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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기과목’이 돼 버린 초반 포석
 
초반 진행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빠르다. 아마추어 아닌 프로바둑 이야기다. 8월 하순에 열렸던 제27기 GS칼텍스배 신진서 대 변상일의 결승전은 1인당 1시간씩 주어지지만 3판 모두 초스피드로 진행됐다. 중간에 TV를 켠 시청자라면 복기(復棋) 장면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로 손길이 빨랐다. 세계대회도 예외가 아니다. 올해 열린 LG배 본선, 춘란배 등 메이저 대국 대부분이 엄청난 속도로 초반전을 끝냈다.

▲ 신진서와 변상일의 GS칼텍스배 결승은 세 판 모두 번개 같은 속기로 이른 시간 끝났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바둑판의 구조와 인공지능 시대란 2가지 요인이 불러온 풍속도다. 바둑은 대부분 귀에서 시작해 변을 거쳐 중원에서 승패가 결정된다. 그런데 귀와 변은 웬만큼 사전 연구가 가능하다. 귀는 정석, 변은 포석이란 이름의 ‘매뉴얼’이 나와 있다. 하지만 주 무대가 중앙인 중, 종반전엔 개인의 감각과 수읽기로만 헤쳐 나가야 한다. 초반을 서둘러 마치고 난해한 중반 운영에 최대한 시간을 투입하려는 것이 초반 초속기 현상의 배경이다.

인공지능(AI)도 이런 흐름의 확산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알파고 등장 이후 바둑계의 ‘큰 사부님’으로 등장한 AI는 숱한 정석과 포석법을 쏟아냈다. 그 결과 인간들이 만들었던 기존 정석과 포석이 수정, 폐기되는 가운데 새로운 AI정석이 등장하는 등 ‘포석 헌법’이 완전히 재편됐다.

▲ 우주류로 유명한 다케미야. 우주류 건설의 수단으로 4연성이란 독특한 포석법을 즐겨 쓴다. (사진 제공=한국기원)


기사들은 AI가 제시하는 정석을 반복 분석한 뒤 실전에서 재현한다. 결국 포석시대엔 대국 쌍방이 똑같은 무기를 들고 나오는 셈이다. 괜한 장고로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낼 이유가 없다. 인기리(?)에 유통 중인 포석법 숫자는 채 30개도 안 된다. 대국자들은 이 중에서 몇 개를 골라 번개처럼 늘어놓는다. 바둑 한 판에 똑같은 형이 2~3개 등장하는 일도 흔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초반 40~50수가 지나도 기보만 보아선 이게 도대체 누구와 누가 겨룬 바둑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답습, 반복, 재생(再生) 모드의 반복이다. 급기야 “초반전이 ‘암기 과목’으로 변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오픈북 테스트’ 분위기도 감돈다. 초반이 암기과목이라면 중반전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창작 과목’, ‘중간고사’, ‘수행평가’ 등이 떠오른다. 종반전은 ‘졸업 시험’ 쯤 될까?

프로기사들의 시간 배분방식에 대해 아마추어들이 비판하는 것은 불경스런 일이다. 그들에게 반상(盤上)은 일터이고 바둑은 생업이기 때문이다. 이겨야 부와 명예가 따라온다. 승리를 위해 주어진 규칙 아래 최적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초반 배석(配石)을 지켜보노라면 뭔가 공허한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3막짜리 연극을 보러 갔는데 1막은 내래이션으로 줄거리만 들려주고 2막부터 액션에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돌 몇 개를 미리 배치하고 포석 없이 시작했던 순장바둑도 연상된다. 순장바둑은 ‘자유로운 발상’을 명분으로 밀려난 우리 고유의 기법(棋法)이다.

초반전은 착점 후보지가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풍성하게 널려있는 시기다. 중반이나 종반에 비해 추상적이고 난해하지만, 같은 이유로 사유(思惟)의 공간이 가장 넓다. 백색 도화지에 대국자만의 구상을 마음껏 그려 넣을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초반전이다.

중반전이나 종반전이 강퍅한 삶에 쫓기는 중년의 모습이라면, 초반전은 대통령, 아이돌스타, 게임선수 등 다채로운 미래 꿈을 번갈아 꿀 수 있는 10대 소년의 시간이다. 요즘 초반 진행을 보고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이 같은 황금시간대를 스스로 반납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백년 간 바둑 이론을 정립해 온 선현(先賢)들이 초반 포석에 특히 심혈을 기울인 것도 그런 이유였다. 자신의 페이스로 이끌려면 스스로 지닌 철학과 바둑관(觀)에 맞춰 판을 짜야한다는 믿음이 강했다. 기보(棋譜) 한 장에 대국자의 개성이 물씬 풍겼고, 단 20수민 훑어보아도 대국자가 누군지 맞출 수 있었다.

요즘 같은 ‘몰개성 포석시대’에 첫수가 천원이나 대고목, 또는 변(邊) 어느 곳에 떨어지는 바둑이 등장한다면 얼마나 신선할까. 30년 전만 해도 신수(新手), 파정석(破定石)을 들고 나오는 용감한 전사들이 있었고, 그 때마다 바둑계는 화제와 생동감이 넘쳐났다. 적어도 기계가 닦아놓은 포석 신작로를 매번 오토바이처럼 질풍 돌파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오청원과 목진석 등이 애용한 천원, 사카다의 삼삼, 야마시타의 5의五에 팬들이 열광했다. 한때 대외목을 비기(祕器)로 휘두르던 양건과 자오천위, 우주류 건설을 위해 ‘4연성’을 들고 나왔던 다케미야, 기존 행마법을 무시한 포석으로 “돌이 날아다닌다”는 평을 들었던 박상진 등 개성넘친 기사들은 많았다.

▲ 커제는 유난히 삼삼 포석을 즐겨 사카다의 수법을 계승하고 있다.


파격적 포석은 전략적으로도 시도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신진서 박정환 변상일 등 최정상 기사들은 기존 AI 진법에 가장 최적화된 기사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백날 똑같은 수법을 반복해봐야 돌파구가 나올 리 없다. 현재 귀의 정석은 삼삼 침입을 전후한 변화가 핵심이며 상당 부분 파해(破解)됐다. 자주 쓰지 않는 수법으로 도발했을 때 초1류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인간들이 펼친 새 변화에 AI가 어떤 결론을 내놓을지를 보면서 대항해야 한다. 삼삼의 좁은 울타리에만 갇혀있으면 새 지평을 열어젖힐 시야가 막힌다.

바둑 게임의 특성 중 하나는 일정 수수(手數)까지는 복사(複寫)가 허용된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이를 표절이라고 시비 걸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바둑의 장점에 속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조치훈이 8시간짜리 대국에서 초반 포석에 4~5 시간씩 투입한 것은 정석을 몰라서도, 속기가 서툴러서도 아니었다.

프로기사는 승부사인 동시에 예술가이기도 하다. 인간 바둑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것은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과 탐구정신이었다. 포석 단계에서도 고민하고 새 길을 찾는 과감함을 아주 가끔이라도 보고 싶다.


▲ <기보 1> 혼인보 슈사이 환갑기념 대국
定先 우칭위안 백 슈사이
1933.10.16.~1934.1.29 백 2집 승



▲ <기보 2> 효성 에바라배 결승 3번기 제2국
백 조훈현 흑 다케미야
1990.3.22. 흑 3집반 승



▲ <기보 3> 25기 일본 碁聖전 도전 2국
백 고바야시 고이치 흑 야마시타
2000.7.13. 흑 불계승



▲
<기보 4> 제5회 삼성화재배 본선 32강전
백 요코다 흑 양건
2000.8.30. 백 불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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