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토록 우여곡절로 가득한 해는 일찍이 없었다. 전 세계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만 국면을 바둑으로 압축해 보면 더 실감이 난다. 세계 바둑계는 새해 벽두부터 셧다운 됐다. 제24회 LG배를 간신히 끝내자마자 코로나 바이러스 광풍이 몰아닥쳤다. 한 두 달 괴롭히다가 사라지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국가 간 이동이 막히면서 특히 국제대회가 대거 발이 묶였다. 바둑계로선 심각한 위기였다.
최대의 위기 맞은 국제 바둑계
코로나 사태에 해결사로 등장한 것이 인터넷이었다. 바둑 동네에서 인터넷 원격(遠隔) 대국은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지구 반대편에 앉은 상대와 시간 불문, 장소 불문 대국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20년쯤 된다. 바둑이야 말로 현대 과학에 가장 많이 신세를 진 아이템 중 하나란 말까지 나왔던 이유다. 어떤 육체 스포츠가 인터넷을 통해 실제 경기를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비대면(非對面)이 강조되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바둑은 인터넷을 통해 통쾌하게 혈로를 뚫었다.
제25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이 그 모델이었다. 주관사인 한국기원은 대국 시간을 단축하는 방식으로 대회장 공간을 최대한 확장, 인간 밀도(密度)를 조절했다. 그런 노력으로 감염 가능성을 줄이면서 예선을 치렀고 본선도 16강전까지 성공리에 마무리해 놓은 상황이다. 중국과 일본, 대만도 한국과의 협의를 거쳐 자체 예선 진행에 적극 협조했다. 이 방식은 2020년 코로나 사태 속에서 국제 바둑대회의 생존 모델이 됐다. 거의 대다수 국제 기전들이 같은 형식으로 전체 일정을 마쳤거나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원격 대국 방식을 구현하면 코로나 바이러스 걱정 없이 대회를 치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란 얘기다. 이번엔 치팅(cheating)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아마추어의 취미 활동이라면 각자 자기 집에 인터넷을 설치하고 착점을 전달하면 되겠지만 프로 대회는 그럴 수 없다. 훈수가 개입될 개연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공정성이 생명인 프로 바둑으로선 중요하고 심각한 선결 과제였다.
훈수도 종류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 고수(高手)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가 가르쳐 주는 훈수다. 현대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요즘 인공지능(AI) 바둑 최고 소프트웨어는 프로기사를 무려 2~3점까지 접는다는 시대다. 인터넷 원격 방식으로 국제대회를 하면서 한국 등 각국 중앙기원들은 다양한 새 규정을 마련했다.
인터넷과 인공지능의 위력
출전 선수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사양을 규제하고, 별도의 외장 그래픽 카드 사용도 금지했다. 대국장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으며 화장실 출입까지 진행요원이 따라다녔다. 입장 때는 전자기기 소지 검사를 받도록 했다. 이것으로 모자라 대국실 안에는 여러 종류의 카메라를 설치했다. 출전국 관계자들은 해당 현장화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유하는 방식을 취했다. 모든 선수들이 감시와 통제속에서 바둑 승부에 임했다.
인공지능 바둑이 이처럼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5년 전만 해도 인공지능은 인간 최고수들보다 약했다. 인터넷 대회 주최측은 인간 고수의 훈수 방지에만 주력했을 뿐 기계에 의한 부정행위 방지는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어쨌건 인류는 인터넷을 이용해서, 그리고 부정 방지를 위한 각종 보안 장치를 통해 완벽하게 전염병을 극복해 낼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또 복병이 등장했다. 이번엔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컴퓨터 시스템 각종 장비들이 사고를 쳤다. 지난 8월 온라인으로 열렸던 제21회 농심배 국가 대항전서 접촉 불량으로 대국이 중단된 사태가 하나의 예다. 한국 박정환이 중국 판팅위를 압도하고 골인 직전에 터진 사고여서 한 중 양국 바둑계 모두 난리가 났다.
현장 동영상을 반복 돌려본 결과 박정환은 시간 내에 정상적으로 클릭했음이 확인됐다. 그런데 마우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엔 중국 측의 강경 입장 속에 시간패로 처리되는 듯 하다가 양국 논의 끝에 재대국으로 이어졌다. 하마터면 국제 바둑계 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까지 갔었다.
인간의 적은 인공지능 아닌 바이러스
한국기원은 이 사태와 관련해 이튿날 입장문을 발표하고 대국 당사자인 박정환과 판팅위, 그리고 바둑팬들에게 사과했다. "프로그램 오류, 마우스문제, 해킹 등 발생 원인에 대해 다각도로 점검하고 있다. 주관사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이번 사태로 실망하셨을 모든 분께 사죄드린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건의 정확한 원인 규명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말썽의 원인을 못 밝혀냈다는 건 언제든지 같은 종류의 사고가 재발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바둑을 일컬어 흔히 동양 문화의 정수(精髓)라고 부른다. 인류가 만든 다른 어떤 발명품보다도 오묘하고 뛰어난 최고의 작품이라고도 한다. 반상(盤上)에 펼쳐질 수 있는 수(手)의 가짓수가 무한대여서, 인류 과학 문명이 제 아무리 발달해도 바둑으로 인간보다 위에 오르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들 했다. 인류의 그같은 신념은 속절없이 깨졌다. AI의 출현으로 신(神)처럼 보이던 인간 고수들이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실망할 일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바둑이란 신비한 게임을 창안한 것도, AI라는 도깨비 학문을 개발해 이 단계까지 끌고 온 것도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클릭 미스’ 급의 오류 원인을 못 찾아내는 현실은 좀 아쉽지만, 인간이 기계에 패했다는 식의 자괴감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인류에게 현대 과학은 경쟁 대상이 아니라 협조 관계이고 보완재란 뜻이다.
다만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엎드린 인간의 모습은 여전히 무력하다. 수십개 나라에서 유명 과학자들이 백신 개발에 몸을 던지고 있다는데 돌파구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과 현대 과학, 그리고 바이러스 3자 간에 벌어지고 있는 이 기묘한 숨바꼭질은 어디까지 이어지고 어떤 모습으로 마무리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