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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바둑협회는 ‘신커(申柯) 10번기’를 許하라
 
신진서와 커제, 한중 양국 바둑 1인자 대결을 놓고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다. 두 당사자는 10번기 대결을 원하는 입장이다. 신진서가 소속된 한국기원은 개최를 추진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하고 중국 바둑협회에 대회 개최에 대한 공식 제안서를 보냈다. 중국 바둑협회로부터는 아직 답변이 오지 않았지만 개최를 달가워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오청원 10번기 때와는 전혀 다른 환경

국내 팬들 중에서도 10번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일부 존재한다. 패자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다는 게 반대하는 근거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일본서 17년 동안 이어졌던 오청원 10번기를 예로 든다. 그 때 출전했던 일본 기사들은 11번에 걸친 치수고치기서 전패하면서 실제로 엄청난 수모를 겪었다. 후지사와(藤澤庫之助)가 대표적 실례다. 세계 최초의 9단이란 영예가 무색하게도 치수가 바뀌자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 하고 개명한 뒤 일본기원을 탈퇴했다.

▲ 2020년 벌어졌던 신진서(왼쪽)와 박정환 간의 남해 슈퍼매치 7번기 모습. 신진서가 7대0으로 완봉승 했으나 1년 뒤 둘 간에 펼쳐진 삼성화재배 결승전 승자는 박정환이었다.


그렇다면 번기(番棋) 패자는 무조건 승부 생명이 마감될 만큼 치명상을 입는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 2020년 박정환이 신진서와의 7번기 대결서 7대0으로 패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박정환의 미래를 지극히 비관적으로 보았었다. 하지만 그는 1년 뒤 삼성화재배 결승서 신진서를 만나 역전 우승, 건재를 과시했다. 2015년 이세돌 대 커제 10번기 때도 그랬다. 승자 이세돌은 기세를 타게 되리란 일반의 예상과 달리 답보에 그쳤고, 10번기 패자 구리는 오히려 세계 타이틀을 추가했다.

과거 수십년 전 10번기가 치명적이었던 것은 패배 이후 재기를 보여줄 무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10번기는 그 시절 임시로 만든 특설무대 같은 것이었다. 수십개의 국내외 타이틀전이 설욕 또는 재기의 무대로 활용되는 요즘과 달랐다. 신진서 커제 10번기서 지는 쪽은 영원히 바둑계를 떠나게 되리란 건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다. 10번기는 한 번 추락하면 사망하는 죽음의 계곡이 아니라, 빼곡하게 앞을 막아선 여러 개의 언덕들 중 약간 더 높고 가파른 또 하나의 봉우리일 뿐이다. 그 봉우리를 넘는데 실패하더라도 다음 언덕을 넘으면 된다.

▲ 오청원(오른쪽)과 10번기 대국 중인 후지사와. 일본 최초의 9단인 그는 10번기 결과 치수가 고쳐지자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개명한데 이어 일본기원 탈퇴를 감행했다.


승부사는 항상 위험에 둘러싸인 직업이다. 최고 등급 강자일수록 가장 힘든 상대가 대결 상대로 배정된다. 물론 돌아오는 상금도 최고로 크다. 모든 프로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땀을 흘린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이다. 관객은 그 긴장감을 즐기는 ‘스릴 소비자’다. KO 순간 승자의 결정타를 지켜볼 목적으로 경기장을 찾는다. 쓰러진 패자를 연민하러 입장권을 구입하는 관중은 한 명도 없다. 승패 비즈니스는 어차피 통쾌함과 참담함의 양극을 넘나드는 비정함이 본질이다.

절정기 대결 아니면 상품성은 하락한다

일각에선 선수 보호 차원에서 대결을 몇 년 뒤로 미루자고 제안한다. 한창 나이에 몸 상하지 말고 약자들 상대로 실컷 팔 비틀기 한 뒤, 은퇴를 앞두고 10번기를 하라고 한다. 프로기사들 대부분은 20대 중반부터 서서히 승률커브가 하강한다. 올해 신진서 22세, 커제는 25세다. 두 사람이 서른 살 안팎에 접어든 뒤 맞붙어도 여전히 ‘세기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월(移越) 상품을 원래 가격으로 구매할 소비자는 없다. 그 기간에 새로운 1인자가 등장할 수도 있다.

▲ 2014년 열린 이세돌(왼쪽) 대 구리 10번기 광경. 토틀 스코어 6대2로 이세돌이 완승했으나 이후 국제 대회에선 구리가 이세돌보다 더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바둑은 탁월한 콘텐츠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몹시 아쉬운 일이다. 제대로 프로 시스템을 갖춘 국가는 한 중 일 대만 등 동북아 4개국뿐이다. 그나마 팬들의 구미를 당기는 대결은 한중전 정도다. 양국 1인자 대결은 바둑계가 장만할 수 있는 현존 최고의 카드다. 그런데 마침 반외(盤外) 요인으로 그 두 사람 간의 10번기론이 불붙었다. 농심배 때 신진서에 대패한 커제의 경솔한 발언이 도화선이 돼 흥행 가치를 극대화시킨 것이다. 이런 ‘대박 상품’을 발로 내차는 식으론 바둑의 세계화는 요원하다.

▲ 2019년 제24회 LG배 준결승서 격돌한 신진서(오른쪽)와 커제. 이 대국을 이긴 신진서는 박정환과의 결승전도 2대0으로 돌파, 생애 첫 세계 메이저 제패에 성공했다.


돌아가는 모양새로 볼 때 신진서 커제 간 10번기의 연내 개최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커제의 신진서 상대 승산이 희박한 것이 걸림돌이다. 커제는 신진서에게 통산 11승 7패로 앞서 있지만 최근 다섯 판만 따지면 신진서가 4승 1패로 우세하다. 중국은 최근 2년 여 동안 단체전 개인전 여자대회를 가리지 않고 한국에 연패를 거듭 중이다. 가뜩이나 여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상황에서 승산도 높지 않은 신커 카드를 무대에 올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 국제 일정 등 난관 많아

이미 여러 창구를 통해 그런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10번기 상금은 준비하고 제안서를 보낸 것인가”, “올해는 아시안게임에 주력하는 것이 우선이다”,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상황이 어렵다” 등등이다. 한국기원이 중국에 대회 개최를 공식 제안한 것은 어느 정도 상금 마련에 대한 자신감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또 세부 조항들이 결정돼야 예산 규모도 책정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을 토론하자고 제안한 건데 반응이 뾰족하다.

중국 바둑계 원로 녜웨이핑(70)도 개최 반대 진영에 힘을 싣고 나섰다. 그는 ▲번기(番棋)는 한 시대의 종말이자 새 시대의 시작이다 ▲신커 10번기 후원 의사를 밝힌 기업이 아직 없다 ▲한국 기사들은 중국 기사에 비해 인터넷 대국 성적이 뛰어나다 등이다. 알 듯 모를 듯한 이유 3가지를 내세워 개최 반대 뜻을 밝혔다.

▲ 2018년 3월 일본서 열린 월드바둑챔피언십 본선 1회전서 신진서(왼쪽)가 첫 수를 착점하고 있다. 커제가 승리, 3승 2패로 신진서에 앞서기 시작했다.


유난히 빡빡한 올해 국제대회 일정도 방해 요소로 꼽힌다. 연기를 거듭해온 신진서 대 셰커의 잉씨배 결승 3번기는 올해엔 세상없어도 소화해야 한다. LG배, 삼성화재배, 농심배, 춘란배에 새로 출범한 란커배도 개막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최근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에 완전 봉쇄령이 내려지는 등 중국내 코로나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0번기를 치르기란 사실 쉽지 않아 보인다.

성사 여부는 중국 결단에 달렸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없다. 한국은 이번에 중국에 보낸 제안서에 “10번기가 길다면 5번기나 7번기도 좋다”며 최대한 신축적 자세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바둑협회는 올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온라인으로 치른다는 건 상상도 안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신커 10번기 대면(對面) 대국도 충분히 가능하다. 커제는 “일본 같은 제3국서 치르는 게 좋겠다”며 구체안까지 제시한 바 있다. 일정도 1인당 한 시간짜리 속기로 붙으면 열흘 내에 결판을 낼 수 있다.

▲ 제4회 바이링배 결승(2019년)서 맞붙은 신진서(왼쪽)와 커제. 커제는 이 대회와 2020년 삼성화재배 포함 신진서와의 두 차례 결승을 모두 이기는 등 총 11승 7패로 신진서에 앞서있다. (사진 제공 한국기원)


커제는 농심배서 신진서에게 패한 뒤 방송에 나와 “신진서와 나는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는 매번 놀라운 수를 터뜨려 나를 궁지로 몰았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뒤 10번기 얘기가 나왔을 때는 “언제 어디서 싸우건 자신이 있다. 상금은 승자가 몽땅 독차지하는 걸로 하자”고 했다. 서로 모순되는 2개의 발언 중 어느 쪽이 커제의 진심일까. 해답은 커제의 다음 이 한 마디에 녹아 있다. “신진서는 그날 왜 화장실에 그렇게 자주 간 거야?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바둑의 존엄성을 위해서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 찝찝한 숙제를 푸는 방법은 대면 대국뿐이다.

타이틀전 시대에 10번기는 다소 어색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가장 많이 벌고 가장 바쁜 두 기사에게 짐이자 선물을 또 안겨주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프로 세계는 수요가 발생할 때 활용할 줄 알아야 발전한다. 결과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아무 일도 못한다. “10번기가 바둑을 널리 알리는데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기다리고 있다”는 신진서의 한마디에 답이 담겼다. 중국 협회는 열린 자세로 두 최정상 스타의 열 차례 만남을 허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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