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한국바둑리그부터 전임 심판제도 적용
세월은 변화를 동반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게 이 세상엔 참으로 많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길거리를 걸으며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컴퓨터와 통신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모든 궁금증을 그 자리에서 풀게 만든 인터넷 검색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가격과 장비가 필요하던 동영상 촬영과 전송이 불과 20년 사이 휴대폰 하나로 해결되는 시대가 왔다.
환골탈태까지는 아니지만 바둑 또한 과거에 보았던 모습에서 너무도 달라졌다. 과거엔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도 있고, 바둑만의 특성이라고 꼽았던 건데 이제는 없어진 것도 있다. 시대상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바둑이 스포츠로 옷을 바꿔 입으면서 생긴 변화들이다. 어쨌거나 반세기 전 사랑방에서 전통적 대국을 즐겼던 우리 할아버지들이 보시면 현기증을 일으킬 만 한 장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바둑이 최근 수십년 사이 겪은 가장 큰 변화로는 관중 시스템의 도입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종전의 바둑 게임은 대국자 2명만으로 족했다. 물론 과거에도 대국자들을 둘러싼 구경꾼들은 존재했지만, 그들을 관중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생겨난 공식 타이틀전은 아예 관객들의 대국실 접근을 차단하고 밀실서 대국했다.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대국자, 입회인, 기록자 외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다.
지난 여름 일본서 벌어진 세계 페어바둑선수권대회는 운영 측면에서 인상 깊은 행사였다. 대국실을 완전 개방한 채 치러졌다는 점 때문이었다. 관객들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판 앞에 와서 몇시간이고 지켜보았다(물론 대국자와 직접 접촉을 차단하는 약간의 거리는 존재했다). 관중들은 골프장의 갤러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진지했고 열정적이었으며 (자국 팀의 승리를 비는 마음이) 간절했다.
일본이나 중국에선 최근 몇 년 사이 무대 위에 대국석을 설치하고, 해설자들이 대형 기반을 통해 객석의 관객들에게 해설하는 방식이 보편화돼 가고 있다. 중국에선 대형 강당 아닌 작은 공간에 10여개의 관객용 의자만을 준비하고 대국 광경을 직접 볼 수 있게 하는 대회도 늘었다. 관객과 선수 간의 지리적 간격을 조금이라도 더 좁혀주기 위한 노력이다. 예전 사랑방 바둑, 또는 대국실 공식전에선 꿈도 못 꾸던 일들이다.
과거 특성을 말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됐던 것 중 하나가 바둑엔 심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도 달라져가고 있다. 공식시합 바둑에서 제한적 임무를 담당하던 입회인이란 게 있긴 했지만 심판과는 권능이나 책임 범위가 달랐다. 바둑이 스포츠의 일원으로 편입되면서 바둑 심판의 존재는 강화돼갔다. 2013년 한국바둑리그부터는 아예 전임 심판제도를 적용했다. 바둑이 심판도 필요 없이 게임을 치르는 몇 안 되는 승부란 자랑은 이제 할 수 없게 됐다.
감독과 코치란 게 바둑계에 등장한 것도 바둑의 스포츠 편입과 궤를 같이한다. 다만 모든 프로바둑 대국에 감독과 코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바둑리그 등 몇몇 단체 대회 때만 존재한다. 바둑리그 팀에게 감독은 오더와 선수 관리를 통괄하는 필수 작재지만 코치는 없어도 무방하다.
간과해선 안 될 것은 바둑과 스포츠 종목의 감독 및 코치 역할이 결정적으로 다른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바둑 감독이 대국 도중 야구 감독이나 코치를 흉내내 선수들에게 손짓 발짓 사인을 보냈다고 하자. 훈수로 간주돼 딩징 몰수패가 선언되고 감독 코치 선수는 모두 중징계를 받을 것이다. 아무리 바둑에 심판, 감독, 관중이 들어섰다고 해도 사인은 영원히 바둑에 다가갈 수 없다.
국내 바둑계는 아직 못 이뤘는데 중국 등지에선 버젓이 자리 잡은 것도 있다. 바로 선수 계약 및 스카웃, 트레이드 등이다. 이 부문들도 원래는 바둑과 거리가 먼 용어들이었는데, 중국 바둑리그가 첨단 자본주의 방식 으로 무장하고 서구 스포츠 시스템을 접목하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 바둑리그는 계약 아닌 드래프트제로 매년 선수가 바뀌고 있다. 스카웃이나 트레이드는 아직 먼 나라 이야기다.
▲ 일본 도쿄 현지 대국장 전경
경기 도중 휴식 또는 점심식사를 위해 일시 중단하는 종목은 바둑이 유일하다. 1인당 3시간~8시간에 이르는 긴 대국은 인터미션이 불가피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일부 타이틀전에 점심 휴식제를 적용해왔는데 이제는 거의 없어져는 추세다. 휴식시간 도중 부정행위 개연성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일본의 이틀걸이 대국은 아직도 점심 휴식제와 첫날 봉수(封手) 방식을 여전히 운용하고 있다.
기보(棋譜) 용지도 사라졌다. 이것 역시 십여년 전만 해도 공식대국에선 필수품이었다. 기록자가 옆에 붙어 앉아 대국자들이 착점한 수순을 육필로 기록지에 기입해 넣었다. 요즘은 인터넷 화면 착점으로 자동 저장되기 때문에 그런 수고가 필요 없어졌다. 요즘 몇몇 국제대회는 대국 종료와 함께 선명하게 출력된 기록지를 관객이나 관계자들에게 배포하는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많은 변화 속에서도 특히 무겁게 감지되는 변화는 따로 있다. 대국의 기본 도구인 바둑판과 바둑알을 구경하기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기원용 판 아닌, 다리가 달린 가정용 바둑판은 바둑 애호가들에겐 거의 가보(家寶)급의 필수 장비였었다. 하지만 인터넷 대국이 보편화된 지금은 그 귀히 모시던 바둑판들이 지하실이나 광으로 쫓겨갔다. 아예 불쏘시개로 내버리는 경우도 있어 보인다.
시대의 변화와 무관하게 홀로 전통을 고수하는 분야는 이 세상에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눈부신 과학 발전과 이기(利器)의 등장이 정체를 용납하지 않는다. 바둑처럼 대표적인 전통 문화일 경우 그 변화의 폭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크다. 그에 따르는 충격도 자연히 클 수 밖에 없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때와 장소에 구애됨 없이 언제건 수담을 즐길 수 있게되면서 바둑 팬들 입에선 “세상 좋아졌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동경해 마지않던 대국장에 입장해 프로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보게 된 것도 엄청난 축복이다. 첨단 매체들이 언제 어디서건 최고 수준 대국을 쏟아낸다. 바둑팬들에겐 분명 천국이 도래했다.
하지만 얻은 것 못지않게 대가도 치르고 있다. 바둑판 사이에 마주 앉아숨결과 손길 교환하는 전통 대면(對面) 대국의 참맛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상대 표정 살펴가며 착점 소리로 속마음 주고받는 재미와 정취가 실종돼 간다. 많은 동호인들이 비싼 인공지능 기재 구입해 뜻도 모르고 흉내 내는 시대다. 그러나 묘수풀이집 돌려 읽고 무릎치며 한 점씩 늘어가던 예전의 멋스러움은 찾을 길 없다.
시간은 진화(進化)를 가져다 주는 대가로 전통의 여유로움을 빼앗아간다. 그런 이치를 바둑만큼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야가 또 있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