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 으쓱해진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 평소 애국심 같은 것 없어보이던 사람들조차 그렇다. 대한민국의 숱한 스포츠맨, 예술인, 연예인들이 그런 역할을 맡아 국민 ‘기쁨조’로 활약해왔다. 물론 바둑이 빠질 수 없다. 인구수나 영토 크기가 몇 배는 더 큰 중국과 일본을 따돌리고 우리 선수가 정상에 설 때마다 국민들은 삶의 시름을 잊고 환호했다.
1988년 후지쓰배를 기점으로 30여년 동안 열린 메이저급 국제바둑대회에서 한국은 62회에 걸쳐 우승, 중국(45회)과 일본(11회), 대만(1회)을 압도해왔다. 배출한 메이저 챔피언 숫자는 중국이 21명으로 한국(15명)에 앞선다. 이 자료는 오히려 중국이 단발성 챔피언 비율이 한국보다 훨씬 높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제1회 잉씨배서 우승하고 돌아온 조훈현. 바둑계에서 카퍼레이드는 이 때가 유일했다.
▨ 89년 조훈현, 제1회 잉씨배 제패
대만 재벌 고 잉창치씨가 야심차게 기획한 잉씨배는 돌이켜 보면 한국 바둑의 중흥을 위해 만들어진 제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흐름이 그랬다. 88년 원년 대회부터 잉씨배는 드라마적 요소가 가득했다. 결승전 캐스팅도 완벽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조훈현의 상대는 중국에서 ‘철의 수문장’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국민 영웅 녜웨이핑이었다. 5번기 내용도 엎치락뒤치락 끝에 3대2의 극적 스코어로 마무리됐다.
이 대회 주최측은 중국 4장, 일본 6장, 대만 3장의 출전 티켓을 배정했고 한국엔 미국, 호주 등과 똑같이 단 1명씩만 초청장을 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불공정’을 뒤엎는 결과에 몇 배 더 폭발하고 열광한다. 어른 키만 한 우승컵과 거금 40만 달러 상금의 주인은 단기필마로 참전한 조훈현이었다. 조훈현은 바둑계 사상 첫 카퍼레이드 환영 인파에 파묻혔고, 첫 ‘바둑올림픽’ 우승국 한국에선 바둑교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등 바둑 붐이 전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 16세 6개월의 나이로 세계를 제패한 이창호(왼쪽). 오른쪽은 결승 상대 린하이펑 9단.
▨92년 이창호, 제3회 동양증권배 우승
한국 바둑 르네상스를 수놓은 이창호가 국내 기전에 이어 세계에 첫 태극기를 꽂은 무대가 제3회 동양증권배였다. 평생 17회에 걸쳐 세계 메이저 타이틀을 정복, 바둑 역사상 메이저 타이틀 획득 순위에서 1위를 고수 중인 이창호의 우승 역사가 여기서 출발했다는 얘기다. 이창호의 17회 세계 제패 기록은 이세돌(14회) 조훈현(9회) 구리 커제(이상 8회)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있다.
당시 이창호의 나이는 16세 6개월로, 이것 역시 아직도 세계 바둑사상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있다. 당시 결승 상대인 린하이펑은 50세.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관록으로 똘똘 뭉친 대가를 17세 소년이 뛰어넘을 것으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승 5번기를 3승 2패로 장식하고 첫 세계 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린 이창호에게 온 국민들이 열광했다. 10대 세계 챔프, 비 유학파의 첫 세계 정상 등극 등 극적 요소들이 뒤섞여 국민들의 시름을 통쾌하게 씻어주었다.

▲ 제5회 진로배에서 국제 연승방식 대회 기록인 9연승을 기록한 서봉수(오른쪽)와 결승 상대 마샤오춘 9단.
▨97년 서봉수, 진로배 싹쓸이
농심배가 출범하기 이전엔 진로배가 있었다. 농심배와 똑같은 방식의 국제 연승전으로, 93년부터 97년까지 5년간 열렸다. 한국은 5년을 모두 우승했고, 그 때부터 국제 연승전 강세 전통이 만들어졌다. 마지막 진로배였던 1996-97년 제5회 대회가 특히 압권이었다. 한국의 2번 주자로 나선 ‘순 국산바둑‘ 서봉수 9단이 중국, 일본 기사 간판 기사들을 볏단처럼 베며 대회를 끝내버렸다. 국제 연승전 사상 전무후무한 9연승이었다.
그 해 대회는 11국 만에 끝났다. 서봉수의 9승을 빼면 중국 1번 주자로 나온 위빈이 거둔 2승이 전부였다. 서봉수는 우승 팀 배분금과 대국료, 연승상금을 합해 1억4천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대기 중이던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는 한 판도 두지 않고 각각 2500만원씩 손에 쥐었다. 당시 국내 일간지 상당수가 이 뉴스를 사회면 톱기사로 배치했다. 하지만 후원사인 진로는 외환 위기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5회를 끝으로 대회 주최권을 내려놓았다. 세기 말 IMF 사태의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 상하이 대첩을 마치고 돌아온 이창호(오른쪽) 9단이 공항에 마중 나온 보도진과 팬들에 둘러싸여 있다.
▨ 2006년 이창호, 상하이 대첩
불패의 영웅 이창호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바둑사에 또렷이 각인한 대회였다. 2006년 끝난 제6회 농심배가 그 무대. 연승전의 묘미를 또 한 번 만끽하게 만든 대회이기도 했다. 국수전 도전기서 최철한에 0대3 스트레이트패 하는 등 난조를 보이는 가운데 이창호가 2라운드 출전을 위해 상하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창호는 3개월 전 1라운드 최종전서 뤄시허를 이겼지만, 아직도 그의 앞엔 중국과 일본 선수 각 2명씩 4명이 남아 있었다. 한국은 이창호 혼자뿐이었다.
이창호는 상하이 대회 첫 판인 일본 장쉬전에 이어 중국 왕레이, 일본 왕밍완전을 모두 이겼다. 마침내 2월 26일 중국 왕시와의 최종국. 이 판마저 승리, 파죽의 5연승으로 한국의 대역전 우승이 결정됐다. 저 유명한 상하이 대첩의 완성이었다. 이 스토리는 훗날 ‘응답하라 1988’이란 TV 드라마 소재로도 등장했을 정도로 센세이셔널했다. 국가 연승전에서 최종전을 포함한 5연승 마무리는 2021년 제22회 농심배서 신진서에 의해 딱 한 번 재현됐다.

▲ 2020년 제7회 글로비스배 세계 20세 이하 대회서 중국 강자들을 연파하고 우승한 문민종.
▨2020년 문민종, 제7회 글로비스배
규모는 앞서 등장한 대선배들의 사례와 비교가 안 되지만 문민종의 제7회 글로비스배 우승도 우리 바둑 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 낭보였다. 지난 해 열렸던 7회 대회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만 20세 이하의 각국 유망주들 틈에서 국내 랭킹은 150위의 문민종이 가장 끝까지 남았다. 결승 토너 8강전 첫판서 셰커(謝科) 8단을, 4강전에서 랴오위안허(廖元赫) 8단을 눕힌 뒤 결승서 리웨이칭(李維淸) 8단에게 백 불계승했다.
문민종이 제압한 3명의 중국 기사는 모두 2000년생으로 한국 신진서와 동갑이다. 중국이 이들에게 한국 에이스 신진서 타도의 선봉이 돼 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은 간절하다. 당시 중국내 랭킹은 셰커가 16위, 랴오위안허 22위, 리웨이칭은 13위였다. 2017년 8회 영재입단대회를 통과해 프로가 된 문민종은 그러나 2021년 8회 글로비스배에선 4위에 머물렀다.

▲ ▲LG배 사상 두 번째로 한 중 결승전을 장식한 신민준. 1국에선 온몸을 백색 의상으로 덮어 더욱 화제가 됐었다. (사진 제공=한국기원)
▨2021년 신민준, 25회 LG배 정상 등극
그렇다면 최고의 국제기전으로 높은 인기를 누려온 LG배에선 누구를 최고 스타로 꼽을 수 있을까. 우승 회수로만 본다면 4번 우승한 이창호, 각 2회씩 정상에 올랐던 이세돌과 구리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최고 명승부의 조건을 갖추려면 남다른 임팩트와 극적 요건이 필요하다. 역대 LG배 결승전은 묘하게도 한국 대 한국, 중국 대 중국의 동국인 대결이 상당한 비율(25회 중 15회, 60%)을 차지해 왔다.
LG배 26년 역사 동안 한국 기사가 외국 기사를 꺾고 우승한 예는 99년 3회 때의 이창호(마샤오춘 상대 3대0)와 지난 2월 등극한 신민준(커제 상대 2대1) 2명뿐이다. 마샤오춘도 강자였지만 이창호 앞에선 기를 펴지 못하던 때여서 감동을 남기진 못했다. 반면 신민준은 여전히 세계 정상을 넘보는 커제에게 첫판을 내주고 2대1로 역전 우승을 이끌어내 큰 갈채를 받았다. 나이는 1년 아래지만 입단 동기인 신진서의 24회 대회 제패에 이은 ‘양신(兩申)’의 잇단 쾌거가 LG배를 무대로 펼쳐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