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에 걸쳐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반드시 변곡점이 찾아온다. 흥망성쇠가 걸린 기로(岐路)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천국의 문턱일 때도 있고, 마지막 순간 무너짐으로써 애써 그려놓은 그림을 망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승부사들에게 더욱 또렷하게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결정적 순간의 1승, 1패가 전체 인생의 진퇴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 중국 리쉬안하오를 상대로 올 여름 춘란배 결승전을 펼칠 변상일. 세계 메이저대회 두 차례 4강에 그쳤으나 첫 세계 제패에 나선다
변상일, 실적으로 보여줘야
올해 세계 바둑계에서 결정적 시험대에 오를 기사가 3명쯤 눈에 띈다. 우선 한국 변상일 9단이다. 26세의 변상일은 한국 랭킹 2~4위권을 넘나드는 대표적 강완(强腕)인데, 그럼에도 세계를 제패해본 경험은 아직 없다. 아니, 결승 무대조차 밟아보지 못했다. 그 변상일이 오는 7월 열리는 제14회 춘란배 결승 3번기를 갖는다. 가위 ‘인생 승부’로 부족함이 없다.
변상일에게 이 한 판의 의미는 실로 막중하다. 이기면 프로데뷔 11년만에 당당히 세계 메이저 우승자 리스트에 진입한다. 반대로 패할 경우 챔피언 족보 입적(入籍)은 언제 이뤄질지 기약이 없게 된다. 어쩌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변상일의 국제 메이저대회 최고 성적은 2020년의 LG배와 2023년 삼성화재배에서 기록한 4강 진출이었다.
변상일은 세계 우승에 한이 맺혀 있다. 승부사라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애타는 심정은 지난 해 연말 최정과 겨룬 삼성화재배 준결승전 때 생생하게 드러난 바 있다. 랭킹으로 보나 그 간 상대전적으로 보나 변상일의 승리가 유력시됐으나 바둑은 예상과 반대로 흘러갔다. 패색이 짙어지면서 변상일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때리며 흐느끼기까지 했다. 프로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TV를 통해 생중계 됐다. 변상일은 패배가 결정된 후 오래 동안 휴대폰을 끈 채 연락이 두절돼 주변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몇 시간 뒤 자신이 청계천변에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려올 때까지 모두 가슴을 졸여야 했다. 변상일이 1년 누나인 최정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면서 일단락됐다. 바둑사에 남을 만 한 일화였다.

▲ 중국 랭킹 1~2위를 오가고 있는 리쉬안하오. 춘란배 준결승서 우승 후보 신진서를 완파하면서 치팅 의혹에 시달렸다. 변상일과의 결승을 통해 ‘누명’을 벗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리쉬안하오는 결백할까
춘란배를 놓고 결승 3번기를 치를 변상일의 상대가 중국의 리쉬안하오란 사실도 극적이다. 리쉬안하오야 말로 올 한해, 특히 춘란배 결승이 자신 바둑 인생의 사활이 걸린 일생일대의 대승부이기 때문. 비슷한 처지의 두 기사가 맞대결함으로써 한 사람은 마침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지만 또 한 사람은 고해(苦海)의 세월을 더 계속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리쉬안하오에게 2022년은 영광과 시련, 선망과 의심이 교차되는 어지러운 1년이었다. 놀랍게도 춘란배 준결승서 현역 세계 최강자 신진서를 눕히고 세계 메이저 결승에 첫 발자국을 찍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심을 살 만큼 완벽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이때부터 리쉬안하오는 절친했던 동료기사 양딩신으로부터 치팅을 의심받는 노골적 저격을 감내해야 했다.
리쉬안하오에게 치팅과 관련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 기사는 양딩신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중국 톱스타로 군림해 온 커제는 2021년 중국 갑조리그 때 “리쉬안하오의 인공지능 일치율이 90%가 넘는다. 그가 화장실에 다녀올 때면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고 공개 저격했다. 중국 톱스타 멤버들인 커제, 양딩신이 전면에 서자 천야오예 등 많은 프로들이 동조했다.
리쉬안하오가 치팅 의혹을 받는데는 그의 갑작스런 도약도 한 몫했다. 2008년 입단 이후 미미한 존재로 머물렀다. 2017년 몽백합배 4강, 2020년 삼성화재배 8강이 국제무대 최고 성적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20세부터 25세 사이 전성기를 보내다가 그 이후엔 서서히 하강 커브를 그린다. 리쉬안하오는 이 패턴과 정확히 반대로 움직였고, 그것이 의심을 사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다.

▲ 셰커는 오는 8월 제10회 잉창치배 결승 3번기에서 신진서 9단과 격돌한다. 신진서, 딩하오에 이어 사상 세 번째 세계 메이저 우승을 겨냥 중이다.
평범한 기사로 10여년을 보내던 리쉬안하오a는 2021년 말부터 마치 딴 사람이 된 듯 주요 국내 대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2022년엔 입단 14년 만에 9단에 오르더니, 올해 3월 발표된 중국 랭킹에선 커제를 제치고 1위에 즉위했다(4월 랭킹에선 다시 2위로 내려갔다). 1위건, 2위건 약 2년 전인 2021년 초 그의 순위 17위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상대전적에선 변상일 1대3 열세
사태가 확산되자 중국기원은 리쉬안하오를 저격한 양딩신에게 강력한 경고와 함께 6개월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양딩신이 증거 없이 동료를 비방함으로써 중국 바둑의 권위와 가치를 추락시켰다는 논지였다. 덧붙여 이번 사태와 관련해 리쉬안하오에게 사과할 것을 지시했고 양딩신은 지시를 이행했다.
하지만 문제는 리쉬안하오가 중국 국내외 팬 및 관련자들 사이에서 아직 누명(?)을 완전히 벗지 못했다는 점이다. 양딩신 징계 조치로 사태가 끝난 게 아니라는 의미다. 네티즌들은 여전히 리쉬안하오 옹호파와 의심파로 갈려 장외에서 일진일퇴 중이다. 이번 춘란배 패권 다툼은 리쉬안하오 입장에서 과거 어떤 대국보다 중요하다. 대국 내용뿐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감시당하는 가운데 결백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변상일 대 리쉬안하오 전에선 과연 누가 이길까. 두 기사는 4번을 싸워 리쉬안하오가 3승 1패로 앞서고 있다. 2018년 첫 대결서 변상일이 이긴 이후 리쉬안하오가 3연승 중이다. 하지만 변상일의 전체 중국기사 상대전적도 만만치 않다. 통산 140승 76패로 승률 64.8%다. 2022년 이후만 따지면 20승 4패(83.3%)나 된다. 이 중엔 22년 8월부터 23년 2월 사이에 거둔 13연승도 포함돼 있다. 리쉬안하오는 한국 기사들을 상대로 60승 27패(69.0%)를 기록 중이다.

▲ 현역 세계 챔피언(삼성화재배)이자 세계 최강자로 지목되고 있는 신진서 9단. 8월 열릴 잉창치배서 동갑의 셰커를 상대로 다섯 번째 메이저 우승에 도전한다. <사진=한국기원>
셰커, 1인자 신진서 상대로 2000년생 종주권 도전
2023년에 모든 것을 걸 세 명의 기사 중 마지막 한 명은 중국기사 셰커(23)다. 그는 오는 8월 21일부터 상하이에서 우승 상금 40만 달러가 걸린 제9회 잉창치배를 놓고 신진서와 결승 3번기를 치를 예정이다. 16강전서 양딩신, 8강전서 커제, 준결승서 일본 이치리키 료를 잇달아 누르고 올라왔다. 신진서는 결승행까지 셰얼하오 판팅위 구쯔하오 자오천위를 제쳤다.
셰커는 2000년생으로 신진서와 동갑이다. 2013년 입단한지 4년만인 2017년 몽백합배 준결승서 박정환에게 패했다. 국제 메이저 최고 성적은 준우승. 2021년 끝난 제4회 몽백합배 결승서 미위팅과 풀세트 접전 끝에 2대3으로 고배를 들었다. 지금까지 작성한 국제 메이저 성적표를 살펴보면 준우승과 4강이 각 1회, 8강이 2회이고 16강도 한 차례 기록했다. 썩 우수한 성적표라곤 할 수 없다.
셰커 역시 첫 세계 제패 꿈에 가위 눌려 지내는 승부사다. 2000년생 세계 챔피언이 신진서 1명뿐이었다가 딩하오(27회 LG배 우승)까지 가세함으로써 더 초조해졌다. 셰커 입장에서 위안을 삼을 자료는 결승 상대인 신진서와의 상대 전적이다. 2017년 20세 이하 국제대회인 리민배서 딱 한 번 만나 셰커가 이겼다. 하지만 이는 두 기사가 17세 때 작성한 기록인데다 무려 6년 전 것이어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현재 국제 메이저 판도는 LG배를 딩하오가, 삼성화재배는 신진서가 자배 중이다. 잉씨배와 춘란배는 올 여름 새 주인이 결정된다. 차기 LG배와 삼성화재배, 몽백합배가 새 장정에 들어가고, 중국 신설 기전인 제1회 난가배가 5월 출범을 선언했다. 백척간두에 올라선 변상일, 셰커, 리쉬안하오 3명은 각각 어떤 역할을 맡아 어떤 퍼포먼스를 펼쳐 보일까. 주사위는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