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도 마지막 한 스테이지 만을 남기고 있다. 양딩신과 딩하오가 펼칠 결승 3번기다. 베이징 중국기원에서 온라인으로 벌어진다. 대국 날짜는 1월 30일과 2월 1일에 1, 2국을 치르고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2월 2일 최종 3국을 둔다. 중국 측의 요청에 따라 원래 예정했던 일정에서 한 주일 앞당겼다.
올해 LG배 결승전은 ‘딩딩전’이다. 중국 양딩신과 딩하오가 패권을 다투게 되면서 따라붙은 호칭이다. 역대 LG배에서 결승이 중중전으로 펼쳐진 것은 총 5번이다. 2006년 10회 대회 구리 대 천야오예전이 효시였다. 가장 최근 중중전은 2019년 열린 제23회 대회다. 당시 주역은 양딩신과 스웨였다. 양딩신은 4년 만에 같은 역할에 도전하고 나선 셈이다.

▲ 꿈이여 다시 한 번. 양딩신이 4년 전 제23회 LG배 우승 후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그는 올해도 결승에 진출, 6개월 정직 처분 상태에서 딩하오와 패권을 다툰다.
양딩신은 대표적인 친(親) LG배 기사로 분류된다. 23회 대회 때 우승하면서 9단으로 점프했고, 26회 때도 결승까지 진격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천하의 신진서를 벼랑까지 내몰았던 선전이었다. 그리고 올해 또다시 LG배 결승 무대를 밟았다. 박진솔 시바노에 이어 준결승에서 거함 신진서를 격침했다. 신진서에게 전기 결승전서 당한 패배를 이듬해 준결승서 설욕한 것이다.
1998년생인 양딩신은 중국 바둑계가 낳은 대표적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입단(9세 9개월)과 첫 우승(13세 6개월) 중국 최연소기록을 모두 그가 가지고 있다. 2019년엔 삼성화재배서도 준우승했다. 세계 메이저 결승전만 이번이 네 번째인데 그 중 한 번은 이미 정상에 발자국을 찍었다.
양딩신은 이번 LG배 결승전을 정직(停職) 처분 상태에서 치러야 한다. 세계 최고봉을 노크하는 영광스런 기회인데 정직 처분이 웬 말인가. 지난 연말 중국 바둑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공지능(AI) 치팅 공방전의 중심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보다 세 살 위인 선배기사 리쉬안하오가 준결승전서 신진서를 완벽하게 따돌리는 모습을 보고 치팅(불법참조)에 의한 부정 대국으로 단정했다. 뒤이어 SNS상에서 리쉬안하오를 향해 “20번기를 치러 내가 패한다면 은퇴하겠다”며 선전포고를 했다.
상당수 정상급 고수들이 양딩신에게 공감을 표했다. 반면 네티즌들은 “늦은 나이에도 AI에 특화되면 기량이 급상승할 수 있다. 리쉬안하오의 성장은 부단한 노력의 결실이며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라며 반박했다. 중국 바둑계가 완전 두 조각이 났다.

▲ 중국 2000년생 선두주자 중 한 명인 딩하오의 대국 장면. 생애 처음 세계 메이저 결승에 진출, 1월 30일부터 양딩신과 결승 3번기를 벌인다.
중국바둑협회는 12월 30일에 가서야 입장을 밝혔다. 리쉬안하오의 손을 들어주는 내용이었다. 양딩신에겐 중국 스포츠총국의 국가팀 SNS 사용 규정을 위반했다는 명분으로 6개월 정직이란 벌칙을 내렸다. 양딩신을 지지했던 일부 프로들에게도 경고 메시지가 전달됐다.
6개월 정직 처분이면 LG배 결승전은 어떻게 되나. 중국바둑협회는 국제대회인 LG배 결승 3번기는 허용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그리고 중국 국내 최대 바둑잔치인 갑조리그 출전도 ‘개인전 아닌 단체전’이란 이유로 허용했다. 일관성이 없는 결정으로 보이지만, 아무튼 양딩신으로선 생애 두 번째 세계 타이틀 도전에 나설 기회를 되살리는 행운을 잡았다. 세계 메이저바둑대회 결승전 사상 징계 중인 기사가 출전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양딩신과 결승전을 펼칠 딩하오는 어떤 기사일까. 양딩신보다 두 살 밑인 2000년생이다. 바둑계에서 2000년생은 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천년 단위 교차점이란 상징성도 있지만,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신진서가 2000년생이란 점도 작용한다. 2000년 이후 태어나 세계 정복에 한 번이라도 성공해 본 기사는 오직 신진서 뿐이다.

▲ 양딩신이 26회 LG배 결승 대국에 앞서 몸수색을 받고 있다. 양딩신은 폭탄 발언으로 중국바둑협회로부터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으나 이번 결승에 출전할 수 있게 됐다.
중국도 이 점을 의식해 2000년 이후 출생한 유망주들을 특별히 주목해왔다. 대표적인 기사가 셰커다. 2013년 입단한 셰커는 2021년 2개의 세계 메이저 무대 결승에 진출해 중국 팬들을 열광시켰다. 그 중 몽백합배에선 미위팅에 2대3으로 분패, 준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또 하나 잉창치배에선 신진서와 패권을 겨룰 예정인데,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일정이 미뤄지고 있다.
중국 2000년생 유망주로는 이밖에 랴오위안허, 리웨이칭 등이 꼽히자만 현재 선두 주자라면 역시 셰커와 딩하오 2명으로 좁혀진다. 2014년 프로가 된 딩하오는 2019년 제31회 TV아시아선수권대회 때 신진서와 결승을 치렀다. 당시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평생 라이벌‘을 향한 그의 결연한 눈빛은 팬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 2019년 제31회 TV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자 신진서(오른쪽)와 준우승자 딩하오(왼쪽)가 복기에 임하고 있다. 신진서와 2000년생 동갑인 딩하오는 이번 LG배서 첫 세계 제패에 나선다.
딩하오의 잠재력이 가장 무섭게 폭발했던 시기는 2021년 말이었다. 창기배서 양딩신을, 국수전에선 커제를, 대기사전에선 구쯔하오를 연속 꺾고 우승했다. 결승서 상대한 기사들이 하나같이 중국을 대표하는 간판급들이다. 딩하오의 랭킹은 당시 개인 최고인 2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딩하오는 국제대회 성적표가 국내 실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하다는 사실이 한눈에 드러난다. 이번 LG배를 제외하면 메이저 대회서 네 차례 16강에 오른 게 고작이었고 8강 이상은 한 번도 없었다. 주니어 시절에도 글로비스와 리민배 4강 한 차례씩에 그쳤다. 김지석 김명훈 강동윤을 연파하고 모처럼 결승까지 오른 이번 LG배에서 그간의 한을 풀 수 있을지 주목된다.
그렇다면 양딩신과 딩하오는 몇 차례나 맞대결해 각각 어떤 스코어를 받아 들었을까. 2014년 5월 제2회 이민배 세계신예최강전서 첫 대결한 후 2022년 8월 갑조리그서 마주칠 때까지 8년 여 동안 12판을 겨뤘다. 스코어는 두 기사 나란히 6대6. 우열을 가리기 힘든 팽팽한 성적표다.

▲ 리쉬안하오가 지난 12월 열린 제14회 춘란배 준결승에 임한 모습. 예상밖으로 거목 신진서를 완파, 양딩신에 의해 AI 치팅 혐의를 받는 등 큰 파문을 불렀다..(사진=한국기원)
그런데 시간 개념을 가미해서 보면 뭔가 흐름이 잡히는 것도 같다. 2014년부터 2020년 11월까지 전반부 여섯 판은 양딩신이 5승 1패를, 그 이후 2020년 12월부터 현재까지의 나머지 6국은 거꾸로 딩하오가 5승 1패를 기록 중이다. 결승전 맞대결은 제17회 창기배(2021년 10월) 때 한 번 이루어졌는데 딩하오가 2대0으로 완승했다.
이번 결승이 중중전으로 결정됨으로써 LG배의 역대 국가별 우승 회수는 결승 개막 휘슬 소리도 나기 전 한국과 중국이 12회씩으로 같아졌다. 일본과 대만은 각 2회, 1회 우승을 기록 중이다. LG배는 동양 4개국이 빠짐없이 정상에 올라본 유일한 메이저 대회다. 한국의 연패(連覇) 행진은 3에서 일단 멈췄다.
LG배는 한국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기전이다. 27개 성상을 쌓는 동안 숱한 명승부의 산실로, 각국을 대표하는 천재기사들의 운동장으로 역할을 다 해왔다. 올해 대회 결승무대에 한국기사 얼굴이 안 보인다는 사실, 우승 3억원과 준우승 1억원의 상금이 외국기사 손으로 넘어간다는 사실 등이 조금은 안타깝다. 결승전에 오른 두 외인(外人) 기사가 역사에 남을 좋은 기보를 남겨 그 공허함을 메워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