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전형적인 개인 대 개인 간의 승부지만 언젠가부터 단체전 형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단체전 형식 중에선 팀 리그와 5판 3선승제 방식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가장 인기 높은 포맷은 연승제 방식이다. 24회째 대회가 열리고 있는 농심배 세계바둑최강전이 대표적이다. 이 대회는 세계바둑을 대표하는 한 중 일 3개국 간의 전면전 형식인데다 각국 최고기사 5명씩이 겨루는 개인전 성격까지 가미, 흥미를 높여왔다.

▲ 2005년 2월 26일 상하이. 한국 이창호(오른쪽)가 중국 왕시를 제압, 기적적인 5연승으로 한국의 우승을 결정지은 대국이다.
농심배 외에도 남녀 양성(兩性) 대결장인 지지옥션배가 높은 인기 속에 치러지고 있다. 최근엔 호반배란 이름의 국가대항 여자 연승전이 생겨나 역시 주목받고 있다. 농심배와 똑같은 형식으로 진행되는 탓에 ‘여자 농심배’란 별칭까지 붙었다. 이밖에도 많은 바둑대회가 이 방식으로 거행되고 있다.
국가대항 연승전의 효시는 sbs가 1991년 출범과 함께 창사 기념으로 개최한 ‘sbs 세계바둑최강전’이다. 한국은 이 대회서 유창혁 서봉수 서능욱 이창호의 활약으로 주장 조훈현이 등판하지 않고도 일본과 중국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팬들의 호응이 크자 이 대회는 이듬해 본격 국제대회로 자리잡았다. 바로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이다.
놀랍게도 한국 바둑은 5년 간의 진로배에서 다른 나라에 한 번도 패권을 내주지 않고 모두 우승했다. 특히 마지막으로 치러진 5회 대회 때는 서봉수가 한국의 두 번째 주자로 출전, 파죽의 9연승 신화를 작성해 세계 바둑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3년 뒤 농심이 이 대회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대회 형식과 포맷은 sbs 창사기념 대회 및 진로배와 완벽하게 똑같다.

▲ 상하이 대첩 후 개선한 이창호. 공항에는 많은 팬들이 피킷을 들고나와 이창호의 장거를 축하했다.
국제 연승전 방식에 유난히 강한 한국 바둑의 전통은 농심배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첫 해부터 내리 6년 간 우승을 독식하는 등, 지난 해까지 22년간 14회에 걸쳐 패권을 잡았다. sbs 기념대회와 진로배 시절을 포함하면 총 우승 회수가 20회에 달한다. 이 기간 중국은 8회, 일본은 단 1회 우승국 명단에 올랐다.
한국 바둑의 융성기는 국가 연승전의 화려한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불세출의 스타 기사들이 대거 등장, 국가 연승전을 무대로 성장하고 활약하면서 국위를 떨쳤다. 특히 ‘농심배의 사나이’로 불리는 이창호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바둑 기록부문 전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이창호지만 특히 농심배에서 그가 작성한 기록은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만큼 화려했다.
한국의 초기 6연패(連覇) 기간 동안 이창호는 빠짐없이 주장(최종주자)를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이창호가 거둔 성적이 14연승이다. 어떤 난관이 닥쳐도 이창호라는 완벽한 방파제가 막아냈다는 얘기다. 그 중에서도 2005년 6회 대회 때 막판 5연승으로 대역전 우승을 이뤄낸 ‘상하이 대첩’은 국제 바둑사상 가장 충격적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 판팅위(오른쪽)은 두 차례 7연승을 질주하는 등 통산 21승 8패로 농심배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다. 사진은 2015~6년 벌어진 18회 대회 때 김지석과 대국 중인 모습
국가대항 연승전에서 따내는 승패 가치는 기용 순번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1, 2장으로 나가 거둔 승리와, 패권을 걸고 각국이 비장해 둔 최종 주자들 간에서 따낸 1승과는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창호는 8회 및 11회 대회 때도 ‘클로저’ 역할을 맡아 한국의 우승을 확정했다. 이창호가 역대 농심배서 쌓은 총전적은 19승 3패였다.
이 기록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누적 승수 부문에서 1위를 지켜왔으나 올해 24회 대회서 중국 판팅위에 의해 깨졌다. 지난 10월 열린 1라운드서 3승(1패)을 추가해 21승 8패로 이창호를 추월한 것. 하지만 판팅위가 따낸 승수는 대회 초중반에 획득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판팅위와 이창호 다음으로 농심배에서 많이 승리한 기사는 최철한(15승8패)과 셰허(15승 4패)다. 그 뒤를 박정환(14승 7패)이 간발의 차이로 추격 중이다.
판팅위는 농심배에 관한 한 이창호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쳐온 것이 사실이다. 단일 대회 연승부문 최상위 기록을 꿰차고 있는 기사가 바로 판팅위다. 18회(2016년)와 20회(2018년) 대회 등 두 차례에 걸쳐 각각 7연승씩 올렸다. 양딩신이 한 번 성공한 7연승(2019년 21회)과 함께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한국 기사 중 단일 대회 연승 1위 기록을 지닌 기사는 신민준이다. 2017년 19회 때 선봉장으로 나가 작성한 6연승이 그것. 이창호의 ‘상하이 대첩’을 비롯해 강동윤 신진서 후야오위 펑첸 셰허 당이페이 등이 각각 5연승으로 공동 5위권을 형성, 추격 중이다. 일본의 이 대회 최다연승 기록은 이야마 유타가 지난 해 23회 때 세운 4연승이다.

▲ 이창호의 뒤를 이어 한국 팀의 수호신으로 등장한 신진서. 지난해 23회 대회서 일본 이치리키 마저 잠재우고 5연승으로 한국 우승을 확정한 뒤 트로피를 높이 치켜들었다.
단일 연도 아닌 연속 개념으로 계산한 연승 기록은 또 달라진다. 이창호가 1~6회 대회 때 한국의 6연패(連覇)를 이끄는 동안 작성한 14연승이 난공불락의 요새로 남아있다. 이 기록에 도전할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기사가 한국 우리 바둑계 에이스 신진서다. 현재 9연승 중으로, 아직은 5승 차이가 있지만 최근 몇 년 간의 활약상으로 보면 기록 경신이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연승제 방식 국제대회에서 가장 값진 승리는 ‘우승 결정타‘다. 골인 지점을 넘어 팀 승리를 확정짓는 1승은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 이창호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이 부문에서도 압도적 1위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 그는 물경 8번(1~6회, 8회, 11회)에 걸쳐 팀의 우승을 확정지으며 대회를 마감시켰다. 승리 투수, 슈퍼세이브, 클로저…어떤 표현이 가장 어울릴까.
우승 결정타 부문 2위는 2회다. 8회인 이창호와 아직 현격한 차이가 있다. 2회를 기록한 기사도 단 2명에 불과할 만큼 난도(難度)가 높다. 그 주인공은 한-중 두 나라에서 현역 1인자로 활약 중인 신진서와 커제다. 신진서는 22회 대회 5연승, 23회 대회 4연승을 거두면서 두 번이나 한국의 우승을 견인했다. 커제는 17회와 21회 대회를 자신의 손으로 끝냈다. 이밖에 이세돌 최철한 박정환 김지석 요다 창하오 셰허 스웨 판윈러 당이페이 등 10명이 각각 1번씩 자국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 24회 대회 4국에서 3연승을 질주하던 판팅위를 꺾은 강동윤. 이 승리로 한국은 중국쪽으로 흐를 뻔 했던 물줄기를 돌리며 농심배 3연속 우승 전망을 밝혔다. (사진 제공=한국기원)
우승 결정타 부문 기록은 쉽게 경신될 것 같지 않다. 1위와 2위 이하 기록 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출한 스타 한 명만으로도 팀 우승을 가져갈 수 있는 것이 국가 연승전의 특성이기도 하다. 신진서가 최근 2년간 그같은 이치를 확인시켜주었다. 그가 앞으로 몇 년 간 현재의 위상을 유지한다면 이창호를 따라잡을 여지도 충분하다. 그 경우 한국의 연패(連覇)도 이어질 것이다.
24회째 대회가 진행 중인 농심배는 한국의 강동윤이 연승 주자로 대기 중인 가운데 오는 25일부터 2라운드에 돌입한다. 지난 달 열렸던 1라운드에선 중국이 판팅위의 3연승으로 기선을 잡는 듯 하다가 강동윤에게 막혔다. 한국은 이미 탈락한 1번 주자 신민준을 제외하고 강동윤 변상일 박정환 신진서 등 4명이 대기 중이다. 중국은 커제 구쯔하오 롄샤오 퉈자시 등 4명, 일본은 이야마 시바노 위정치 등 3명이 남아있다.
25일엔 강동윤과 일본 3번 주자 시바노가 대결한다. 우승국은 내년 2월최종 3라운드 때 결정될 예정. 한국이 3년째 연속 우승을 거두면서 국가 연승전에 유독 강했던 전통을 이어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