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루키 김은지가 지배한 한 해
프로기사를 평가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흔히 이용되는 것이 타이틀전 성적이고, 다승 및 승률 등의 통계도 많이 인용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요즘 많이 의존하는 랭킹 등락 폭이다. 이 데이터는 특정 기사가 특정 기간에 어느 정도 실력이 도약했는지, 또는 떨어졌는지를 가늠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매년 1월 랭킹을 기준으로 전년도 1월 순위와 비교하는 방식을 취했다. 예를 들어 2022~2023은 2022년 1월 랭킹과 2023년 1월 랭킹 간의 변화 폭을 의미한다. 국내 전체 프로기사 411명(여자 78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한국기원으로부터 자료와 집계에 도움을 받았다.

▲ 슈퍼루키로 떠오른 김은지 5단
집계 결과 지난 1년 간 랭킹이 가장 높은 폭으로 상승한 기사는 떠오르는 여성 스타 김은지(16)였다. 작년 1월 189위에서 82위로 상승했다. 1년 간 무려 107 계단을 뛰어오른 셈이다. 랭킹 점수 역시 2022년 8731점에서 9196점으로 465점이 뛰어올라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김은지는 2022년 바둑대상(大賞) 시상식에서 여자 최우수 신인상과 함께 다승상(94승 45패)을 수상했다. 목진석 9단이 보유했던 연간 최다승 기록을 15년 만에 갈아치우는 새 역사를 썼다. 지난 한 해 승단만 세 번 했다. 타이틀 무대에서도 효림배와 난설헌배 등 열흘 새 2관왕에 올랐다.
결국 랭킹, 승수, 타이틀전 성적 등 세 부문은 별개가 아니라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이 3가지 평가 기준을 모조리 정복했던 기사는 가뭄에 콩 날 만큼 드물었다. 지난 1년 동안 ‘슈퍼루키’ 김은지가 얼마나 무섭게 성장했는지 실감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 역대 연갈 랭킹 상승폭 1위 기록 보유자 권효진. 2021년 무려 113계단을 뛰어올랐다.
김은지의 프로 데뷔는 2020년 1월 여자입단대회에 이루어져 경력이라야 이제 만 3년에 불과하다. 그나마 치팅 혐의로 1년 간 출전을 정지 당하는 공백기도 겪었다. 일천한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지난 한해 최고 기사들의 경연장인 YK건기배를 밟았고, 여자바둑리그에서는 일약 전체 1번으로 주장에 발탁됐다. 한국바둑리그서도'의 퓨처스 1지명으로 뛰고 있다. 가위 전천후급 활약이다.
▨역대 연간 랭킹 상승폭 1위는 권효진
하지만 연간 랭킹 상승폭 1위 기록 보유자는 김은지가 아니다. 권효진(남) 5단이 김은지를 능가한다. 권 5단은 2021년 1월 랭킹 144위를 마크, 2020년 1월(257위) 대비 113 계단을 점프했다. 랭킹 점수 증가폭 583점(8338점→8921점)도 1위다. 그 이후 2년이 지났지만 랭킹 및 랭킹점수 역대 1위 주인공은 바뀌지 않았다.
권효진은 2004년생으로 새해 만 19세가 됐다. 2016년 제5회 지역영재 입단대회를 통과한 이후 미래 한국바둑을 짊어질 최고 유망주 중 한 명으로 주목받고 있다. 권효진이 6년 여의 프로기사 생활 동안 가장 활개 친 싸움터는 10대 유망주들만 출전하는 루키리그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 연속 다승왕에 올랐다.
이 중 2021년 루키리그 시즌 때는 이연 4단과 공동 1위로 마쳤다. 루키리그 외에도 2022년 하찬석배 준우승(2022), 노사초배 우승(2022), 삼성화재배 본선 진출 등 각종 대회서 두각을 드러냈다. 역대 연간 최고폭 랭킹 1위 기사다운 활약이다.
연간 랭킹 상승폭 역대 3위는 2021~2022년 시즌 104계단(181위→77위)을 뛴 이연 4단이다. 지난 1월 만 19세가 된 이연은 2018년 제10회 영재입단대회를 통해 프로가 됐다. 이연은 이 기간에 랭킹점수 421점이 증가(8768점→9189점), 권효진 김은지에 이어 이 부문 역대 3위를 기록했다.

▲ 박상진은 2019년과 2020년 각각 59, 47위를 연속 점프해 주목 받는 기사로 자리잡았다.
이연은 2021년 루키리그서 강지성학원 팀 주장으로 출전, 12승 2패의 호성적으로 동갑내기 권효진과 공동 개인 다승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열린 제9회 글로비스배(20세 이하 세계대회)에서 8강까지 진출, 한국기사 중 가장 높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함께 출전한 문민종과 한우진은 16강서 탈락했다.
연간 랭킹이 100계단 넘게 상승한 기사는 역대 통틀어 이들 3명뿐이다. 그들 뒤로 도열한 연도별 1위 기사들과 도약 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38개월째 한국 랭킹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신진서 9단.
2020년 이전까지 1위 기사의 상승 폭이 평균 40계단인데 비해 이후엔 평균 100계단으로 상승한 데는 이유가 있다. 신예 기사들의 대국 수가 워낙 적어 실제 상승 속도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수용, 2020년 1월부터 비례 상수(常數)를 랭킹대(帶) 별로 차등 적용하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게 한국기원의 설명이다. 2020년부터 시작한 프로기사협회 리그도 판 수 증가로 인해 신예 기사들의 가파른 랭킹상승 속도에 영향을 미쳤다.
▨최정상권도 예외 없었던 숨 가쁜 순위 싸움
2022년에서 2023년으로 넘어간 지난 1년 동안 가장 큰 랭킹 변동을 보여준 정상권 기사는 강동윤(14위→4위)과 박건호(19위→7위)였다. 두 기사 모두 10위권 밖에 있다가 안으로 진입했다. 여성 1인자 최정은 2020년 6월 작성한 본인 최고 랭킹(16위)을
2계단 끌어올린 개인 신기록(14위)을 새해 1월 작성했다.

▲ 59개월 연속 한국 1위를 유지했던 박정환 9단. (사진 제공=한국기원)
2021~2022년은 특히 10위권에 변화가 많은 해였다. 이창석이 전년도 18위에서 7위, 원성진이 12위에서 8위, 한승주가 23위에서 9위로 도약했다. 2019~2020년 때도 이지현이 19위에서 9위로 점프하는 등 상위권 순위가 요동친 시즌으로 꼽힌다.
박정환이 국내 랭킹 사상 최초로 1만점을 돌파(10024점)한 해는 2018년 1월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개월 뒤인 2018년 11월엔 톱 랭커 자리에서 밀려났다. 최정상 59개월만의 퇴위였다. 그해 3월 이세돌은 13위까지 뒷걸음쳤다. 변상일 이동훈 신민준 나현 등 젊은 유망주들이 10위권에 진입, 세대교체를 주도했다.
신진서는 2015년 11월 처음 10위권에 들었다. 2019년은 박정환과 신진서가 6개월씩 천하를 분할 통치하는 치열한 ‘대권 교체’ 기간으로 기록된다. 신진서는 2020년 1월부터 1위 독주를 시작, 올해 2월까지 38개월째 선두를 지키면서 박정환의 59개월 기록 경신을 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