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바둑 중심국이었으나 이후 수십년간 몰락을 거듭했다. 2000년대에 들어선 후엔 십수년 이상 한국과 중국의 싸움이었고 일본은 들러리 취급을 받아왔다. 그 일본이 최근 살아나고 있다. 주인공은 그간 독보적 일인자로 군림해온 이야마 유타(井山裕太 31)가 아닌 이치리키 료(一力遼) 8단이다.
각종 국제무대서 돋보이는 활약
올해 23세인 이치리키의 최근 활약은 눈부시다. 우선 제9회 잉씨배서 준결승에 올라있다. 28강전서 중국 미위팅, 16강전서 한국 안성준을 꺾은 뒤 8강전서 중국 타오신란마저 물리쳤다. 4년 주기에 최대 우승 상금으로 권위가 높은 잉씨배서 일본기사가 4강에 상륙한 것은 1996년 요다 노리모토 이후 24년만이다. 전체 세계기전으로 눈을 돌려도 22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때의 이야마(준우승) 이후 3년만에 4강 진출자가 나왔다. 이치리키는 커제를 누르고 올라온 중국 셰커와 결승 진출을 다툴 예정이다(날짜 미정).
이에 앞서 열린 제4회 몽백합배에선 8강까지 진격했다. 8강전서 셰커에게 패해 탈락했지만, 8강 멤버 중 유일한 비(非) 중국기사가 이치리키였다. 최근 막을 내린 제25회 삼성화재배서도 이치리키의 활약은 빛났다. 세계 톱클래스로 인정받는 중국 구쯔하오와 한국 신민준을 연속 제치고 8강 고지를 밟았다.
이치리키의 이 같은 활약은 확실히 경이적이다. 일본을 대표해온 이야마도, 자국 내에서 정상을 놓고 이치리키와 경합 중인 시바노 도라마루, 무라카와 다이스케, 쉬자위안 등 경쟁자들과 비교해도 확실히 돋보인다. 최근엔 국내 무대서도 종횡무진이다. 노장 하네 나오키를 3대0으로 완파하고 일본 7대 타이틀 중 하나인 기성(碁聖)에 취위했다. 용성을 합해 국내 2관왕이다.
이치리키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기원 원생 생활을 시작, 중학 1년이던 2010년 13세 때 프로가 됐고 곧바로 뛰어난 성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20세 이하 영재 대회는 온통 이치리키의 차지였다. 나카노배(2012년) 오카게배(2013, 14년), 글로비스배(2014년) 등을 휩쓸었다. 미래 주역들 간의 세계 잔치인 글로비스배 때는 같은 일본내 경쟁자 쉬자위안을 꺾고 원년 챔프에 올랐다.
세계 유일의 기자 프로기사
2014년엔 시다 다쓰야를 2대1로 따돌리고 39기 일본 신인왕에 등극했다. 17세 3개월 때로, 요다 노리모토가 가지고 있던 최연소 우승 기록을 2개월 앞당긴 신기록이었다. 2016년 19세 때 농심배서 이세돌을, 2019년 한중일 용성전에선 커제를 누르는 등 주목할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2017년 중국리그에도 진입하면서 이치리키의 국제화는 더욱 가속페달을 밟았다.

이치리키는 속기에 특히 능한 재주형이다. NHK배, 용성전, 아함동산배 등 속기 타이틀전 입상 경력이 유난히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용성전에선 3연패 포함 총 4회나 우승했다. 하지만 재주 외에 성장 배경과 현재 신분을 놓고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이치리키는 프로기사(棋士)직 외에 언론사 기자(記者)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일을 함께 수행하고 있는 사람은 세계적으로 이치리키가 유일하다.
이치리키는 도호쿠(東北) 지역을 대표하는 일간지 카호쿠신보(河北新報)에 소속된 기자다. 카호쿠신보는 1897년 1월, 이치리키 켄지로우씨가 일본 미야기 현에서 창간한 신문이다. 연간 매출액이 200억 엔에 이르며 도호쿠 지방 6개 현(미야기, 아오모리, 아키타, 이와테, 야마가타, 후쿠시마)를 커버하는 언론사다. 역사가 무려 123년에 달한다. 이치리키 료는 창업자의 직계 자손이다.
이치리키는 일본 프로기사로는 드물게 대학을 거쳤다. 장인(匠人)의식이 뿌리 깊은 일본에선 바둑에 뜻을 둔 젊은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기도(棋道) 외길만 걷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이치리키는 2016년 명문 와세다 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4년만인 지난 3월 졸업했다. 장자(長子)앞으로 언젠가 신문사 경영을 떠맡기기 위한 부친의 뜻이 강하게 작용했다.
이치리키 본인도 지금까지 온힘을 쏟아온 바둑의 길을 당장 중단할 생각이 없다. 가족들도 이치리키의 뜻을 존중한다. 이치리키의 부친이자 카호쿠신보 사장인 이치리키 마사히코씨는 “장래 언젠가엔 회사를 이어받아야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프로기사 경험은 신문사 경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기원 고바야시 사토루 이사장은 최근 이치리키 부친을 향해 “아드님은 일본 바둑계의 보물” 이라며 “바둑계를 위해 놓아주실 것”을 공개 석상에서 간청했다.
“시상과 수상 일인이역 맡는 게 꿈”
이치리키의 ‘투잡’은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은 눈치다. 신문사에 상근(常勤) 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둑 관련 기사는 여러 번 썼다. “대학 시절보다 오히려 시간 여유가 더 생겼다. 내가 성적을 내고, 그 결과를 내가 직접 우리 신문에 기사화하는 방식으로 회사의 배려에 보답하고 싶다”고 말한다.
바둑 타이틀전이 종료되면 주최사 대표가 시상식 때 우승자에게 우승트로피 또는 상금 봉투를 전달한다. “내가 우리 신문사 주최 대회서 우승해 시상과 수상 1인2역을 맡게 된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치리키의 이 같은 소망을 푸는 것은 가까이 와있다. 기성(碁聖)전을 주최하는 신문위기연합 소속 14개 언론사에 카호쿠신보도 포함돼있기 때문이다.
이치리키의 스승은 한국계 송광복(56) 9단이다. 그 옛날 주변에선 이치리키는 재벌가 자손이어서 프로가 목표는 아닐 것이라고들 수근댔다. 하지만 송 9단은 “재주와 열정으로 보아 이치리키는 20살이 되기 전 타이틀을 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친에게도 그렇게 설명하고 이치리키를 맡았다”고 했다. 기성 취위식에서 은사 송 9단이 “이치리키군은 어릴 때부터 잠을 쫓으며 바둑에 집중하는 노력파였다. 대학 생활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첫 우승은 더 빨리 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이치리키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행동도 조심스러운 성격이지만 자신에 엄격하다. 어렸을 때부터 패하면 어쩔 줄 몰라 할 만큼 승부욕도 강하다. 재벌가 상속인이면 좀 느슨해질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으로 분류된다. 이치리키가 파종(播種)한 일본 바둑 재건의 씨앗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열매를 맺을까. 한 중의 대결장이던 세계바둑은 이치리키로 인해 다시 한 중 일 3파전 전장으로 회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