회 대회서 어디까지 올랐을까. 놀랍게도 맨 바닥인 32강에서 한 발도 올라오지 못했다. 첫판서 한국의 노장 조훈현에게 혼쭐이 났다. 앞서 3회때의 왕리청이나 5회 대회 때의 위빈도 1회전서 탈락하긴 했지만 당시는 24강전 체제에 전기 챔프 시드제가 있어서 16강이었다. 전기 우승자의 32강 침몰은 저우쥔쉰이 처음이었다.
12회 대회 우승자 이세돌은 이듬해 13회 대회서도 승승장구한 끝에 결승에 진출했다. LG배 사상 전기 우승자가 이듬해에도 결승에 오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상대 역시 욱일승천 중이던 중국의 구리. 2009년 초입 백담사에서 벌어진 두 동갑 라이벌(당시 26세)의 격돌은 천하를 들썩이게 했다. LG배 최초의 2연패(連覇)에 대한 기대감이 한국 진영을 뒤덮었다. 하지만 결과는 구리의 2대0 승리. 10회 때에 이어 두 번째로 LG배를 안았다.
13회 대회는 이로부터 무려 6년 동안이나 중국세가 LG배를 지배하기 시작한 신호탄이기도 했다. 중국 기사들이 이후 6년간 LG배를 쥐고 흔드는 사이 한국 바둑은 마치 중국의 식민지라도 된 듯 누구도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중국세가 6연속 우승을 이뤘다곤 하지만 그 것이 6명의 각기 다른 얼굴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연패(連覇) 거부’란 LG배의 전통을 허물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과정도 음미할 만 했다.
우선 13회 대회 우승자 구리부터 보자. 14회 대회서 구리는 5년 연하의 같은 나라 후배 퍄오원야오(朴文堯)에게 한 방을 허용하고 8강에서 전진을 멈췄다. 그 해 우승자는 이창호를 결승서 잠재운 중국 쿵제(孔杰·당시 28세)였다. 쿵제는 이듬해 15회 대회서도 쾌속 질주 끝에 결승까지 진격한다. LG배 역사상 2년 연속 결승 진출은 12회 때의 이세돌과 14회 때의 쿵제 단 두 명뿐이다. 쿵제는 그러나 그 해 결승서 퍄오원야오에게 우승 길목을 터주며 준우승에 만족하고 말았다.
15회 챔프 퍄오원야오는 16회 대회서 1회전 승리에 그쳐 16강으로 끝났고, 16회 LG배를 통해 떠오른 젊은 우승자 장웨이제(江維杰·당시 21세) 역시 다음 해 17회 때는 16강에서 하차했다. 17회 대회를 접수한 스웨(당시 22세)는 이후 세계적 강자로 확실하게 각인됐으나 놀랍게도 18회 LG배에선 첫 판서 안형준에게 완패, 32강 탈락이란 치욕의 역사를 써야했다.
18회 대회 챔프 퉈자시(柁嘉熹·당시 23)도 LG배의 전통을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19회 대회 돌입 후 2승을 올렸지만 김지석마저 넘는 데는 실패, 8강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회가 바로 이번 평창서 벌어진 제20회 대회였다. 19회 대회 때 중국의 7연속 우승을 제지한 영웅 박정환이었지만 동료 박영훈에게 발목을 잡히면서 8강 진입에도 실패했다. 가위 누구도 뚫지 못할 LG배 징크스였다.
20년째 난공불락으로 이어져온 이 기묘한 징크스는 언제쯤 누구에 의해 깨질까. 올해 대회선 초반부터 전기 우승자가 탈락하면서 그 해답도 최소 1년 이상 미뤄지게 됐다. 연패(連覇)란 특정 기사의 독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변화를 원하는 승부세계와는 맞지 않는다. 특정인의 장기집권을 완강히 거부하고 꾸준히 새 물결을 이끌어 온 LG배 정신 덕분에 세계 바둑은 항상 짜릿하고 흥미로운 격전장으로 각광받아 왔다. 징크스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