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잖기만 하던 프로기사들의 입이 약간은 거칠어졌다. 겸양 일변도의 교과서적 출사표에 길들여져 있던 바둑 팬들은 몹시 즐거운 표정이다. 기도(棋道)는 물론 중요하고 예의도 갖춰야 하겠지만, ‘주례사’를 방불케 하는 천편일률적 임전 소감은 김이 빠진다. 승부의 속성은 어차피 생사 다툼이고, 그 앞에선 보다 솔직해져야 관전 재미가 배가되기 때문이다.

“꼬장 부린다” VS “준우승 놓고 분투를”
올해 바둑계에서 도발적인 출사표 그랑프리 주인공을 뽑는다면 단연 이동훈(22) 9단일 것이다. 그는 제1회 쏘팔코사놀 최고기사 결정전 난적 신진서(20)와의 일전을 앞두고 “꼬장 부리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가길 바란다”고 말해 바둑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꼬장’은 성깔을 뜻하는 남도지역 방언으로, ‘꼬장 부린다’는 ‘도발하고 귀찮게 군다’는 의미로 젊은 기사들 사이에 애용되는 바둑 은어다.
이동훈 9단은 같은 대회 박정환(27) 9단과의 대국을 앞두고도 “자근자근 밟아주겠다”며 투지를 보여 눈길을 모았다. 선배에 대해 무례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 그는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만 13세 때 입단해 17세에 타이틀을 따낸 이동훈은 자신의 앞을 번번이 막아서는 한국 바둑 ‘투톱’ 신진서와 박정환을 뛰어넘을 돌파구가 필요했다.
쏘팔코사놀 최고기사 결정전은 지난 6월 신진서가 결승서 박정환을 꺾고 우승하면서 막을 내렸다. 대회 개막식 때 “한 판도 지지 않겠다”는 당돌한 출사표를 내놓았던 신진서는 7일 열린 폐막식에서도 히트를 쳤다. “2기 때는 모든 출전자들이 준우승을 놓고 열심히 싸워주시기 바란다”고 말한 것. 점잖으면서도 자신감 넘친 멘트였다. 대회 규정에 따라 신진서는 2기 대회부터는 9인 리그 우승자의 도전을 받는 방식으로 2연패(連霸)를 노크하게 된다.
정치-스포츠에선 일상화
격투기 등 육체 스포츠에선 바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나라한 말 폭탄이 오간다. 2017년 8월 무패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와 종합격투기(UFC) 최강자 코너 맥그리거 대결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장서 둘이 주고받은 대화를 보자.
(맥그리거) “나를 위해 춤 춰봐. 꼬마야.”
(메이웨더) “너는 내게 등을 보이고 달아날 거야. 너같은 것들을 줄지어 놓으면 볼링 핀처럼 쓰러뜨릴 텐데.”
두 선수는 얼굴을 맞대고 온갖 욕설을 교환하다 못해 싸움 일보직전까지 갔다. 주최 측이 마이크 전원을 끄고 UFC 대표가 뜯어말린 후에야 설전이 끝났다.
물론 흥행 제고를 위한 의도적 연출도 가미됐을 것이다. 하지만 링에 오를 두 당사자의 상대방을 향한 투혼은 과장이 아니다. 상대를 압도하고 싶은 속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쇼라고 절하해선 안 된다. 그것은 싸움꾼의 미덕일지언정 흉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 존경하는 분과 대결하게 돼 영광이며, 배운다는 자세로 열심히 두겠다”는 바둑 모범답안 출사표와 비교해 볼 일이다.
육체스포츠만 그런 게 아니다. 정치 쪽은 더 하다. 2016년 9월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트럼프와 힐러리가 TV 스튜디오에 나와 설전을 교환했다. 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뽑는 승부가 이 정도라면, 승부가 본업인 승부사들은 좀 더 과감해질 자격과 의무가 있다.
(트럼프) “힐러리는 대통령 될 얼굴도 아니고 스태미너도 없다.”
(힐러리) “트럼프는 인종차별자다. 여성을 개돼지로 부르기도 한다.”
4년이 흐른 올해 트럼프는 경쟁 상대를 조 바이든으로 바꿔 4년 전 대선 때 이상의 이전투구를 계속할 조짐이다.

이창호의 최고 수위 발언 “세돌이를 혼내주겠다”
물론 바둑계에도 용감한 파이터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지난 해 현역 은퇴를 선언한 이세돌이었다. 2003년 10월 상하이서 제8회 LG배 세계기왕전 8강전에 앞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무대에 나선 이세돌이 포효했다. “상대를 화려하게 몰아쳐 상대를 KO시키겠다.” 얼마나 통쾌하고 시원한 출사표인가. 그와 싸울 상대는 중국기사도 아닌, 평소 형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한국 조한승 6단(당시)이었다.
“이창호 조훈현 마샤오춘 3명 중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는 사회자 질문에 이세돌이 “거기서 마샤오춘은 빼달라”고 거침없이 외친 것도 같은 날, 같은 무대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마샤오춘도 그 자리에 있었다. 회견장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가라앉았지만 대회 주목도는 하늘을 찔렀다. 프로페셔널은 경기 스킬만으로 생활비를 버는 직업인이 아니다.
이창호는 점잖은 프로기사 사회에서도 누구보다 조심성 많고 겸손한 신사로 꼽힌다. 항상 언행에 흐트러짐이 없다. 이창호가 30여년 기사 생활을 해오면서 입에 올렸던 최대한 도발적인 코멘트는 “내년엔 이세돌 사범을 혼내 주겠다”였다. 2008년 연말 바둑대상(大賞) 시상식 때 한 말이다. 당시 이창호는 인기 기사상을, 이세돌은 최우수 기사상을 받았다.
천방지축형 이세돌도 이런 이창호 앞에선 진심으로 승복하고 조심했다. 이세돌이 2007년 8월 제3기 물가정보배서 우승한 직후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이창호 9단과 1위 경쟁이 요즘 엄청 치열하다. 이 9단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가?” (이세돌)“아니다. 실력으론 차이가 많이 나는데, 내가 요즘 기세가 좋아서 비슷해 보일 뿐이다. 더 노력해 진짜 대등한 승부를 하고 싶다.” 이세돌 바둑사 어디를 뒤져봐도 이런 겸손한 멘트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제갈공명의 오리지널 출사표
독설가 이세돌을 찜 쪄 먹은(?) 기사가 바로 커제 9단이다. “이세돌이 나와의 결승 승리 확률을 50%라고 말했다고? 나한테 연패했으니 5%가 정답이다.” 2015년 제2회 몽백합배 결승을 앞둔 시점, 커제가 18세 때 했던 말이다. 이듬해 봄 알파고와의 대결서 이세돌이 1승 4패로 패했을 때도 그는 “나라면 알파고를 이길 수 있다”고 정색하며 비아냥댔었다.
전설적 ‘떠벌이’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40전 전승 37KO승을 달리던 조지 포먼을 눕히는 데는 주먹과 ‘입’이 함께 가동됐다. 경기 시작 전 심판 이 지켜보는 가운데 포먼과 얼굴을 맞댄 알리는 이렇게 속삭였다. “넌 기저기를 찬 어린애니까 내 소문 들었지? 오늘 임자를 만났으니 제삿날인 줄 알아라.” 포먼의 평정심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기선 제압은 승부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점잖은 프로기사들을 너무 격발(激發)했나? 제갈공명의 오리지널 ‘출사표(出師表)’를 읽으며 다시 냉정을 되찾도록 하자. 위(魏)를 토벌하러 출진할 때 촉제(蜀帝) 유선(劉禪)에게 바친 글 중 마무리 부분이다. 화자(話者)를 세계대회 결승에 나가는 우리 프로기사, 청자(聽者)를 대한민국 바둑팬으로 맞추고 들어야 한다.
“이제 다행히 남방은 평정됐고 무기도 넉넉합니다. 마땅히 북으로 중원을 정벌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고 한실을 부흥시키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에게 역적을 치고 나라를 되살리는 일을 맡겨주시옵소서. 신이 만약 제대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 죄를 다스리시고 선제의 영전에 알리옵소서.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제 먼길을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