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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전 이름 천태만상 시대
 
바둑 타이틀전이 참 많다. 대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열린다. 연중무휴 정도가 아니고 하루에도 서 너 개의 바둑대회가 겹쳐 치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기원이 주관하는 대회만 39개에 이른다. 여기에 중국이 주최하는 갑을병조 리그, 일본 주최의 글로비스배 등 외국이 주도하는 기전들이 즐비하다. 문경새재배나 노사초배 등에도 프로기사가 참가할 수 있다. 가위 기전 르네상스 시대다.

워낙 많은 기전이 열리다 보니 기전 이름도 천태만상이다. 기전 이름만 들어도 대회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 바둑 대회는 스폰서들의 입김이 절대적이다. 스폰서는 대략 80~90% 정도가 기업체이고 10% 정도가 지방자치단체다. 스폰서 이름이 따라붙지 않는 기전은 몇 개 안 된다.

▲ 1956년 출범한 국내 최고(最古) 기전 국수전. 2015년 59기를 끝으로 간판을 내렸다.

‘○○배 △△전‘이 가장 흔하고 보편적인 기전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지지옥션배 연승대항전, 대주배 시니어최강전, 편강배 시니어바둑리그, GS칼텍스배 프로기전, 호반배 세계여자바둑패왕전, 하림배 프로여자국수전, SG배 명인전 등, 이런 구조가 대세라 할 만큼 많다. 바둑 용어로 말하자면 정석(定石)이다. LG배 조선일보기왕전,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도 이 범주에 속한다.

지방자치단체 이름을 내 건 프로기전들은 제품 명 대신 지역 이름을 앞에 내건다. 전라남도와 신안군이 공동 후원하는 신안 국제시니어바둑대회, 의정부시가 발 벗고 나선 의정부 국제바둑신예단체전, 합천군이 개최하는 합천군 초청 하찬석국수배 영재바둑대회 등이다. 국수산맥 대회가 그냥 국수산맥으로 등록돼 있는 것은 후원 지자체가 전남도, 신안군, 영암군, 강진군 등 4개나 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개나 되는 지자체 모두를 대회 명칭에 넣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스폰서 이름을 기전 앞에 내세우는 것을 이상하게 볼 일은 아니다. 오히려 매우 바람직하다. 자본주의 체제에 깊이 뿌리를 내려가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인기 스포츠 종목들이 거대한 대회를 열고 수백억 몸값의 스타들을 배출하는 것은 서구 자본주의를 등에 업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구미(歐美)의 풍요로운 자금을 등에 업고 펼쳐지는 인기 스포츠 종목 대회를 보면 입이 쩍 벌어질 정도다. 자동차 경주대회인 포뮬러원만 해도 페라리, 벤츠, 마세라티 등 자동차 업체들의 경연장이다. 1년 운영비가 수천억 원 대를 오가고, TV 시청자 수는 연간 23억 명으로 추산된다고 하다. 고작 동북아 3~4개국 만이 경쟁하는 바둑은 명함도 내밀 수 없다.

▲ 1968년 창설돼 2015년 43기를 끝으로 중단됐던 명인전이 6년만인 2021년 44기부터 ‘SG배 한국일보명인전’으로 부활했다.

대회 명칭에 제품명을 내 건 최초의 국내 기전은 동아제약과 매일경제신문이 공동 주최한 박카스배였다. 1983년 첫 대회를 치러 94년 12기까지 이어진 뒤 96년 ‘박카스배 천원전’이란 이름으로 재출범, 19년 동안 계속됐다. 90년대엔 진로배(93~97년), 보해배(94~98년) 등 주류 브랜드를 단 국제기전이 등장했다.

한국 프로기전의 효시는 1956년 조남철을 첫 우승자로 낸 국수전이었다. 이후 최고위전, 국기전, 왕위전, 기왕전, 패왕전, MBC제왕전 등이 가세하면서 중흥의 계기가 마련됐다. 이 무렵 기전 이름은 스폰서나 제품 이름이 덧붙여지지 않은 ‘천연’ 그대로였다. 하지만 IMF 사태 등 곡절을 겪으면서 전통의 기전들은 차례로 간판을 내렸다. 현대자동차의 후원을 받아 연명하던 국수전마저 2015년 59기로 종언을 고하면서 전통 기전들은 모두 고사했다.

중장년 이상 시니어 연령대 팬들에게 국수, 국기, 왕위, 기왕, 패왕, 제왕 등 기전 명칭은 가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담백하면서도 묵직했고 권위에 넘친 대회들이었다. 60년대~2010년대의 약 반세기 시절 한국 바둑계의 텃밭 역할을 했던 그리운 대회들이 몽땅 사라졌다.

▲ 7기까지 진행된 미래의 별 신예최강전.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독지가들이 후원회를 만들어 지원하고 있다.

한 가지 위안은 명인전이 ‘부활’ 과정을 거쳐 다시 열리고 있다는 점이다. 1968년 창설돼 2015년 43기를 끝으로 중단된 지 6년만인 2021년 44기부터 다시 운영 중이다. 대회 정식 명칭은 ‘SG배 한국일보명인전’으로 바뀌었다. 현재 명인 타이틀은 신민준 9단이 보유 중이다.

눈여겨 볼 것은 일본의 경우다. 일본은 수 십 년 째 기성전 명인전 본인방전 등 여전히 신문사 중심의 기전 운영 시스템을 이어오고 있다. 대회 명칭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 중 어느 나라가 더 바람직한 쪽으로 가는 것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이 동호인 비율, 경기력, 국제 성적 등에서 일본을 크게 앞지르기 시작한 것과 기전 스폰서십 변화 시기가 대략 일치했다는 점이다.

같은 값이면 예쁜 이름이 좋다. 사람이나 물건뿐 아니라 기전명도 그렇다.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효율적으로 시장(市場)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예쁜 이름인지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것이다. 필자 경우엔 바둑의 고고하면서도 그윽한 분위기를 담은 이름에 끌린다. 상업적 요소가 너무 노골적으로 담긴 기전명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 제2회 난설헌배 전국여자바둑대회 오유진 대 김경은 전. 강릉이 나은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기리기 위해 창설됐다.

파격적 기전 명칭으로는 ‘5육七관절타이밍‘을 꼽을 만하다. 뒤에 한국기원선수권전이란 설명이 붙지 않으면 누구도 그것이 바둑대회란 사실을 깨닫기 어려운 이름이다. 지난 해 1기 때는 우슬봉조(牛膝鳳爪)배 란 이름으로 치렀다. 직역하면 소의 무릎과 새의 발톱이란 뜻이다. 둘 모두 건강 보조식품이며 같은 회사(주 인포벨) 제품이다.

식품 회사로 꾸준히 바둑계를 후언해온 대표적 기업이라면 농심과 맥심이 떠오른다. 농심은 신라면배라는 이름으로 24기, 맥심은 맥심커피배란 호칭 아래 23기를 치렀다. 두 회사의 주력 상품은 라면과 커피지만 스낵, 과자류 등 자매 제품도 많이 출시하는 기업들이다. 생산 제품 중 일부에 불과한 라면과 커피를 빼고 ‘농심배’, ‘맥심배’로 부르면 광고효과도 더 포괄적으로 누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기전명으로 2개를 꼽는다. 그중 하나는 ‘미래의 별 신예최강전’이다. 만 19세 이하 주니어들만 참가하는 대회다. 내일을 맡길 유망주를 기다리는 대회 취지가 기전명에 선명하게 나와있다. 이 대회 스폰서는 미래의 별 후원회다. 기업이 아닌 개인 독지가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산뜻한 ‘청정 네이밍’이 가능했다.

또 하나는 난설헌배다. 강릉시는 2021년 이 대회를 창설하면서 굳이 후원사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대회명 뒤에 전국여자바둑대회란 설명만 따라 붙였을 뿐이다. 이조시대 선진 여성의 대명사인 허난설헌이 대회 모티브다. 강릉시는 난설헌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난설헌은 생전 바둑 시를 여러 편 남기는 등 넓은 의미에서 바둑인이기도 했다. 대회명과 바둑, 허난설헌의 3자 이미지가 이토록 절묘하게 어우러지기도 쉽지 않다.

▲ 지난해 창설대회를 치렀던 우슬봉조 한국기원선수권전. 올해는 ‘5육七관절타이밍‘ 한국기원선수권전으로 개칭해 열리고 있다. <사진 제공=한국기원>

외국 기전 이름 중엔 난가배를 꼽고 싶다. 난가(爛柯)는 썩은 도끼자루를 뜻한다. 수담(手談) 등과 함께 바둑의 별칭으로 자주 등장한다. 중국 국내기전으로 운영해 오다가 지난 해 국제기전으로 확대 실시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사태 등으로 연기돼 5월 개막한다고 한다. 아무튼 바둑의 상징적 전설을 모티브로 삼은 난가배야 말로 기전 이름의 걸작품이라고 할 만 하다.

일본 기전 중에선 약리전(若鯉戰)에 눈길이 간다. 若(약)은 어리다는 의미로 쓰이고 鯉(리)는 잉어를 뜻한다. 30세 이하, 7단 이하만 출전한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연령 상한선이 꽤 높지만 아무튼 유망주 육성을 위한 대회다. 어린 잉어들의 각축장이라니 운치 있지 않은가. 이 대회는 약리전 앞에 후원사 이름(히로시마 알루미늄)이 붙었다.

테니스 대회의 대명사격인 윔블던 대회는 런던시의 한 구(區) 이름을 따서 140여년 째 대회를 치르고 있다. 4대 그랜드슬램 대회 중 유일하게 잔디코트를 사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둑도 상품명, 회사명에만 그치지 않고 역사나 고사(故事), 지역 특성을 살린 대회 이름이 늘어나면 좋겠다. 승패만 가리고 끝내는 게 아니라 대회를 스토리화 하는 것이다. 기전 수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기전 이름으로 바둑의 울타리를 풍요롭게 가꾸는 시도도 필요한 시대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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