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5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8강 멤버가 가려졌다. 초반 관전 포인트 중 하나였던 와일드카드 지명기사의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올해 와일드카드를 받아든 최정(24) 9단이 받아든 성적표는 32강. 첫 상대인 중국 신예 자오천위(21) 8단에게 본선 첫 판서 무너졌다. 중반까지 미세한 흐름 속에 한 때 승리가 점쳐지기도 했지만 상변 타개 과정에서 손해를 보고 석패했다.
최정은 무려 78개월째 한국 여자랭킹 1위를 지키고 있는 무시무시한 여걸이다. 2018년 10월 이후 국내 여성 기사들을 상대로 49연승 가도를 달리고 있다. 세계로 무대를 넓혀도 이 기간 그녀의 여성기사 상대 전적은 물경 81승 5패에 이른다.
최정은 남성들이 지배하는 바둑계에서 여성으로는 군계일학의 활약을 지속해 왔다. 최근 발표된 6월 한국랭킹은 3백여 명 중 16위. 남녀 혼성 세계대회 본선 출전 경력도 웬만한 남성 중견기사 뺨친다. LG배만 따져도 3번이나 본선에 진출했었다. 작년 24회 대회 때는 구쯔하오, 스웨 등 중국 최고 스타기사들을 연속 메다꽂고 16강까지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같은 상승세가 최정 와일드카드 발탁의 계기로 작용했다. 세계 (혼성) 메이저대회서는 어디까지 통할까 하는 것이 모든 바둑팬의 궁금증이기 때문이다. 바둑계에서 남녀 간의 실력차이가 존재하느냐의 문제는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전성기가 오래 전 지난 중국 여걸 루이나이웨이(57)가 갖고 있는 메이저기전 여성 최고성적을 갈아치울 수 있을까가 초점이다. 루이 9단은 93년 제2회 잉씨배 때 4강까지 진격했었다.
최정 9단이 세계 혼성 메이저대회에 와일드카드로 초청받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12년 열렸던 제4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때 만 16세, 2단 시절 처음 와일드카드로 본선 무대를 밟았다. 당시에도 최정은 1회전을 통과하지 못하고 64강에 머물렀었다.
와일드카드는 원래 카드게임에서 유래한 용어다. ‘여러 용도로 쓰이는 카드’란 의미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요즘은 스포츠계 전용 용어처럼 쓰이고 있는데, 종목에 따라 그 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꼭 출전시키고 싶은 베테랑 선수, 대회를 빛낼 루키, 아까운 탈락자 등에게 와일드카드가 주어진다. 바둑의 세계에서도 여러 용도로 활용되면서 대회의 활력소 구실을 수행해왔다.
국가대항 연승전인 농심배는 ‘바둑 국보’ 이창호 9단을 최고의 와일드카드 모델로 활용한 기전이었다. 주최 측은 국가 대표 선정방식을 몇 차례 변경하면서 이창호를 꾸준히 발탁했는데 결과는 매번 대성공이었다. 한국 바둑 역사에서 최고 대첩(大捷) 중 하나로 꼽히는 6회 대회(2004년) 때의 막판 5연승 신화 주역 이창호의 신분도 와일드카드였다.
삼성화재배도 96년 창설 첫 해부터 와일드카드 제도를 도입한 기전이다. 단 와일드카드 성격은 좀 특이했다. 실력 위주의 다른 기전과 달리 바둑 발전에 공로가 큰 원로들의 초청에 치중했다. 초기엔 2명씩 지명하기도 했다. 이창호와 녜웨이핑은 각각 2차례 지명됐다. 하지만 ‘원로 풀’이 한계에 이르자 2009년 제14회 대회부터 한동안은 대상을 역대 우승자로 제한하기도 했다.

삼성화재배 역대 와일드카드 중 ‘최고 히트상품’은 2003년 제8회 대회 때의 조치훈이다. 일본기사로 출전한 그는 본선에 ‘무혈입성’ 후 원성진 조훈현 후야오위에 이어 박영훈을 결승서 꺾고 우승했다. 91년 제4회 후지쓰배에 이어 개인적으로 국제메이저서 이룩한 두 번째 세계 제패였다.
4회까지 치르고 막을 내린 비씨카드배도 매회 2명씩의 와일드카드를 선정해 출전시켰다. 그 중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기사가 지금은 은퇴한 이세돌 9단이다. 6개월 간 기사직에서 떠나있던 그는 휴직을 마치고 복귀한 직후 와일드카드를 받아 출전, 8전 전승의 전적으로 우승했다. 2010년 2회 대회 때 있었던 일이다.
중국은 지난 해 열렸던 제4회 몽백합배 때 와일드카드로 1회 대회 준우승자 구리와 함께 당시 만 10살에 불과하던 일본 최연소기사 나카무라 스미레를 와일드카드로 지명해 눈길을 모았다. 스미레 초단은 그러나 그 전 주 치러진 국제 통합예선에 이어 본선에서도 1승도 따내지 못하고 탈락했다.
LG배 조선일보기왕전의 와일드카드 역사는 상대적으로 길지 않다. 2015년 제19회 대회 때 강동윤이 첫 수혜자가 됐다. 전년도 대회서 중국 기사들의 성적 호조로 국가시드 한계(5명)를 초과, 잉여 시드 1명 배정권이 한국에 돌아갔고 강동윤이 지명됐다. 강동윤은 이듬해 20회 대회 때 LG배 첫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주최측의 1년 전 결정을 ‘선견지명’으로 만들어주었다.
제20회 LG배는 대회 창설 20주년을 기념해 통합예선 선발 규모를 줄이고 대신 초청 기사 범위를 넓히는 방식으로 치렀다. 그 과정에서 역대 LG배 최다우승 기사 3명이 대거 초청됐다. 4번 우승한 이창호를 비롯해 두 차례 정상에 섰던 이세돌과 구리가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 3명 중 누구도 본선서 기대했던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19회 및 20회 대회는 특수 상황에 맞춘 임시 선발의 성격이 컸고, 아직 정식 와일드카드라고 부르기엔 일렀다. 제대로 모습을 갖춘 와일드카드는 22회 때 선정된 원성진이 효시에 해당한다(21회 때는 와일드카드를 선정하지 않음). 원성진은 2013년 제17회 LG배에서 중국 스웨에 패해 준우승에 그친 뒤 입영열차에 몸을 실었던 주인공이다. 당시의 아쉬움을 달랠 기회를 제공하는 의미로 22회 대회 와일드카드가 주어진 것. 그러나 입상권 진입엔 성공하지 못했다.
2019년 23회 대회 때 와일드카드의 주역은 신민준이었다. 당시 19세였던 그는 한국 기사로는 유일하게 4강까지 살아남았으나 준결승서 이 대회 우승자 양딩신에 막혀 메이저 첫 결승 진출의 꿈을 뒤로 미뤄야 했다. 그러나 역대 LG배와일드카드 기사 중 그는 가장 빛나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지난해 2019년엔 노장 박영훈이 와일드카드로 선정됐으나 32강전 첫 판서 당이페이의 벽에 막혔다.
와일드카드는 히든카드일 수도 있고, 대회를 빛낼 조미료같은 장치일 수도 있다. 바둑계는 프로기사들의 실력. 대중성. 쇼맨십, 미래가능성 등 여러 요소를 저울질하며 그 대상을 선정하고 있다. LG배의 와일드카드 역사는 짧고, 올해도 기대했던 만큼의 깜짝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원성진 신민준 강동윤 등 LG배 와일드카드와 인연이 있는 기사들이 대거 8강에 진출해 그 아쉬움을 덜어 주었다. 내년엔 바둑계 ‘와일드카드 역사’를 새로 쓸 쾌거가 LG배에서 연출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