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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더독들의 끊임없는 반상 반란
 
▲ 문민종 2단이 첫 출전한 신예세계대회 글로비스배에서 우승

지난 주 바둑계에선 놀랄 만 한 사건이 터졌다. 무명에 가까운 17세 소년 문민종이 20세 이하 국제 주니어기전인 글로비스배서 우승한 것이다. 결과도 결과지만 그 과정이 경이로웠다. 16강전 첫 판을 일본 기사에게 이긴 뒤 중국 2000년생 유망주 셰커, 랴오위안허, 리웨이칭을 차례로 눕히고 정상에 선 것. 이들의 중국 랭킹은 각각 16위, 22위, 13위. 그리고 문민종의 국내 랭킹은 150위였다.

지난 해 초엔 국내 기전에서 그 못지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랭킹 92위에 불과한 이호승 3단이 제24기 GS칼텍스배서 막강한 스타들을 연파하고 당당히 4강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호승은 당시 랭킹 1위였던 박정환, 4위 신민준, 12위 이세돌을 줄줄이 눕혔다. 준결승서 김지석에 잡혀 돌풍은 소멸됐지만 팬들은 무명에 가까웠던 이호승의 파이팅에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이창호-이세돌-조훈현도 무너졌다

요즘 청년 강자로 뜨고 있는 박하민도 사고를 치면서(?) 성장해왔다. 랭킹 69위 꼬리표를 달고 출전한 2018년 한국바둑리그에서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2위 김지석과 4위 이세돌을 연속 KO시켜 모든 강자들을 ‘멘붕’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박하민은 당시 부동의 톱랭커였던 박정환마저 꺾는 기염을 토했다. 만 20세의 4단이던 박하민의 당시 랭킹은 많이 올랐지만 그래도 아직 49위였다.

바둑계의 하극상(?)은 잊을 만 하면 터지곤 한다. 특히 아직 ‘프로 자격증’도 따지 못한 아마추어 기사들이 톱스타들을 누르고 센세이션을 불러온 사건이 적지 않았다. 당대 1인자로 군림하던 대기사들 치고 이런 험한 꼴(?) 한 번 안 당해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2010년 서울서 열린 제2회 비씨카드배 본선 1회전. 그 중 한 판은 ‘3중 충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폭발력이 강한 결말이었다. 랭킹 1위 이창호가 첫 관문서 좌초했다는 게 첫 번째 충격. 그리고 이창호를 침몰시킨 주인공이 17세의 아마추어 고교생인 한태희 소년이었다는 게 두 번째 충격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둑의 내용. 수수(手數)가 고작 96수에 그친 단명국으로 한태희의 백번 완승이었다는 점도 충격의 파장을 높였다. 연구생이던 한태희는 그 사건 9개월 뒤 프로 관문을 뚫었다.

독수리보다 무서운 ‘병아리‘들

연구생은 무섭다. 아직 ‘성계(成鷄)’가 되기 전 병아리 신분인데, 기량은 넘치고 겁은 없을 때라 자주 ‘사고’를 쳤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이세돌도 전성기 시절에 해당하는 2011년 제39기 명인전 예선 때 ‘병아리’에게 물린 적이 있다. 랭킹 1위 이세돌을 꺾은 문제의 병아리 황재연은 바로 다음 달 ‘성계’ 면장을 받았다.

조훈현도 ‘고수(高手) 잔혹사’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무대는 2010년 벌어진 제38기 명인전 예선. 비록 57세의 고령이긴 해도 그는 여전히 산천초목이 떠는 맹호였다. 당시 한국 랭킹 25위이던 그가 아마추어 온승훈(당시 26세)에게 패할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승훈은 각종 아마추어 대회 우승을 밥 먹듯 하면서도 유독 입단대회 관문만은 뚫지 못한 비운의 기사. 아직도 아마추어 신분이다.

시선을 국제무대로 넓혀 보자. 세계 메이저대회만 세 차례 우승한 중국의 거물 천야오예가 한국 아마추어에게 무릎을 꿇은 일이 있다. 주인공은 97년생 안정기. 그는 2015년 거행된 제20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서 안조영 김승재 등 프로 정예들을 제치고 본선에 올랐다. 이 대회 본선에 오른 최초의 아마추어였다. 그는 본선서도 여세를 몰아 중국의 우승후보 천야오예마저 눌렀다. 이런 실적에 힘입어 안정기는 2015년 7월 포인트 입단에 성공했다.
▲ 안정기 대 김승재

돌고 도는 승부의 세계

양딩신(98년생)은 박정환 신진서 커제 등과 더불어 현재 세계 최고수 4인방으로 꼽히는 강자다. 그 양딩신도 한국 아마추어에게 한 칼을 맞고 낙마한 적이 있다. 단, 양딩신이 입단 초기인 12살 때 일이다. 그리고 승자 민상연은 상대보다 6살 많은 18세. 아직 입단 전이던 아마추어 민상연이 제15회 LG배 예선 3차전(2010년)의 승자가 됐다. 민상연은 4개월 뒤 벌어진 제15회 삼성화재배 예선 3차전서는 거함 목진석(당시 한국 10위)을 침몰시켰다. 민상연은 20세 되던 2012년 입단했다.

‘송아지 3총사’ 멤버들도 아마추어들의 좀비(?) 공격에서 무사하지 못했다. 2010년 열린 제38기 명인전 예선 2차전서 당시 랭킹 3위였던 최철한이 박영롱(현 프로 4단)에게 저격당했다. 박영훈도 랭킹 4위 시절이던 2012년 올레배 본선 2라운드서 만난 유병용(현 프로 5단)에게 한 칼 맞고 대진표에서 사라졌다.

항상 남을 괴롭히기만 할 수는 없다.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이 당할 수 있는 곳이 승부의 세계다. 얼마 전 입대한 청년 고수 이지현 9단은 아마추어 시절 프로를 눕힌 경험과, 프로 진출 후 아마추어에게 패한 경험을 고루 보유하면서 윤회(輪廻) 하는 바둑 세계의 현상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지현은 17세 되던 2009년 제1회 비씨카드배 본선 64강전서 스웨를 꺾었다. 스웨와 이지현은 불과 1살 차이지만, 신분은 중국 프로 4단과 한국 아마추어 연구생으로 차이가 났다. 스웨는 그 몇 년 뒤 LG배 우승으로 세계 정상에 오르며 한 동안 중국 1위를 구가했다. 하지만 이지현 자신은 2010년 프로가 된 뒤 제39기 명인전 예선 결승(2011년)서 황재연, 제3회 바이링배 예선(2016년)에선 천하오신 등 아마추어에게 패했다.

상식이 무너져야 발전한다

요즘 바둑계 ‘하극상’의 단골 주역은 2007년생 김은지 초단이다. 300여 명에 이르는 국내 프로기사 전체 중에서 최연소인 김은지는 수 년 전부터 프로 언니들을 쉴 새 없이 괴롭히더니, 올해 초 입단한 뒤엔 단숨에 여성 그룹 중위권에 해당하는 승률 커브에 올라탔다. 김 초단은 입단 전부터 “(여성 세계 최고수인) 최정 언니를 이기고 정상에 오르겠다”고 여러 번 말했던 당돌한 신예.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실현 가능한 꿈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37전 무패, 1라운드 KO승만 17번에 달하던 스무 살의 헤비급 챔프 마이크 타이슨이 그렇게 무너질 줄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승자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무명 복서 제임스 버스터 더글라스였다. 치명적 정타를 맞은 타이슨은 10라운드에 드러눕더니 카운트아웃이 될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1990년 도쿄서 펼쳐진 이 대결은 아직도 세계 프로복싱 사상 예상을 벗어난 가장 충격적 한 판으로 남아있다.

‘도쿄의 반란’은 프로복싱의 흥행에 기름을 부었다. 누구도 질 수 있다는 사실, 어떤 승부도 예상과 달리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상식‘에 반해야 뉴스도 되고 화제도 된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지 않으면 발전도 없다. 반상(盤上) 반란을 위해 오늘도 숱한 언더독들이 이변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이 새 역사를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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