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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바둑 완전 접수한 박정환-신진서 투톱
 
▲ 결승에서 형제대결을 벌이게 된 신진서(왼쪽)와 박정환이 익살스럽게 주먹을 서로 겨누는 포즈를 취했다.

준결승까지 마친 제24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에 살아남은 사람은 딱 2명, 신진서(19)와 박정환(26)이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한 바둑계 반응은 대체로 2가지다. 최근 우리 바둑의 국제무대 성적을 감안하면 놀라운 경사이고, 한국에서 그 2명이 누군가를 맞추는 것은 정답(?)이 너무 뻔하다는 것이다.

한국 바둑에서 박정환 신진서 두 기사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져가고 있다. 모든 수치(數値)가 월등한 정도를 지나 압도적이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빼놓으면 우리 바둑계 얘기를 펼치지 못 할 정도다. 가뜩이나 중국 일색의 국제 바둑계에서 둘이 없었다면 완벽하게 오성홍기의 붉은 깃발 아래 파묻혔을 것이다.

LG배의 경우 21회 대회부터 23회 대회까지 3년 간 한국은 우승은커녕 결승진출자 한 명도 올려놓지 못했다. 그 질곡의 시간을 멈추게 한 주역이 박정환과 신진서 두 사람이다. 준결승서 한국 기사가 나란히 이겨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지은 것은 강동윤과 박영훈이 결승을 치렀던 20회 대회 이후 4년 만이다.

한국 바둑은 올해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위기를 맞았었다. 메이저급 대회는 아니지만 8월의 국수산맥배 4강서 전멸하더니 9월 열린 삼성화재배 때 8강, 그리고 10월 몽백합배 때는 16강에 단 한 명도 올려놓지 못했다. ‘부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멸’이었다. 이번 LG배 우승 조기 확보는 이런 흐름을 단숨에 돌려놓은 대 사건이었다.

한국이 2019년 한 해 국제무대서 고전하는 틈에도 둘은 자기 몫을 충실히 해냈다. 박정환은 월드챔피언십에 이어 춘란배를 품에 안았다. 박정환이 몽백합배서 중도 탈락하면서 춘란배는 중국이 석권 중인 세계 메이저 타이틀 중 한국이 보유한 유일한 기전으로 남아있다. 신진서는 지난 연말 이후 이번 LG배까지 연속 세 번째 결승에 올랐다. 세계 메이저 대회 3연속 결승 진출 기사는 한 중을 통틀어 신진서가 유일하다. 그는 올해 마이너급 대회이긴 하지만 TV아시아선수권도 접수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는 더 짙게 보이는 법이다. 금년 시즌 박정환 신진서가 분투하는 과정에서 다른 한국기사들이 보여준 활약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춘란배 결승까지 올라 박정환과 패권을 다투었던 박영훈 정도 외엔 이렇다 하게 명함을 내밀 기사가 보이지 않은 한 해였다.

박정환과 신진서의 절대적 비중은 국내 무대에서도 똑같이 이어졌다. 올해 열린 국내 메이저급 기전 결승 중 이들 이름이 모두 빠진 대회는 박하민과 나현이 겨룬 크라운해태배(2월)와 9월 열린 참저축은행배(홍성지 대 신민준) 2개뿐이었다. 신진서는 맥심배(4월)와 GS칼텍스배(5월)를, 박정환은 바둑TV배(8월) 및 용성전(10월)을 차지했다. 두 스타가 결승서 마주친 대회만 해도 2개(바둑TV배, 용성전)나 됐다.

그들의 압도적인 위상은 랭킹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2014년 1월 이후 6년 가까이 한국랭킹 1위는 박정환과 신진서 두 사람만의 각축장이었다. 다른 어떤 기사도 1, 2위 자리는 넘보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2018년 10월까지 박정환이 59개월 연속 1위를 차지하다 그해 11월 신진서가 박정환의 아성을 깼다. 신진서 천하는 일단 2개월에 그쳤다. 1월에 박정환, 2월 신진서, 3~5월 박정환으로 반전을 거듭하다가 2019년 6월 이후 10월까지 5개월 연속 신진서가 1위를 지켰다. 지난 5일 발표된 11월 랭킹에선 다시 박정환이 신진서를 2위로 밀어내고 1위를 탈환했다.

신진서의 별명 가운데는 ‘저승사자’란 것도 있다. 최정상권에 머물며 호시탐탐 선두를 노리는 경쟁자들에게 압도적 우위를 보이면서 얻은 별명이다. 2살 위 이동훈에겐 초기 9전 전승을 달리는 등 격차를 보이면서 현재 10승 1패로 앞서 있다. 3살 연상인 변상일 역시 신진서에게 2승 15패의 일방적 스코어로 몰리는 중이다. 이 안에는 10연패가 포함돼 있다.

입단 동기생인 한 살 위 신민준도 예외가 아니다. 신진서가 최근 7연승을 포함해 16승 4패, 80% 승률로 독주하고 있다. 한국랭킹 3~6위권 강호 중 신진서를 상대로 가장 선전한 기사는 김지석이지만, 그 역시 최근 4연패 포함 4승 7패로 몰리고 있다. 신진서 기준으로 이들 4명과의 상대 전적을 합산하면 48승 11패로 승률 8할이 훌쩍 넘는다. ‘저승사자’란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박정환의 위용도 신진서에 뒤지지 않는다. 박정환의 완력에 가장 피해(?)를 본 기사는 김지석(30)이었다. 무려 30회를 싸우고 7승밖에 올리지 못해 2할이 약간 넘는 승률을 기록 중이다. 박정환은 2015년 초에 끝난 제 19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결승 2대1 승리 등 고비마다 김지석을 울리며 그의 ‘천적’ 역할을 해왔다. 박정환은 이동훈에겐 7승 2패, 변상일에겐 6전 전승을 마크 중이다. 유일하게 신민준과의 대결에서만 5할 승률(3승 3패)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2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는 없는 법. 최정상 두 자리를 함께 누리고 있는 박정환과 신진서 둘 간의 맞대결 성적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팽팽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의외로 이 스코어 또한 일방적이다. 박정환이 무려 15승 4패의 압도적 우위를 지키고 있는 것. 작년 2월 이후 신진서가 박정환을 상대로 9연패를 기록 중이다.

두 기사는 내년 2월 10일 시작되는 제24회 LG배서 패권을 걸고 결승 3번기를 펼친다. 둘의 결승전 만남은 이번이 네 번째. 앞서 크라운해태배(2018년)와 바둑TV배, 용성전(이상 2019년)서는 박정환이 모두 승리했다. 일단 신진서가 좀 더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도다.

결승 진출 직후 인터뷰에서 신진서는 “누가 올라오든 내 바둑을 두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또 한 판의 준결승(박정환 대 타오신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였다. 둘 중 누가 좀 더 편한 상대냐는 질문에 신진서는 “까다롭기는 박정환 9단이지만 모두 어려운 상대”라며 “어느 쪽이 꼭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식의 마음은 없다고 했다. 원론적인 답변이지만, 지명도와 상대전적서 앞선 박정환을 의식하고 있음이 행간에 느껴진다. 신진서는 “상대가 누가 되건 이기면 무척 의미 있는 우승이, 패한다면 매우 아픈 패배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절박한 신진서에 비해 박정환의 답변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진서 상대로 과거 전적이 좋았다지만 운이 많이 따라주었던 결과”라며 “초속기 대결이 대부분이었는데 1인당 3시간짜리인 이번 LG배 결승이 진짜 승부”라고 했다. “진서는 갈수록 강해지는 나이인 만큼 결승전이 벌어질 때는 더 어려운 상대가 돼 있을 것”이란 말도 했다.

신진서에게 이번 LG배 결승은 첫 세계 메이저 등용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만약 박정환을 꺾고 정상에 선다면 만 20세 생일을 한 달 가량 앞둔 시점이 된다. 지금까지 10대에 세계 메이저를 정복한 기사는 세계적으로 단 9명뿐이다. 그가 이 기록을 의식하고 있다면 이번 결승이 마지막 기회가 되는 셈이다.

두 사람은 국제무대서 강한 외풍을 온몸으로 함께 막아온 동지다. 하지만 바둑 개인 타이틀전에서 승부공동체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둘에겐 목숨 걸고 싸울 일만 남은 것이다. 박정환의 마무리 발언에서 동지와 타도 대상을 넘나들어온 두 승부사의 속마음이 전달돼 온다.

“삼성화재배나 몽백합배 참패는 전체적인 수적 열세로 인한 부담감 탓도 컸다. 진서와 내가 결승에 오른 것이 경사인 동시에 한계를 노출한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도 안다. 책임감을 느낀다. 진서에겐 결승전에 한국 기사 2명이 올라갔으니 부담감을 털고 함께 멋진 결승전을 치르자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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